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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 증거자 /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 기념일 +++

 

축일:10월30일(10월31일)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 증거자, O.F.M cap.  

BLESSED ANGELUS OF ACRI

Beato Angelo d’Acri Frate cappuccino

Bl.ANGELO.CAPUCHIN PRIEST

October 19th 1669 at Acri.Calabria,Italy

- October 30th 1739

 

 

이탈리아 아크리 태생인 안젤로는 세례명은 Lucantonio (Luke Anthony)였다.

카푸친회의 입회를 두 번이나 거절당하고, 3번째의 청원에서 허가를 받았다(1690년).

그는 주로 설교 사도직을 수행했는데, 첫번째의 설교는 너무나 실패작이라서 그는 수 없이 기도하고 연습하여,

1711년 사순절 동안 실시한 나폴리의 설교가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위대한 설교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일생 동안 줄곧 칼라브리아, 나폴리 등지를 돌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켰고, 치유의 기적도 행하였다.

또 그는 환시와 탈혼의 경험이 많아서 예언의 선물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의 영혼을 궤뚫어 보는 능력있는 고해 신부였다. 

1739년 그는 아크리의 수도원에서 운명하여, 1825년에 시복되었다. 

 

 

안젤로는 임종시 다음과 같이 여러번 부드럽게 되풀이 하였다고한다. 

"Oh how good it is to love God!"  

"Come good Jesus come!"









'출퇴근하는 수련자'
('세 번 두드리라'는 뜻인) "Knock Three Times"는 1970년대의 활발한 미국 팝송 제목이다. 하지만 이 제목은 역시 17세기 후반, 20살짜리 '루카 안토니오 팔코네(Falcone)'가 수도생활 초기에 경험했던 그 성소위기를 요약해서 묘사하는 것 같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어느 한 카푸친 형제의 설교에 매혹된 남이탈리아의 아크리 마을 출신의 그 시골의 청년은 어머니의 눈물과 다시 생각해보라는 여러 친척들의 애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카푸친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689년 11월 8일, 그는 다피냐노(Dipignano)의 수련원 문을 처음으로 두드렸고, 그곳 형제들에게 환영을 받은 뒤, 카푸친 수도복을 입고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었다. 그 이름은 '안젤로 형제', 안젤로는 '천사'라는 뜻이다.

카푸친 형제회 안에서의 잠시 동안의 그 생활은 천사들의 생활과 유사했다. 땅으로 향한 눈길, 묵주를 돌리는 손, 그리고 하늘로 드높여진 마음! 그러나 젊은 안젤로 형제가 형제회에서 만난 천사들은 모두 다 좋기만 한 천사들은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타락한 천사 루시퍼의 교활한 유혹들과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는 심하게 유혹을 받았고, 결국 수도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집에서의 생활마저 그를 공허하게 만들었고, 곧 그는 겸손하지만 용감하게 카푸친 수련원으로 다시 돌아가 두 번째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관구봉사자의 특별 허가 덕분에 수련원의 문이 다시 한 번 그에게 열리게 되었고 그는 재차 수련복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카푸친 수도복을 입는 것만으로는 안젤로 형제가 겪었던 그 옛 유혹을 이기는 데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곧장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수도회를 두 번째 떠나자마자 그는 자신의 경솔한 결정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또 다시 카푸친 형제들에게 돌아가 세 번째로 문을 두드렸다. 안젤로 형제가 그토록 자주 수련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기에, 재치 있는 몇몇 형제들은 그를 "출퇴근하는 수련자"라고 불렀다. 1890년 11월 12일, 총봉사자가 모든 선례를 깨고 루카 안토니오에게 다시 수련기를 시작할 특별 허가를 내렸는데, 그와 같은 형제들의 놀라움을 상상해보라! 하지만 이번에 그는 1739년 그의 죽음까지 카푸친으로 남을 운명이었다.
 

1825 12월 18일, 아크리의 안젤로 형제는 시복되었다. 하지만 당시 거룩한 생활을 하려는 그의 몸부림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수련원으로 다시 돌아온 다음에도, 그는 미래의 성인 ‘코를레오네의 베르나르도’ 형제의 모범에 따라, 오직 거친 보속행위와 열렬한 기도로써 수도회를 떠나고픈 유혹을 물리쳐 수도생활에 항구할 수 있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그를 괴롭혔던 유혹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기대만큼 형제들의 가난 생활이 이상에 훨씬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감이거나, 혹은 정결을 거스르는 유혹을 물리치려는 데에 스스로 헛수고만 한다는 좌절감일 수도 있다. 마지막 설명이 더 그럴싸하다. 그는 정욕을 이기고, 정결에 대한 은총을 얻는데 12년 이상이나 분투해야 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다. 일찍이, 안젤로 형제 스스로 그러한 유혹들과 힘겹게 싸운 그 경험은 그를 비슷한 성소 위기를 겪고 있는 후배 형제들에게 인정이 넘치는 영적지도자가 되게 했을 것이다.




근면성실한 부모의 아들
이 위기는 안젤로 형제에게 닥친 첫 번 째 위기도 마지막 위기도 아니었다. 꽤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와 교구 사제였던 외삼촌의 도움에 의해 자라났다. 안젤로 형제는 1669년 10월 19일 ‘아크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루카 안토니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가난한 염소치기 농부인 츠란치스코 팔코네와 제빵사인 디아나 에느리코(Enrico)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종교심이 깊은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동네 초등학교에서 기본 교육을 받았고, 집에서 기초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매주 그는 동네 카푸친 성당에서 어머니와 함께 미사에 참례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그의 첫 사랑
1691년, 안젤로 형제는 종신 서약을 했고, 1700년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의 첫 소임은 설교였는데,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초창기 노력들은 실패하기가 일쑤였다. 그것은 그가 기발한 표현방식과 박식한 화술로 무장한 당대의 위대한 설교자들을 모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본연의 모습이 되는 것을 배워야했고, 자신만의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설교를 하느님 말씀, 특히 복음에 대한 영적 독서를 기반으로 삼아야 했다. 소박하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그는 악습을 비난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특히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기를 강력히 권고하곤 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체 안 실존, 그리고 통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복음의 부르심에 있어서 그만의 응답 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듯이, 그의 설교 원정들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 유혹에 맞서기 위해 '코를레오네의 베르나르도' 형제를 본받기로 영감을 받은 것도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였다. 사실 그리스도 고통에 대한 묵상은 그의 개인 기도생활의 매우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설득했고, 그의 본당 피정에서도 늘 그가 앞장 선 채, 그 지역 산비탈을 향한 십자가의 행렬로 마지막을 장식하곤 했다. 또, 그는 본당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지불하신 그 대가,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성덕의 삶으로 그 구원의 은혜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언덕 꼭대기에 세 개의 나무 십자가들을 심곤 했다. 그는 설교할 때에 성체조배를 많이 고취시켰는데, 보통 카푸친회 전통 신심행사인 '40시간 성체초배'를 포함시켰다. 때때로 그의 미사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그것은 안젤로 형제가 눈앞 제단위에서 펼쳐지는 신비들을 관상하느라 자주 황홀경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 특히 통고의 성모님이란 명칭에 대한 깊은 신심을 품었다. 




끝까지 형제들의 종이자 하느님 백성의 봉사자로
안젤로 형제는 수도원 안에서 수많은 봉사직무들을 맡았는데, 그중에는 수호자와 관구봉사자의 소임도 있었다. 형제들을 대할 때 그는 다정하고 너그러웠지만, 그와 동시에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과 카푸친 회헌을 지킬 것을 권할 때는 결코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설교와 고해성사를 주는 것은 그에게 첫사랑과도 같았기에 아크리의 안젤로 형제는, 1739년 10월 30일, 선종 때까지 이 봉사들에 몰두했다. 그의 시신은 아크리에 있는 '복자 안젤로의 성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곳은 카푸친들이 관리하고 있다.
 

"카푸친들이요 성 프란치스코의 참된 아들들임은 크나큰 은총이며 크나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다섯 개의 소중한 보석들을 알아보고 지녀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엄격성, 단순성, 회헌과 세라핌적 회칙에 대한 엄밀한 준수, 삶의 결백함, 그리고 고갈될 줄 모르는 애덕 (말입니다)." -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update 2012.4.5.

 

 

 

 

Vision of Blessed Alonso Rodriguez-ZURBARAN, Francisco de

Oil on canvas.Museo de la Academia de San Fernando, Madrid

 

 

축일 : 10월30일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

Sant’ Alfonso Rodriguez

St. Alphonsius Rodriguez, C

ST. ALONSO RODRIGUEZ

25 July 1532 at Segovia, Spain -

31 October 1617 at Palma, Majorca of natural causes; relics enshrined at Majorca

Beatified :1825

Canonized :6 September 1887 by Pope Leo XIII

Name Meaning:noble ready; battle ready; ready to do good

 

 

스페인의 세고비아 태생으로 마요르카에서 운명한 알퐁소 로드리게스는 성공한 양모업자의 아들로서,

그가 23세 때 아버지의 가업을 상속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업이 기울고, 아내와 어린 두 아이가 죽자, 평소에 늘 염원해오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그의 나이 40세 때 발렌시아의 예수회에 평신도 조력자로서 받아 달라는 청원을 드렸다.

얼마간을 망설이던 수도회는 그를 받아들여, 마요르카의 몬떼시온 대학에 보냈다.

 

알퐁소는 마요르카 섬의 팔마라는 곳에 파견되어 그곳 수도원에서 40년간 문지기 수사로 지냈다

따라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로드리게스수사와 접하게 되자,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의 충고를 유익하게 받아들였다.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

흑인 포교사업의 수호성인

축일:9월9일

 

특히 학생으로 있던 베드로 클라베르는 자주 그와 이야기 하였다.

(이미 베드로 클라베르는 그만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르셀로나에서 친하게 지냈던

평수사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로 부터 완덕에 대한 수덕 신학을 배웠다.

그가 흑인 노예에게 전교를 하게된 연유는 성스러운 친구의 덕택이 컸던 것이다.)

 

알퐁소 로드리게스는 신비에 관한 놀라운 감성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장상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체험들을 글로 옮겼다.

제랄드 멘리 홉킨스의 시(1930년)속에는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를 찬양하는 시가 있다.

 

 

 

Job and his False Comforters - FOUQUET, Jean.

1452-60.Illumination.Musee Conde, Chantilly.

성조 욥(St.Job)축일:5월10일

 

욥기 1,21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입을 열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 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구약의 의인 욥은 삽시간에 전 재산을 잃었고 또한 하루 아침에 아들 7형제가 사망하는 등

뜻하지 않은 불행이 계속 닥쳐 왔을 때에도 하느님을 추호도 원망치 않고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곤 했다

 

"주님께서 주시고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에 찬미가 있을 지이다!"

이 감탄할 표양을 본받아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그 참혹한 불행의 구렁에서도 주님을 찬미했던가!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도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그는 1531년 7월 25일, 스페인의 세고비아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을 아버지로 가진 그는 소년 시기를 보내고 이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았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이에는 수명의 귀여운 자녀도 있어 오붓하고 단란한 생활을 계속 했는데,

이와 같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들에게도 오래지 않아 하느님께서 안배하신 혹독한 시련의 손이 미쳤다.

 

우선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불운은 시작되고, 연달아 귀여운 자녀들이 죽어갔다.

사업도 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로만 돌아가니, 실로 아득한 절망만이 그에게 남아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악마는 사람을 유인하려 날뛰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유혹을 물리치고 과감하게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었다.

"주여!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렵니까?  그러시다면 내 몸까지도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이리하여 알퐁소는 즉시 발렌시아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을 찾아가 원장을 만나 입회의 승낙을 받았다.

이미 나이 40이요, 라틴어에 소양도 없는 그는 사제는 바랄 수 없고, 평수사밖에 될 수가 없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가혹한 시련 중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겸손의 마음이 더욱 깊어졌으므로

원장의 그러한 결정에도 역시 아무 불만없이 감사하게 따랐다.

 

반년 후 알퐁소는 마로루카 섬의 팔마라는 곳에 파견되어 그곳 수도원에서 40년간 문지기 수사로 지냈다.

전에는 손꼽히는 큰 상인으로 뭇사람들의 선망을 샀던 그가

이제는 현관을 드나드는 사제와 일반 수사들 앞에서 무릎을 끓어 강복을 청하며,

방문객에게 몸을 굽혀 공소히 안내하며, 거지에게도 공손히 친절을 베풀며,

때로는 은혜를 망각하고 무례한 언사를 퍼붓는 자의 모욕에도 개의치 않고 공손한 마음에서 기쁘게 참고,

그 모욕을 그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와 희생으로 바쳤다.

실상 그런 태도는 각별한 인내심에서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어느덧 그의 성덕은 세상에 널리 떨치게 되었다.

즉 그를 접해 본 사람들은 웅변을 토하는 사제보다 오히려 그의 꾸밈없는 태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짤막한 말들은 놀라운 하느님의 예지가 빛난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그의 교훈을 청하고 기도를 간청했다.

그들 중에는 국가의 원수(元首)로부터 고관과, 거상이며,

심지어는 대주교, 주교같은 고위 성직자까지도 끼어 있었다.

특히 학생으로 있던 성 베드로 클라베르는 자주 그와 이야기했고 많은 충고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팔마 수도원의 원장까지도, 신학의 소양은 없으나

성령의 비추임으로 탁월한 초자연적 지식을 간직한 알퐁소를 존경하며 열심히 권유해 책을 저술하라고 했다.

’수덕지남’과 그의 자서전은 그때 쓴 것이다.

이런 서적에서 그의 겸손된 마음속에 간직된 위대한 예지의 빛을 엿볼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알퐁소는 백발노인이 되어 위장병을 얻었고 그 고통을 달갑게 참았으나,

마침내 1617년 10월 31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제랄드 멘리 홉킨스의 시(1930년) 속에는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를 찬양하는 시가 있다.

 

 

Honour is flashed off exploit, so we say;

And those strokes once that gashed flesh or galled shield

Should tongue that time now, trumpet now that field,

And, on the fighter, forge his glorious day.

On Christ they do and on the martyr may;

But be the war within, the brand we wield

Unseen, the heroic breast not outward-steeled,

Earth hears no hurtle then from fiercest fray.

 

Yet God (that hews mountain and continent,

Earth, all, out; who, with trickling increment,

Veins violets and tall trees makes more and more)

Could crowd career with conquest while there went

Those years and years by of world without event

That in Majorca Alfonso watched the door.

 

-Gerard Manley Hopkins

in honour of Saint Alphonsus Rodriguez

laybrother of the Society of Jes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