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1월 20일
성 파비아노 교황 순교자
Pope FABIAN
San Fabiano Papa e martire
St. Fabianus, Pap. M
Papal Ascension 236
artyred c.250; his relics are long gone,
but the stone that covered his grave is still in the catacombs of Saint Callistus, Rome, Italy
로마의 평신도이던 파비아노는 236년 1월 10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선거를 실시하는 동안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에 내려 앉았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의 업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없다.
다만 이단 문제로 인하여 아프리카의 람베사의 프리바투스 주교를 단죄하였고,
가다꼼바에서 행한 놀라운 복원사업 등이 돋보이며, 데치안의 크리스챤 박해 초기에 순교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파비아노는 로마의 성직자와 신자들이
새로운 교황을 선출할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자기 농장에서 로마 시내로 돌아오던 평신도였다.
교회 역사가인 에우세비오는 이 때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파비아노의 머리위에 앉았다고 말했다.
이 표시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만장일치로 파비아노를 선출하게 되었다.
그는 14 년 동안 교회를 이끌어갔고 250 년 데치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영광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성 치프리아노는 그가 ’비할 데 없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영광스러운 죽음은 그가 살아온 성덕과 순결에 어울리는 것이었다고
자기 후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성 갈리스도의 지하공동체(가다콤바)에서는 파비아노의 무덤을 덮었던 돌을 아직도 볼 수 있는데
네 조각으로 갈라져 있는 이 돌에는 ’파비아노 주교 순교자’라고 그리스 말로 씌어 있다.
.....
데치오 황제가 일으킨 박해가 너무나 혹독했기 때문에 교우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로마인들이 로마를 많이 떠났기 때문에, 은수(隱修) 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단 문제로 인해 아프리카의 주교 람베시스의 프리바투스에 대한 단죄를 인정하고
전임자 폰시아노 교황이 단죄한 오리게네스가 화해의 표시로 보낸 서한에 응하지 않았다.
또한 사르디니아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난 폰시아노 교황과
히폴리토 사제 순교자 성인의 시신을 로마로 모셔 성대하게 예를 갖춘 후 갈리스토 묘지에 장례 지냈다.
성 치프리아노가 증언하는 바대로,
데치오 황제가 박해를 시작하던 무렵인 250년 순교의 월계관을 얻어 갈리스토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성 세바스티아노 대성전에 이장되었다
236년 로마 교회의 주교로 뽑히고, 성 치쁘리아노가 증언하는 바대로,
데치우스 황제가 박해를 시작하던 무렵인 250년 순교의 월계관을 얻어 갈리스도 묘지에 묻혔다.
파비아노 교황의 순교에 관한 성 치쁘리아노 주교와 로마 교회의 편지에서
(Ep. 9,1 et 8,2-3: CSEL 3,488-489. 487-488)
파비아노는 우리에게 신앙과 덕행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성 치쁘리아노는 교황 파비아노께서 죽음을 당했다는 확실한 전갈을 받았을 때
로마에 있는 사제들과 부제들에게 다음의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나의 동료 주교이고 훌륭한 인품을 지닌 그분이 죽었다는 불확실한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러분이 차부제 글레멘스 편으로 내게 보내 준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그분의 영광스런 죽음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들어 있었습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교회 직무를 수행한 그분이 그렇게도 영예로운 마지막을 맞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몹시 기뻐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장엄하고도 찬란한 증거로써 그분을 공경하며 기념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여러분께 축하의 말을 보내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쓴 이 편지를 통해서 나는 여러분의 지도자에 대한 영광스러운 기념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영예가 되고 또 우리에게도 얼마나 위대한 신앙과 덕행의 모범이 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실상 지도자의 몰락이 그의 수하 사람들을 몰락의 위험으로 이끌수 있기에 그것이 큰 해가 될 수 있지만,
한편 주교가 자기 형제들에게 굳센 신앙의 모범을 줄 때 그것은 가치있고 유익한 것이 됩니다."
이 편지를 받기 전 로마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고 있을 때 신앙을 지켰다는 다음의 증언서를
이미 카르타고 교회에 보냈다고 한다.
"이곳 교회는 대체로 견고히 신앙을 간직하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높은 지위나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공포심에 사로잡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간 이 사람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그분에게서 용서를 받도록,
또 우리가 그들을 버린다면 더 나쁜 상태가 될까 염려되어 그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우리처럼 하여 떨어져 나간 이들이 여러분의 권고에 힘입어 회개하도록 하십시오.
그들이 다시 체포되게 된다면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럼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기워 갚게끔 하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또 다른 것들도 말해야 하겠습니다.
이시련에 넘어진 이들 가운데 그 병에서 회복되기 시작하여
잘못된 것에 대해 보상하고 교회와의 일치로 되돌아오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그런 이들을 마땅히 도와주어야 합니다.
과부들이나 또는 감옥에 있거나 자기 집에서 쫓겨나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낼수 없는
억압받는 이들도 도와줄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병에 걸린 예비 신자들도 그들이 기대하는 도움을 받지 못해 실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슬에 매인 형제들과 사제들과 온 교회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 대해 언제나 큰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가톨릭홈에서)
*성 치프리아노 주교 축일:9월16일
성 파비아노 교황 순교자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이 어느 날 하느님을 체험하고 나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농부였던 파비아노는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던 시기에 우연히 도시로 가게 되었다.
그가 도시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파비아노의 머리에 앉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새 교황의 징표라고 믿었다.
그는 정식으로 교황으로 선출된 후 데치오 황제의 박해로 순교하기까지 15년 동안 교황으로 재위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날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야. 나는 그때 단순히 내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는데,
글쎄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 내 머리 위에 앉는 거야. 그리고 난 교황이 되었지.”
성 파비아노처럼 특별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감싸는 따뜻한 느낌이나 마음속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기쁨과 같은
작은 체험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특별히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 가까이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최근에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던 때는 언제인가?
오늘 나의 삶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찾아보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어릴 때부터 열심이던 이 아이는 아버지 베르나르두스(Bernardus)가 적임자를 골라 결혼 서명까지 하였으나 그녀 자신은 동정서원을 발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결혼 상대자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부친이 사망하자 스메랄도는 오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바시코(Basico)에 있는 산타 마리아(Santa Maria)의 클라라회에 입회하여 수도복을 받고 수도명을 에우스토키아(Eustochia)라고 하였다. 성녀 에우스토키아는 귀족 출신이면서도 가난 정신이 뛰어났고,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신심과 통회 정신이 극히 열렬하여 전 수녀회의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바시코에서 11년을 살고난 뒤 그녀는 더욱 엄격한 규칙을 원하였는데, 교황 칼리스투스 3세(Callistus III)가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 설립을 인가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메시나의 몬테 베르지네(Monte Vergine)에 수도원을 세우고 회원을 모집하였으나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성녀 에우스토키아는 1485년 1월 몬테 베르지네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782년 9월 14일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8년 6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메시나에서 시성되었다. 그녀는 에우스토키움(Eustochium)으로도 불리며 메시나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 콜렛타(Coleta)의 개혁 콜렛타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교회와 나라의 뒷받침을 받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지방을 다니면서 복음적 단순함과 가난의 씨앗을 뿌렸다. 그녀가 수도회 개혁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것은 1447년(66세)이었다. 개혁을 이루기 위해 콜렛타는 성녀 글라라의 수도규칙을 기초로 하는 회헌을 썼다. ‘Coletinae’라고 하는 이 회헌은 1434년에 먼저 작은형제회 총봉사자가 인준했고, 1458년에 교황 비오 2세가 재확인하였다. 콜렛타의 회헌을 보면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생활로 돌아가서 가난과 복음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지원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참물 없이 수녀원에 입회해야 한다. 사치스럽거나 불필요한 물건은 허용되지 않는다. 건물은 검소하고 단순해야 한다. 손수 일하는 것이 생계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고 모든 자매들이 똑같이 일해야 한다. 자매들 간의 일치와 형제애를 돈독히 해야 한다. 그리고 봉쇄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등이다. 콜렛타는 글라라의 수도규칙을 거의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정신도 잘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규율적인 규정을 받아들였고 이 점에서 우르바노 4세의 수도규칙을 따랐다. 2회 자매들이 1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점은 성녀 글라라와 같았고, 형제 4명(사제 2명, 평수사 2명)이 수녀원의 일을 도와 줄 것을 원하였다. 성녀 콜렛타의 개혁은 1회 형제들에게도 쇄신의 계기가 되었다. 1431년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카살레의 굴리엘모 총봉사자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글라라의 수녀원을 다 개혁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많은 수녀원의 반대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참된 쇄신을 가져다주고 좋은 성과를 낸 것은 옵세르반트 운동이었다. 옵세르반트 형제들의 내적이고 영적인 열성은 2회에도 참된 쇄신을 가져 왔다. 쇄신의 목적은 항상 성녀 글라라의 수도규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 쇄신운동으로 ‘우르바니테’(Urbanitae) 수녀들뿐만 아니라 율수3회나 원래 프란치스칸 가족에 속하지 않는 수녀회도 성녀 글라라의 수도규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때의 개혁자들은 대부분 복녀들이고 볼로냐의 성녀 카타리나도 큰 역할을 하였다. 성 에우스토키아 스메랄도 칼라파토 - 메시나의 수호성녀
스메랄도는 바시코(Basico)에 있는 산타 마리아(Santa Maria)의 글라라회(the Poor Clare Convents)에 입회하려고 하였지만 그녀의 생각을 알게 된 오빠들은 몹시 화를 내면서 이렇게 협박하였다. “만일 네가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수도원을 불살라 버리겠다. 그러니 오빠들이 그런 생각 하지 않게 하고 싶거든 수도원에 입회하겠다는 생각을 단념하거라.” 그러나 오빠들의 그러한 위협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확고부동한 뜻을 지켜나가자 마침내 가족들도 모두가 동의하여 그녀는 1449년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스메랄도는 가난, 정결, 순명을 서약하고 수도명으로 ‘에우스토키아’를 받았다. 하지만 글라라회의 봉쇄 수도원에서 수녀들이 아주 엄격한 참회와 보속생활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에우스토키아 수녀는 다소 실망하였다. 그래서 에우스토키아 수녀는 글자 그대로 글라라회 수녀로 살기 위해 다른 수녀원을 가려고 하였다. 에우스토키아 수녀의 그러한 소망을 들은 교황 갈리스도 3세(1455-1458)는 수도회 쇄신 운동을 철저히 하고 있던 새로운 공동체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에우스토키아 수녀는 산타 마리아 아코모다타(Santa Maria Acommodata) 수녀원으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에우스토키아 수녀가 체험한 환시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따랐다. 에우스토키아 수녀의 조카 바울라(Paula)와 그녀의 언니도 이 새로운 수도 공동체에 입회하였다. 에우스토키아 수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었으며 성체 앞에서 밤을 새워가며 기도에 전념하였다. 메시나(Messina)의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은 에우스토키아 수녀의 자선활동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에우스토키아 수녀는 자신을 따르는 공동체 회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수도원을 몬테베르지네(Montevergine)에 건립하였다. 몬테베르지네는 ‘거룩한 동정녀의 산’이라는 뜻으로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이 산으로 많이 몰려왔다. 에우스토키아 수녀가 이 수도원의 장상으로 있는 동안 참으로 많은 어려움과 역경들이 겹치면서 그녀는 교황청에 지나치게 엄격한 규정을 완화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메시나 사람들은 평소에도 에우스토키아 수녀를 자신들의 수호자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특히 지진이 일어났을 때 더욱 그렇게 생각하였다. 에우스토키아 수녀는 1491년 몬테베르지네에서 선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일설에 의하면 그보다 일찍 선종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유해는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1777년 메시나 의회는 일 년에 두 번 그녀의 무덤을 방문하기로 결의하였다. 수녀의 무덤에는 지금도 일반인들이 방문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유해가 공개되어 있다. 1782년 로마에서 교황 비오 6세가 그녀를 복자품에 올렸고 1988년 6월 11일 메시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하였다. 교황은 시성식에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성녀 에우스토키아 수녀는 참으로 훌륭한 모범이십니다. …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공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날로 깊어졌고 은총의 놀라운 신비를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한 사랑도 점점 더 자라났습니다. 우리들의 모범이신 성녀에게 봉쇄 수도원은 단순히 세상사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에게 피신하는 장소라는 의미로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성녀 에우스토키아 수녀는 철저한 고행과 극기 생활을 통하여 자신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빠지기 마련인 온갖 유혹과 욕심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기를,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도 일치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몬테베르지네에 있는 수도원의 작은 독방에서 성녀는 자신의 기도와 극기 보속의 행위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바쳤습니다. 그러한 기도와 극기 보속을 통하여 그녀는 자신이 모든 형제자매들 옆에 가까이 있기를 원하였고, 세상의 모든 고통들이 보다 가벼워지고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하느님께서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 ── 修女會 Poor Clare Clarissine, Clarisse라고도 함. 그녀를 추종하는 수녀 집단을 흔히 제2의 프란체스코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수녀원에 은둔하며 기도와 고행에 자신을 바쳤다. 그러나 이 수녀회가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감에 따라, 일부 수녀원에서는 재산 소유와 소득 수입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수녀회의 규칙은 몇 차례 개정되다가 마침내 1263, 1264년 교황 우르바누스 4세가 클라라 수녀회에 대한 규칙을 발표함으로써 재산의 공동 소유와 자치 등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규칙을 채택한 수녀원은 우르바누스 클라라 수녀회 또는 공식적으로 성 클라라 수녀회(Order of St. Clare)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보다 더 엄격한 성 클라라 규칙(1253 개정)을 계속 준수한 수녀원은 원시파 또는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Poor Clares)라고 부르게 되었다. 15세기초 코르비의 성 콜레트(1381~1447)는 프랑스에서 클라라 수녀회 개혁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17개 수녀원에 초기의 수녀원 규칙을 회복시켰고 엄격한 가난의 원칙을 거듭 주장했다. 콜레트의 추종자들을 성 콜레트의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Poor Clares of St. Colette)라고 한다. 1538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조직된 카푸친 수녀회와 1631년에 조직된 알칸타린 수녀회도 엄격한 규칙을 준수하는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이다.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에 소속한 수녀원들은 거의 모든 일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규칙을 실천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이 수녀회는 기도와 고행, 명상 및 육체 노동에 헌신하고 지극히 엄격한 은둔생활과 금식 및 금욕 생활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녀회 가운데 가장 엄격하고 금욕적인 수녀회로 여겨지고 있다.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아빠스 ( 출처 : 천주교 용어자료집) 대수도원장.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회들과 일부 특정 수도회, 대수도원 수장에 대한 칭호이자 직함이다. 동방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영성적 스승을 ‘아빠’(abba)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권한, 직책, 성별에 따라 일반 아빠스, 면속 아빠스, 총 아빠스, 수석 아빠스, 아빠티사(여성, [라] abbatissa, [영] abbess) 등 다르게 부른다. ◆ 아빠스(여) ◆
제주성글라라수도회 홈에서
우리 수도회의 영성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 복음적 교회생활
▒ 복음적 형제애
▒ 복음적 가난 순례자로서 단순과 겸손으로 온전히 주님께 의존하며 기쁜 마음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 작은 자의 생활이다. 즉 모든 것은 은총이며 하느님의 선물임을 의식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가난. 겸손)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성령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된 참된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 안에서 늘 감사하는 참된 의미의 복음적 가난이다.
▒ 복음적 관상생활
▒ 활동분야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성녀 클라라에게 허가한(1228. 9. 17.)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하느님의 종들의 종 그레고리오 주교는 아시시 교구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적 공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애하는 딸들인 그리스도의 시녀들, 클라라와 그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강복을 보내노라. 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세속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였소.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떠한 재산도 결코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2. 이러한 그대들의 결심은 어떠한 물질적 곤란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은 임의 왼손이 머리 받쳐 도와 주실 것이기(참조: 아가 2,6; 8,3) 때문이오. 3.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참조: 마태 6,26) 들의 꽃들을 입히시는(참조: 마태 6,26)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게 보살펴 주실 것이며, 그분을 마주뵈올 영원의 나라에서는 당신 바른손으로 그대들을 안아주시고(참조: 아가 2,6; 8,3), 그분의 식탁에 자리한 그대들 사이를 오가며 손수 시중들어(참조: 루가 12,37) 주시리이다. 4. 이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극히 높은 가난에의 결심을 사도적 호의로 뒷받침하고 보증하며, 어느 누구도 그대들에게 재산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없게 이 문서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로 확인하는 바이오. 5.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인준하고 확인하는 이 기록을 훼손하거나 이에 대해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를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페루지아에서 교황 즉위 제2년 9월 17일 (제주성글라라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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