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1월4일
성녀 엘리사벳 앤 시튼
St. e.ann seton
St. Elisabeth Ann Seton
28 August 1774, New York City, New York, USA as Elizabeth Ann Bayley
- 4 January 1821
Beatified:17 March 1963 by Pope John XXIII
Canonized:14 September 1975 by Pope Paul VI
창설자 뉴욕 1821년
엘리사벳은 뉴욕에서 태어났고, 1794년에 윌리암 시튼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1803년에 과부가 되었는데, 그 후부터 신앙생활에 눈을 뜨고 1805년에 가톨릭 교회로 들어왔다.
그녀는 1809년에 수도서원을 발하였고, 메릴랜드의 에미츠버그에서 선종하였다.
마더 시튼은 미국 까리따스회 세웠고, 또 아메리카 태생으로 1963년 첫번째 시복되신 분이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774년 뉴욕에서 출생한 성녀는 1794?부유한 사업가인 윌리엄 시튼과 결혼하였다.
병으로 남편이 죽자 30세의 젊은 나이로 돈 한푼 없이 다섯자녀를 양육하게 된 성녀는 어려운 생활 중에도 가톨릭 신앙을 삶으로 증거했다.
1809년 수도서원을 발하였고 미국 최초의 수도공동체인 사랑의 시튼 수녀회를 창설하는 등 많은 업적으로 미국에 가톨릭 교회의 초석을 이룩하였다.
1821년 선종하였고, 1963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미국 최초의 복자로 시복되었다.(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성녀 엘리사벳 씨튼 명상록" 에서
오, 성모 마리아의 덕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끊임없는 기쁨입니다.
그분만이 모든 하늘이 드리는 영광보다 더 많은 영광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오, 마리아의 순수함! 마리아의 겸허와 인내와 사랑.
가장 낮은 자리에서 멀리서나마 그 분을 닮아가리라.
사랑의 씨튼 수녀회 소개 www.seton.or.kr
미국 최초의 방인 수녀회인 사랑의 씨튼 수녀회는 성녀 엘리사벳 앤 씨튼이 1809년 에미츠버그에서 창설하였다.
빈첸시오 성인이 실천했던 가난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육화의 영성과 그 전통을 이어받아, 당시 미국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활동 수도회로 성장하였다.
그 후 수녀회가 확장됨에 따라 1870년 펜실바니아주 그린스버그시에 모원을 두는 수도회로 독립하였다.
그 당시의 필요에 따라 유치원 교육부터 장애자들을 위한 특수교육과 일반대학 교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교육사업을 펼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현대에 와서는 다양한 계층에서 소외받는 이들의 요청에 응답하고자, 사회사업과 특수사목 등에도 종사하고 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영혼의 유일한 소망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이루는 것일 때
우리에게 실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녀 엘리사벳 씨튼-
성녀 엘리사벳 앤 씨튼은 1774년 미국 뉴욕 시에서 의사의 딸로 태어나 20세에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고 어머니와 아내로서 살았으나,
29세에 남편과 사별한 후 성체께 대한 열렬한 신심으로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개종 후에는 당시의 필요에 따라 미국에서 최초로 교구 가톨릭 학교를 시작하셨으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이들에게 깊은 관심으로 봉사하였다.
수도회 창설자로서의 성녀의 삶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느님 자녀들에게 헌신하는 생활했으며
부드럽고 쾌활한 성품으로 수도회원들을 격려하여 기쁨에 찬 봉사의 삶을 살다가 1821년 47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성녀는
"교회의 딸들이 되십시오"라는 마지막 임종의 말씀을 통하여
수도회의 모든 회원들이 하느님 안에서 교회의 필요함에 항상 응답하도록 가르쳤다.
창설자의 정신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박고 그 터 위에 굳건히 서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더욱 견고히하여 넘치는 감사를 하느님께 드리십시오.(골로사이서 2,6-7)
성녀 엘리사벳 앤 씨튼의 영적 딸로서의 우리의 유산은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과 세상을 위한 구원 계획에의 헌신에 기초를 둔 것이다.
우리의 창설자는 모든 수도생활의 바탕이 되는 바로 이 사랑과 헌신에 자신의 성덕의 기초를 두었으며
우리 역시 같은 정신과 이상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성녀 엘리사벳의 "생활의 핵심"은 "매일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성체안에 계신 그리스?현존?대한 신앙에 끌려 가톨릭 교회에 들어 온 성녀 엘리사벳은 성체성사에서 일생동안 끊임없는 위로를 발견하였다.
"나는 천사들의 빵을 먹음으로써 원기를 찾고 격려를 받으며 위로와 만족을 얻고 내 존재 전체가 새롭게 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나는 하느님 안에 쉬고 있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에 언제나 복종하였고 어떤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영혼의 유일한 소망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이루는 것일 때 우리에게 실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복된 영원"에 대한 비젼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고 다른 수녀들에게도 이와 같이 권고하였다. :
"나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 모든 슬픔을 치유해 주는 것을 체험합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이 내 모든 것"이라고 계속 되새겼던 것이다.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고 그 속에서 주님의 섭리를 보았다.
"내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할 때
가난속에서도 풍요로울 수 있으며
깊은 고뇌 속에서도 즐거움이 있습니다."
기도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성녀 엘리사벳은 "주께서 많은 일을 제게 맡기셨으니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그분의 뜻을 언제나 택하려고 합니다." 라고 썼다.
그는 젊은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 항상 다른 이들의 필요함을 보았으며 피곤함을 이기고 남을 위해 일했다.
수녀로서 늘 기력과 시간에 쫓기면서도 "모든 주인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우시고 너그러우신 분 앞에서" 기쁘게 일했다.
성녀 엘리사벳은 자기 생애의 선교사명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영신적인 불안과 고뇌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이 그리 많은지!
남을 사랑하는
영혼들의 기도와 노력이 얼마나 커야 하겠는가!"
성녀 엘리사벳에게 있어서 이러한 노력의 형태와 방향은 하느님의 뜻이 알려지는 대로 구체화 되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초창기 미국 교회의 필요를 보고 그것에 응답하는 가운데 하느님 뜻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당시의 교회가 젊은이들의 교육 등을 위시하여 성녀 엘리사벳의 봉사를 얼마나 필요로 하였는지 알고 있고
우리 역시 변천해 가는 교회의 필요함에 성녀 엘리사벳과 같은 응답을 수도공동체로서 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성녀 엘리사벳은 씨튼 수녀들에게 공동생활을 위한 특별한 은사를 전했다.
"수도 생활속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기쁨과 조화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라고 성녀 엘리사벳은 기록하였다.
이 기초 위에 성녀 엘리사벳은 초창기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너그럽고 적극적인 성격이면서도 영성에 기초를 둔 이상을 보여주므로써 우리에게 수도생활의 모범이 되고 있다.
"내 일상생활의 목표는
모든 사건을 온유하고 조용히 받아 드리는 것이며
모든 알력을
부드러움과 쾌활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봉사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사명은 주께로부터 받은 소명에 영웅적으로 응답한 성녀 엘리사벳 씨튼에게서 기원한다.
곧 우리의 전통은 두려움없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고 그분의 사랑과 섭리에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두며
항상 "영원"을 바라보면서 어머니의 사랑으로 온 인류를 포옹하고자 했던 성녀 엘리사벳의 견고한 정신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
마더씨튼 영성
겸양· 소박· 사랑
그리고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라
"겸양·소박·사랑 그리고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사랑의 씨튼 수녀회 영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랑의 씨튼 수녀들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깊이 있는 기도생활을 통해 부드럽고 쾌활한 가정적 공동체를 이루는 가운데,
겸양·소박·사랑으로 활동하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는 생활을 하고자 한다.
특히 창설자 성녀 엘리사벳 앤 씨튼이 성 빈첸시오의 정신?19세기 미국 교회에 토착화하였듯이,
본 회원들 역시 성녀의 영성을 한국 땅에 토착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오늘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민감히 듣고 분별하여 융통성을 가지고 현대 교회의 필요에 응답하고자 하며,
여러 면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봉사하고 있다.
사랑으로 깊이 결속된 사랑의 씨튼 수녀들은 오늘도 기도와 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하느님과 그 나라를 증거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수녀회 역사
<짧은 내용>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와 성녀 루이즈드 마리약의 전통을 이어받아,
1809년 성녀 엘리사벳 씨튼께서 창설하신 미국최초의 방인 수녀회로서,수녀원 확장으로 인해 1870년 독립된 활동수녀회입니다.
모원은 미국 펜실바니아주 그린스버그시 씨튼힐 대학 내에 있으며
현재 400여명의 수녀들이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일반교육 및 몬테소리와 장애자들을 위한 특수교육과
소외받은 이들을 위한 사회사업 및 특수 사목에도 종사해 오고 있다.
본 수녀회는 1960년 당시 광주대교구의 故(고) 현 헤롤드 대주교님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진출하여
전남 지역에서 성 요셉 여자중·고등학교를 시작하였다.
1974년에는 수녀들 교육을 위한 서울 분원을 열었고, 광주시 근교로 수련소를 옮겼다가
1986년 광주시 북구 본촌동에 한국 본원 및 수련소를 마련함으로써 엘리사벳 씨튼의 정신을 토착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도다!
<긴 내용>
사랑의 씨튼 수녀회는 1809년 성녀 엘리사벳 앤 씨튼에 의하여 미국 메어리랜드 주 에미츠버그에서 창설된 수도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발티모아의 교구장 존 캐롤 대주교와 슐피시안 사제들의 지도를 받으며 엘리사벳 베일리 씨튼은
성 빈첸시오의 애덕회 회원을 당시 미국의 사도적 활동에 가장 적합하다고 인정하여수정을 가한 후 수도회의 회헌을 채택하였다.
새로운 회헌은 1811년 9월 캐롤 대주교에 의해 인준되었고 1812년 7월 19일 최초로 서원을 발했다.
성 빈첸시오의 회헌 자체가 지닌 융통성은 초창기인 미국 교회의 필요에 잘 적용할 수 있게 하여 수도회의 특징을 이루게 된 가동성과 다양성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17세기 프랑스에서 애덕회를 세우므로써
여자 수도자들도 봉쇄의 규칙에 매이지 않고 활동적 사도직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개념을 교회안에 복귀시켰다.
그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필요에 응답한 몇 資?젊은 여성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서 이빈자와 병든자를 위한 봉사에 뛰어 들었고 가난한 아동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 빈첸시오는 이 젊은 여성들을 지도하여 안정된 수도공동체를 형성토록 하므로써
봉쇄의 제약이 없이 도시의 빈민가나 가난한 시골에서 민중들 사이에 살며 일할 수 있게 하였다.
성 빈첸시오는 봉사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뵐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하였고 깊은 기도의 정신을 발전시키면서 서원을 통하여 공동체안에 사는 법을 가르쳤다.
마더 씨튼의 현명하고 성인다운 보살핌으로 에미츠버그에서 시작한 성 요셉수녀원은 번창하였고,
곧 발티모아, 필라델피아, 뉴욕, 세인트 루이지, 신시나티 등 미국 각처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수녀들은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보살폈으며, 아동들에게 교리교육을 하였다.
미국 국토가 확장되면서 수도회의 선교 활동도 더 많아지고 모원에서의 거리도 멀어지게 되자,
지방분권화의 경향이 나타나서 수녀들이 교구에 따라 독립된 수도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처음 1846년 뉴욕에 수도회가 세워지고 그 후 1852년에는 신시나티에 독립된 모원이 세워졌다.
그 전해인 1851년에는 에미츠버그의 수도회가 프랑스의 애덕회와 합하여 애덕회의 한 관구가 되었다.
1855년 뉴욕의 수도회는 캐나다 노바스코시아의 할리홱스에 수녀들을 파견하여 이곳도 한 수도회로 독립하게 되었고,
1859년에는 뉴욕과 신시나티 모원의 협력으로 마더 씨튼의 조카인 제임스 로즈벨트 베玖?주교가 뉴저지주 뉴워크에 또 하나의 수도회를 세웠다.
1869년 피츠버그 교구의 마이클 도미니크 주교는 신시나티 모원에 수녀들을 보내 줄 것을 청하여 1870년 8월 20일 알로이시아 로우수녀와
다른 세 수녀들이 당시 피츠버그교구에 속하던 알투나에 도착하여 9월부터 성 요한 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870년 11월에는 신시나티 모원에서 두 명의 수녀가 더 파견되었다.
그 중 한 명은 후에 알로시아 총장의 보조자가 된 안나 레지나 에니즈수녀로서 그 분은 알로시아 총장과 더불어 새 수도회가 독립된 수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1882년에는 씨튼 힐에 있는 모원의 땅을 구입했고 1889년 모원 건축이 완성되었다.
씨튼 힐에 모원들 둔 사랑의 씨튼 수녀회는 그 후 계속 사도적 활동이 확대되어 미국 여러 교구에 분원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에는 한국에 선교활동을 펴서 학교를 세우고 마더씨튼의 전통을 따라 성 요셉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1972년에는 교회법에 따라 한국에 수련원이 세워졌다.
사랑의 씨튼 수녀회는 원래 교구소속 수도회였으나,
1957년 5월 3일 로마 교황청의 수도성성으로부터 새 회헌을 인준 받고 교황청직속 수도회로 승격하였다.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수도생활 쇄신적응에 관한 교령에서는 수도공동체들이
"그리스도의 삶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각 수도회 본래적 영감에 돌아감과 동시에 우리 시대의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여" 수도생활을 쇄신시키도록 지시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의 규정은 각 수도회가 특별총회를 열고 수차의 실험기간과 총회를 가진후, 수도회헌 전체의 평가를 종합하여 회헌을 수정하도록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맞추어 수정된 새 회헌은 1981년 2월에 총회의 의결을 거쳐 로마 교황청에 제출되었다.
몇 부분의 수정을 거친 후 수도성성에서는 성녀 엘리사벳 씨튼 축일인 1985년 1월 4일에 새 회헌을 공식적으로 인준하였다.
본 회의 수녀들은 교육, 전교, 종교교육, 다양한 의료 및 사회사업에 종사한다.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역사를 보면 이 안에서 강한 신앙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용기에 찬 정신이 반영되고 있다.
같은 정신으로 고무된 본 수도회는 그리스도와 그의 선교사업에 대한 새로운 헌신과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본다.(사랑의 씨튼수녀회홈에서www.seton.or.kr)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축일:9월27일
성녀 루이즈 드 마빌락 축일:3월15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레시오 축일:1월24일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 축일:9월8일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 축일:11월28일
축일 1월4일(1월7일)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 3회
Beata Angela da Foligno Terziaria francescana
Foligno, 1248 - 4 gennaio 1309
Etimologia: Angela = messaggero, nunzio, dal greco
Blessed Angela of Foligno
Also known as Mistress of Theologians
Born : 1248 at Foligno, Umbria, Italy
Died : 4 January 1309 at Foligno, Italy of natural causes
buried in the Church of Saint Francis in Foligno, Italy
Beatified : 1693 by Pope Innocent XII (cult confirmed)
Name Meaning : angel, messenger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는 1248년 이탈리아 움브리아에서 태어났다.
회개 후 3회원이 되었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큰 사랑을 가졌었다.
영성생활에 관한 저술을 하였으므로 '신학자의 스승'이라고 불린다.
1309년 폴리뇨에서 선종했다.
복녀 안젤라를 당신 아드님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 있어 탁월한 모범으로 세우신 하느님,
그의 공로와 전구를 보시어 저희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여
주님께서 영광가운데에 다시 오실 때 기뻐 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안젤라는 1248년에 태어난 듯하고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 폴리뇨의 좋은 가문에서 출생했다는 정도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처음에 그녀는 어느 부유한 사람과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어릴 때에는 주의가 산만했고 또 세속적이었다. 이러한 그녀가 1285년경 참 빛의 환시를 보게 되었다. 이 환시는 고통이 가득한 통로를 통한 완전한 사랑과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갑작스럽게 개심하였고, 회개 생활을 염원하다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 제3회에 가입하여 빛나는 신앙의 눈을 밝히게 되었다.
우리는 그녀의 역사적 사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고, 다만 프란치스코회의 아놀드 수사의 기록에 의존할 뿐이다. 그녀는 '우나 베르지네 크리스티아나'란 단체를 이끌었고, 수많은 환시를 보았으며 명상가였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작은 형제회의 쇄신 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위대한 신비가로 알려져 있다. 사부 성 프란치스코를 열렬히 흠모하였으나, 성 프란치스코와는 아주 대조적인 성품이었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활동적이나 안젤라는 사변적이고 환시를 자주 보았다. 성 프란치스코는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보았으나 안젤라는 하느님 안에서 만물을 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 흐르는 원리는 단 하나 '행복한 사랑'이었고, 이것은 두 분에게 동일하였다고 한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가톨릭홈에서)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
3회는 또한 많은 신비가와 은수자(Anchorites)들에게도 매력이 있었다. 그들은 수도원과 깊은 관계를 맺고자 했지만 전통적인 종교 단체는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비가로 폴리뇨의 안젤라, 코르토나의 마르가르타, 피에르 페티냐노가 유명하다.
폴리뇨의 안젤라(1248~1309년)는 부유한 집안으로 결혼하여 선하고 덕을 따르며 성스러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3회가 주는 특권과 명예를 얻고자 3회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3회의 생활지침을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3회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갑자기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죽은 뒤 한 사람만 데리고 폴리뇨의 프란치스칸 성당 근처로 은퇴하여 은둔자처럼 살았다.
그런데 1291년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지로 순례를 가던 중 스펠로와 아씨시 사이에서 환시를 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위대한 신비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경험과 비전을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있는 사촌 아르날도(Arnaldo)에게 털어놓았다. 아르날도는 놀라움에 차서 그 내용을 받아 적었다.
안젤라의 신비주의는 전형적으로 프란치스칸적이다. 그녀의 관상이나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사셨던 그리스도의 삶에 기초한다. 그녀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향한 관상을 신앙과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예수님의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을 근거로 한 그녀의 관상 이론은 프란치스코가 만든 구유에서 시작하여 십자가를 향하는 예수님의 발자취에 이르는 구원 사건에 대해 관상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참조: 클라우스 리젠 후버, 이용주 역, 중세사상사, 열린책들, 2007, 261.).
그녀의 사상은 그녀에게 영향을 준 체험들로 이루어졌는데 모두가 프란치스칸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3회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아르날도 형제를 통하여 1회 수도자들과 가까워졌고, 찬송가(hymns)와 토디의 쟈코포네(Jacopone)의 찬가(Lauds)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축일은 1월 4일이다.
(김창재다미아노ofm,이현주ofs 엮음,재속프란치스코회역사,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출판부,2011,104-105쪽)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르타 축일 5월16일
*복자 피에르 페티냐노 축일 12월4일
*참고
제6절 3회의 성장과 활동
회개자들은 완덕을 지향하고 복음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방해받을 수 없었다.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을 원했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복음적 완덕을 실천하였다. 형제회에는 재속생활과 수도공동체생활을 원하는 이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는 3회의 시작부터 예정된 두 길이었다. 창설자의 카리스마가 형제회 안에 살아 숨 쉬는 초기에 회원들은 다투어 완덕을 살았고, 많은 성인성녀들이 배출되었다.
1. 3회의 두 방향 - 수도공동체와 재속생활
1) 수도공동체를 원하는 이들
‘회개자들의 회’가 회칙 인준을 받고 성장함에 따라 더욱 응집된 복음적 완덕의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 생전에도 은수자나 세속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회개회에 들어왔고, 당시 교회는 그들을 수도자로 인정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친히 입회시켰는데, 예를 들면 카스텔 피오렌티노(Castel Fiorentino)의 성녀 베르디아나(Verdiana), 로마의 귀족 부인 프락시데스(Praxides), 피렌체 근처의 빌라마냐(Villamagna)의 게라르도(Gherardo) 등이었다. 또 바르톨로메오 바로(Bartholomew Baro) 공동체는 성 프란치스코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회개자들에게 주어진 회칙과 수도복, 수련(Novitiate), 서약(Profession)은 정식 수도회로 발전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틀이 되었다. 그리하여 각 가정에서 사는 회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는 회원들로 삶의 두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참조: R. Pazzelli, 앞의 책, 248~249.
니콜라오 4세 회칙은 회개자들이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이 회칙은 수도자적 성격이 보다 더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을 원하는 이들은 회칙 의무 안에 ‘공동생활’을 적용시켰다. 공동생활은 좀 더 체계적인 예배를 드리고, 자선기관들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데 필요했다. 또 일상생활에서 상호 협력의 필요성에 의해 공동생활이 요구되었다.
또 하나 극단적인 움직임은 ‘은수생활’ 이었다. 처음부터 많은 남녀 은수자들은 고독과 속죄의 갈망을 채우고 싶었고, 자신들의 삶에 이 회칙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율수생활이 3회안에서 발전하였던 이유는 은수생활 경향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 규율의 매력과 자선단체, 특히 병원에 자유로이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R. Luconi and R. Pazzelli, II Terz' Ordine Regolare di s. Francesco attraverso I secoli (Rome, 1958)
수도회 설립 이전의 공동체는 여전히 회개자들의 형제회였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일했고, 신심활동에 자신들을 봉헌하였다.
(김창재다미아노ofm,이현주ofs 엮음,재속프란치스코회역사,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출판부,2011,96-97쪽)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재속 프란치스코회란?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라는 명칭은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78年 새 회칙을 인가하시면서, 붙여준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천년의 긴 역사를 살아오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수많은 영적 가족들을 탄생시켰고, 그 중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신 1, 2, 3회의 영적가족이 있으니 그 숫자가 오늘까지 8백년 동안 수천만에 이르렀고 현재의 가족수도 백만이 훨씬 넘는다. 8백년동안 수천만에 이르렀고 현재의 가족수도 백만이 훨씬 넘는다.
1회는 프란치스코 남자 수도회를 말하고,
2회는 글라라회라고 불리우는 여자수되회며,
3회에는 수도자인 수도 3회와 재속 신분으로 구성된 재속프란치스코회를 말하며, (전국 51개의 형제회와 6,5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들 프란치스코 영적 가족의 공통된 특징은 말할것도 없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세가족은 활기에 찬 친교를 이루면서도 각기 다양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실천한 빛나는 영성들을 스스로 배우고 익혀, 교회가 더욱 주님의 거룩하심으로 충만되도록 돕는다.
"선교활동"을 펴서 이 세상을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로 돌아오는데에 그 공동목표두고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지역, 지구, 전국, 국제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조직체이다.
기원과 발전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로마로 사도적 여행을 한 1212년경, 기혼 남녀 평신도들이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의 복음적 생활에 매력을 느껴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려고 헌신하였던데서 비롯하였다. 당시에 귀족이나 천민이나 성직자나 평신도 등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이끌려 프란치스코에게 오기 시작하여 성인은 제3회를 생각했고, 그들에게 생활규범과 모든계층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복자 루케치오 와 보나돈나 부부가 첫회원으로 알려져있다.
3회 배출 성인
제3회가 배출한 성인은 성 루도비꼬, 성 토마스모어, 성 요한 미안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등 60여명이 되고,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바오로 6세까지 20여명의 교황과 비때르보의 성녀 로사, 시성 단테, 예술가 미켈란젤로, 라파엘, 탐험가 콜럼버스, 레지오마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 빈첸시오와 바울로회 창설자 프레데릭 오자남 등 각계 각층에서 3회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교회를 빛냈다.
(재속 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재속 프란치스꼬 회원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의 서거 700주년을 맞이하여 보내는 편지
프란치스칸 가족의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그리고 특별하게 재속 프란치스칸과
정규삼회 형제 자매들에게
“어떤 이도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 할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다고 핑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은총을 찾으며,
간절히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비오 12세로부터 <조금 더 신비주의적 프란치스칸>이라 불리게 된 재속 프란치스칸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의 서거 700주년은 2009년 1월 4일 시작됩니다.
이 축제를 거대한 열의 속에서 지내기 위해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그녀를 위해 준비한 기도로 시작할 것이고, 기도는 다음의 말씀들과 함께 시작됩니다:
“말씀의 설교로 계몽되었고, 회계의 성사로부터 정화된, 당신은 복음적 덕들의 빛나는 모범과
그리스도적 인식의 지혜로운 스승이 되셨습니다. 완성의 길에서 안전하게 인도해주십시오”.
복음적 덕들의 모형
우리의 안젤라는 유아기 또는 청년기 이전에 복음을 향한 조화된 삶에 곧바로 정진하며,
거룩한 부르심을 느꼈던 영혼의 특권적 부류에 속하지 않으며,
기도의 심오한 영혼으로부터 일어났습니다.
안젤라는 회개한 자이며,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서 속죄자입니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그녀의 글들 속에서 장황하게 말하였고,
그녀의 글들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그리고 죄를 범한
젊은 시절의 여인의 초상이 흘러 나옵니다.
그녀의 회개는 또한 갑작스러운 사건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
7년간의 긴 괴로움과 고통의 여정 속에 발전하였고,
그것은 안젤라가 그의 고백사제이며 영성 지도자인 아말도 (Arnaldo) 수사 신부에게 기술한
회고록 “30 발자국” (“trenta passi” del Memoriale)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도시(폴리뇨) 에서 확인된 몇 가지 드라마틱한 사건들(작은형제들의 설득력 있는 설교와
초기의 “회개하는 형제 자매들”의 끌리는 모형들)의 영향 아래
그녀는 자신의 부족하고 방탕한 삶에 대해 역겨움과 참을 수 없음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죄 중에 있음을 자각하며 살고 있는 것만큼, 그것을 고백하는 커다란 부끄러움이었기에
그녀의 모든 행로는 급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젤라는 오로지 성 프란치스꼬의 도움을 기원한 후,
죄를 고백하는 부끄러움을 극복하였습니다.
그 충만한 고백으로부터 청원은 이루어졌고
자유로워진 그녀는 내적 쇄신과 삶의 근본적 전환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대는 1285년이었고 안젤라는 이미 37세였었습니다.
그녀는 부자였고, 남편과 아이들과 그리고 그녀의 경박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지지하셨던
(아마도 추진하였을) 어머니도 계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삶의 새로운 양상을 향상시키기에 쉽지 않은 장애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다른 의무들과 용무들은 멈춰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는 인간에서 독점적인 사랑을 요청하십니다.
가정 안에서의 장애들은 항상 가혹하였고,
가족들의 제안들은 시선을 줄만큼 가치가 없었습니다.
안젤라는 단지 주님을 위해 살아 갈 수 있도록 그리고 항구한 정결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기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신비적이고 놀랄만한 방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 시기에 나에게 가장 큰 방해였던 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나의 남편과 나의 모든 자녀들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젤라는 이러한 이별들을 하느님의 정확한 계획의 실현처럼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에 대해서는 고통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죽음은 그녀에게 마치 내장을 찢어버리는 고통이었다고
그녀 스스로는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의 표현에 대해 간혹 어떤 성인전은
납득되지 않는 해석을 부여하였고.
그러한 성인전에서 안젤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유한 부르심을 실현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그녀의 자녀들의 죽음을 기도하였다는 여자처럼 소개되었습니다.
그녀는 홀로 남아 있고, 복음적 권고를 기억하며,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가능성은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19,21).
주님은 그녀가 마지막 망설임 들과 저항들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셨고,
노년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매우 값진 고급 별장과 농지까지
그녀의 모든 소유물들을 단념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확고함을 그녀에게 증여하셨습니다.
프란치스꼬와 그의 초기 동료들처럼 그들의 재산을 팔아 얻은 모든 이익을
도시의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가족 관계들과 지상의 복지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안젤라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합당한 자녀처럼 조금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합당한 자녀들은 그들의 스승에게 모든 것들을 응하도록 공부하고,
스승은 그들을 위해 가난과 고통과 경멸 안에서 수난을 따르며,
이 3가지는 모든 완전함의 완성이며 근본 입니다.” (Quarta lettera)
안젤라는 영혼을 수양하는 노력을 하였고,
우리는 현재적 언어로 그것을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기는 것”이라 명할 것입니다.
봉사와 관련된 일화들은 그 명칭을 증거하고,
안젤라와 그녀의 신앙생활의 동료들은 나병환자들의 병원에서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병자들에게 식사로서 생선들을 제공하기 위해 안젤라는 머리에 두르고 다녔던
베일조차 팔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유명한 일화로, 병자들이 사용한 욕조의 물을 안젤라와
그녀의 동료들은 마셨습니다. 그리고 “널리 알려지지 않아,
풍부한 감미로움의 평온함을” 이제서야 입증하듯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현대적 감수성에 조금은 혐오스럽고 비상식적이라 말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꼬가 고름투성이의 불구자인 나병환자가 사용하고 있는 그릇에
빵을 함께 적셔 먹었던 그 행동과 동일시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인식의 스승
마침내 그녀는 점점 커지는 열망 속에서 평온함과 가난함 그리고 복음적 완전함에
홀로 남아있었으며 청명하게 그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 할 수 도 있겠지만,
그러나 상황은 이와 같지는 않았습니다. 충격적인 회개의 방법들은 그녀에게 매우 많이 험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새로운 빛 안에서 그녀는 더욱 더 그녀가 행한 죄에 대한 책임감을 발견하였습니다.
특히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그녀의 부족한 점들에 대한 기억은 예기치 못한 강렬한 요구와 함께
그녀를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실제적 존재와 지옥의 의미에 대하여 그녀는 느꼈습니다.
그러나 매번 그녀는 하늘에 그녀의 의심에 대한 해결과 명확성을 요청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다시 용기를 불러일으키셨으며
그녀의 어두움을 밝혀 주셨습니다.
6년간의 회개생활이 지난 후에 안젤라는 성 프란치스꼬의 이상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준비됨을 드디어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원기 l’anno di prova 를 완성하고 1291년 여름 재속 프란치스꼬회에 서원을 하였습니다.
같은 년도에 정결한 아버지의 축제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아씨시를 순례였고, 그 순례는 축복의 이야기 속에서
유명하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아씨시에 머물고 있던 중에 그녀는 삼위일체의 현존을 그녀의 내면에서 체험하는
숭고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은총에 대한 개인적 현상은 성 프란치스꼬를 통해 하느님께 향하여
모든 정신을 몰입한 기도 중에 실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생기 있게 느낄 수 있으며, 서원한 회칙을 완전하게 따를 수 있으며,
진정한 가난으로 죽을 수 있도록...
비범한 신비적 사건이 끝났을 때, 그녀는 진정으로 자포자기적 상황에 열중해 있었고,
함께하였던 참석자들은 그녀의 아우성과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혼란스러웠고,
경악하였습니다.
참석자들 사이에는 아말도 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안젤라에게 아씨시 순례를 더 이상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 발생하였는지 이해하였고, 그리고 거대한 신비적 체험을 중요하게 다루며,
안젤라가 그에게 언급했던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 기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복녀 안젤라의 영혼의 자서전 (Autobiografia spirituale della Beata Angela) 혹은
아말도 수사의 회고록 (Memoriale di fr. Arnaldo)이 태어났습니다.
안젤라의 고행은 중단하지 않는 고통들과 계시들 그리고 탈혼상태의 기도들
그리고 냉혹한 의혹들과 악마의 함정을 예측하는 것,
회개와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고행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이 모든 고통은 그녀의 간구 속에서 멈추지 않았으며,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것은 증명됩니다:
“모든 계시와 모든 환시, 모든 느낌, 모든 부드러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일 인간이 진정한 하느님의 인식과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모든 지혜와 고귀함, 모든 명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Seconda Lettera).
완전한 길 안에서 인도
시민과 정치 그리고 종교의 거대한 투쟁의 시대 속에서
안젤라는 그녀의 환경 속에서 넓고 심오한 영향력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서 수 많은 영혼의 집단이 형성되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돋보이는 인물로서 까살레 출신의 움베르티노 Ubertino da Casale 수사를 발견합니다.
모든 이에게 능통한 완전한 안내를 하는 것처럼,
영감을 받은 조언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녀의 절제 있고 현명한 업적은 프란치스칸들 사이에서
가난을 따르는 것에 대한 흥분된 논쟁 속에서 또한 나타납니다.
“폴리뇨의 가난한자”는 탈선적 경향들을 지배하며,
화해와 설득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짓된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방임주의자들”에게 까지 엄격하였으며,
모든 이들에게 복음의 진정한 영성을 언급하였고,
겸손하지 않은 자는 진정으로 가난한 자가 아니라 하였습니다.
안젤라에게 진정한 종교적 “모임”의 방향과 기초토대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안젤라는 많은 이들에게 일치를 위해 주목할 만한 지침들을 제공하였고,
그녀에게 그들은 질문들과, 설명과, 자극, 그들의 문제들의 대조, 어려움과 의혹,
불확신에 관련된 것들 말씀의 도움을 얻기 위한 청원들을 보냈습니다.
그들과 대조하여, 안젤라는 충만하게 영성적 모성으로 충만하게 살았습니다.
그녀 스스로가 다음과 같이 명확히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제가 잃었던 아이들의 자리에 다른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스승이며, 모범이신 프란치스꼬는 유언에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선물로 주신
“형제들”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안젤라에게, 여성성의 표현과 같은 하느님의 선물은
영혼의 “자녀들”입니다.
그녀의 편지들 안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감동스러운 사랑의 말로 표현합니다:
“오 내 영혼의 친애하는 이들이여 – 나의 가까운 이들- 나의 친애하는 이들이여”
그리고 항상: “친애하는 아들”,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자녀들에게”...
안젤라의 영적인 자녀들에게 영성적 체험의 역할을 하게 하였고,
영혼의 완전한 행로 안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질책하며, 지지하였으며,
그녀 자신은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충만함”에
도달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기도하며 살아가는 복녀 안젤라는 숙련한 스승입니다.
“신성한 빛”과 구원을 얻기 위해 불가피한 방법처럼 다음과 같이 명시합니다:
“신성한 빛 없이 어떤 인간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네가 그 빛을 지니길 다시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만일 네 안에 있는 그 빛이 커지길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만일 네가 믿음을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만일 네가 희망을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만일 사랑을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만일 네가 가난을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만일 진정한 순종을 네가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만일 네가 정결을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만일 네가 어떠한 덕을 원한다면
기도하여라”: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삶의 책을 읽는 이러한 방법 속에서 기도하여라” (Instructio II, righe 229 ss.).
안젤라는 충만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녀의 모태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어머니였고,
일찍 그들을 잃어 버린 어머니였습니다;
상속권을 박탈당한 어머니로서 그녀는 자녀들을 위해
지상의 모든 재산을 팔았습니다;
그녀는 영성적 자녀들의 어머니였고,
그들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까지 그녀 곁에 함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안젤라의 죽음
사라지지 않는 가치들과 생각들로 가득 찬,
감동스러운 편지와 유언입니다!
신성한 계시로, 그녀에게 다가올 최후를 알게 되었고,
고아가 될 제자들에게 마지막 권고를 남겼습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모든 사람들 속에서 사랑을 지니도록 모든 노력을 하여라...
더 이상 이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인 그 사랑을 지니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여라”
하늘로 향하는 그녀의 “죽음”은 감동적이고, 교훈적입니다.
제자들은 경건한 죽음에 임박한 복녀가 있는 폴리뇨로 축복을 받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 권고를 듣기 위해 달렸습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과 부재중인 이들에게 모든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기도합니다.
그 때는 1309년 1월 4일 이었습니다.
이 편지는 모든 프란치스칸들 특별히 재속 프란치스칸들과
정규삼회에 속한 이들에게 이 편지를 보냅니다.
사랑의 방법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혼의 형언할 수 없는 일치적 영성과
신비적 측면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의 초대를 기쁘게 맞아들이며,
짧게나마 우리들은 복녀 안젤라의 인간적이고
영성적 변천의 인식을 숙고하기 위해 그녀의 모습을 기념합시다.
로마, 2008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엔까르나시옹 델 뽀조
국제 형제회 총봉사자 OFS
< 번역 : 국가 형제회 번역위원 안선희 데레사 자매님 >
'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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