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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축일 :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San Francesco di Sales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Thorens, Savoia, 21 agosto 1567 - Lione, Francia, 28 dicembre 1622
Patronato: Giornalisti, Autori, Scrittori, Sordomuti
Etimologia: Francesco = libero, dall'antico tedesco
Emblema: Bastone pastorale
St. Franciscus de Sales, E. et D
Saint Francis de Sales 
Also known as : Francis of Sales, Gentle Christ of Geneva, the Gentleman Saint, Franz von Sales
Born : 21 August 1567 at Château de Thorens, Savoy (part of modern France)
Died : 28 December 1622 at Lyon, France of natural causes
buried at the basilica of the Visitation, Annecy, France
his heart was preserved as a relic at Lyon
during the French Revolution his heart was was moved to Venice, Italy
Beatified : 8 January 1662 by Pope Alexander VII
Canonized : 19 April 1665 by Pope Alexander VII


 

 

 

   이 위대한 주교는 토랑에 있는 가족 성(城)인 샤토 드 살에서 태어나 파리의 아네시와 클레르몽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파두아 대학교에서는 법률과 신학을 전공하여, 불과 24세의 약관에 법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가족들의 반대는 물론 이사직의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생활을 위하여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카블레 지방의 선교사로서 5년 동안 활동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군사력으로 가톨릭을 억누르는 사보이 공작의 노력에 피나는 항쟁을 하고 있었다.

   암살자와 칼빈교도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99년, 그는 제네바 주교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 완전히 계승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는 곧 반개혁자의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뛰어난 고해신부이자 설교가이며, 해박한 신학지식과 이해심은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예비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교구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1604년, 그는 프란치스까 드 상탈을 만나 그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녀와 함께 방문회를 세웠다(1610년) 

   그는 프랑스 리용에서 운명하였는데,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1. 신심생활 입문(1609년), 2. 신애론(1616년)이다. 그는 사망한 해에 시복되었는데,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한 첫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고, 1665년에 시성되었다. 또 1877년에는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1923년에는 가톨릭 언론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에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축일: 12월12일(8월1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5월31일

 

 

 

 

 

   프란치스코 드 살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변호사가 되고, 나중에는 프랑스 사부아 지역의 상원 의원이었던 부친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법률을 공부하러 파도바로 갔다.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적당한 시기에 부모에게 사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부친은 완강하게 반대를 했지만, 착한 프란치스코의 꾸준하고 열심한 설득에 결국은 허락하고 말았다. 프란치스코는 사제로 서품되어 얼마 뒤에는 칼뱅교의 중심지였던 스위스 제네바 교구의 사무관으로 선출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칼뱅과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기로 결심하고, 특히 샤빌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진정한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는 자그마한 팜플렛을 만들어 배부하고 설교도 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35세에 제네바의 주교가 된 프란치스코는 교구의 사목 행정을 담당하면서도 설교를 하고 고해성사를 주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의 부드러운 성격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한 숟가락의 꿀은 한 통의 식초보다 더 많은 파리를 끌어들인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널리 알려진 [신심 생활의 입문]과 [신애론] 외에도 수많은 소책자를 쓰고 광범한 분야에 걸쳐서 편지 왕래를 했다. 그의 이러한 문필 생활로 인해 그는 가톨릭 신문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짧고도 바쁜 일생을 보냈지만 ’방문 수녀회’를 창설하는 일에서 또 다른 성녀인 잔 프랑스아 드 샹탈과 협력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이 수녀원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데서 모범을 보인 덕행, 즉 겸손과 신심 그리고 상호 애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여인들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프란치스코 드 살은 우리에게 말한다."그리스도교적 온화함을 지닌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드럽고 사랑스럽다.그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변호해 줄 자세가 되어  그의 착한 마음은 그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태도에서 나타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애덕과 기쁨의 빛을 비추는 관점을 제공한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1567년 사보이아에서 태어났다. 사제로 서품된 후 자기나라에서 가톨릭 교회의 재건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제네바의 주교로 선임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참다운 목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고, 만사에서 모범이 되고 저서로써 모든 이에게 신앙을 가르쳐주었다. 1622년 12월 28일 리옹에서 세상을 떠나, 1623년 1월24일 안네시에 묻혔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주교의 [신심 생활 입문]에서

(Pars, 1, cap. 3)

 

신심 생활은 모든 소명과 직업에 가하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하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또한 그 교회의 생활한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설명하신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들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은 각각 달라야 한다. 

   또 한층 이것을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맞추어야 한다.  필로테아여, 주교가 샤르트르 수도회의 수사처럼 관상적 독수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가정을 가진 자들이 카푸친회수사들처럼 금전을 소홀히 여기거나,

또는 직공이 수도자처럼 종일 성당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든지,  또는 수사가 주교처럼 언제나 타인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닌다면,  이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으며 또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착오는 극히 많다.  따라서 세속은 참된 신심과 그릇된 신심을 구별치 않고 또는 구별하려고도 않으며 신심을 배척하고 이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배척은 위에 말한 그릇된 신심에 한해서만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필로테아여, 진정한 신심은 아무것도 손상치 않고 오히려 만사를 완성시킨다.  자기의 정당한 직무를 거스르는 자의 신심은 확실히 그릇된 신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꿀벌은 꿀을 마실 때 조금도 꽃을 상하지 않게 하며 꽃은 이전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고 한다.  참된 신심은 이보다 더 어떠한 직무나 처지도 손상치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를 아름답게 꾸민다.  보석을 꿀에 담그면 그 성질에 따라 광채를 더한다고 한다. 그와 같이 어떤 사람도 그의 경우를 신심과 합치시켜면 그의 경우는 일층 더 아름다워진다. 가정의 평화는 커지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지며, 임금께 대한 충성은 두터워지고 각자가 맡은 일은 유쾌하고 즐거워진다. 

   신심 생활의 군인들의 병영, 직공들의 공장, 제왕의 궁정, 결혼한 자들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유설이며 이단의 교설이다.  필로테아여, 관상적인 신심이나 수도원식 또는 수도자적 신심이 이런 이에게 전연 맞지 않을 것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위에 말한 세 가지 신심 외에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신심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완덕의 생활을 구할 수 있고 이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톨릭홈에서)

 

 

 

   "거짓 예언자가 여기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여 넘길 것입니다. 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마태 24, 11). 

  주 예수의 이 예언 말씀은 16세기에 놀랄 정도록 맞아 들어갔다. 즉 루터를 위시해 쯔빙글리나 칼빈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각각 이단을 주장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세우므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의 여러 지방의 인심을 현혹케 했다. 

   그러나 자비 깊으신 하느님께서는 가련한 양(羊)인 신자들이 포악한 사람인 이단자들에게 현혹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3인의 유명한 인물을 보내셔서 교회를 개혁케 하셨다. 그들은 즉 독일에 있어서는 성 베드로 가니시오,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 그리고 프랑스에 있어서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이다.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축일: 12월21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 11월4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 5월26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1567년 8월 21일에 토랑에 있는 가족 성(城)인 사토 드 살에서 후작가(候爵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모두 경건하고 독실한 신자였고, 특별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아들의 교육을 세심한 주의로 시행하는 동시에 그 순진한 어린 마음에 신앙과 덕행의 씨를 뿌리며 이를 양성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첫째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파리에 있는 예수회의 대학에 입학하고 오래지 않아 그 지혜와 성실한 점으로 단연 출중한 성적을 올려 교사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신앙 도덕을 위협하는 많은 위험 중에서는 자숙하여 기도와 고행에 힘쓰고 그러한 십자가의 길로써 무사히 백합화와 같은 마음을 끝까지 보존할 수가 있었다. 그가 가장 정덕에 대해 노력한 것은 그때에 비로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어렸을 때 성 마리아 제대 앞에 엎드려 일평생 동정을 지킬 서원을 발한 때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그는 파리에서 파도바 대학으로 가서 신학과 법학 박사의 학위를 획득하고 대 성공리에 졸업했지만, 옛 고향인 사보아에 금의환향(金衣還鄕)하기 전에 먼저 성도(聖都) 로마를 방문하고 세상에서 출세해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사제가 되어 희생의 생활을 하려고 결심했다. 그런 줄도 모르던 아버지는 벌써부터 그를 사보아에서 변호사 개업을 시킬 예정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관계로 아들의 희망을 듣고 나서 즉시 승낙하게 되어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수도 생활을 위해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교황에게 아네시 주교의 참사원(參事員)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제단에서 처음으로 미사 성제를 드린 것은 1593년 12월 초순경이 었다. 그 후 그는 뜨거운 신앙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며 사제로서의 성무를 완전히 이행했고, 아네시 주교는 그의 수완을 인정하여 특히 중대하고 어려운 사명을 그에게 맡기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보아의 남부에서 세력을 부리고 있던 칼빈파 이단에 떨어진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개종시키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지만 일단 착수해보니 그 사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교회의 이단자들에게 쫓겨 깊은 산으로 피신한 때도 있었고, 초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일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위험하게도 생명을 빼앗길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성인은 영웅적인 인내와 온순과 겸손으로 취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사업을 시작한 지 8년 후 비로소 크리스마스 밤 미사를 이단의 중심지에서 봉헌하고 8백 명의 개종자에게 성체를 영해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칼빈파의 지반은 점차 붕괴하여 연거푸 개종자들이 증가해, 1597년에는 프란치스코의 노력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7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참으로 사보아의 남부에 있던 칼빈파의 이단이 전멸된 것은 오로지 성인의 감탄할 만한 기도와 희생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네시 주교는 자기의 후계자로서는 이 젊은 사도 프란치스코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교황에게 추천했으므로, 그는 1599년에는 제네바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는 완전히 계승하여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올랐어도 항상 겸손하며 자기가 맡은 영혼을 돌보는데도 각별한 열의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우선 그는 자기 교구에 있어서 성직 지원자의 전형(銓衡)을 엄격히 하고, 참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을 뽑고, 모든 이에게 모범을 보이는 완덕의 생활과 그의 스승다운 깊은 학문 등을 그들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은 주교직에 있으면서도 주일에는 신자들에게 도리를 설명해 주고 성사를 주는 등 보농 사제들과 같이 영혼의 지도에 노력햇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사도적 활동이 세상에 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유명한 명성은 프랑스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국왕은 파리나 리용의 대도시에 아직 남아있는 칼빈파 이단을 전멸하기 위해 프란치스코를 초빙했다. 그래서 그는 그 도시에서 강론과 기타 모든 방법으로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덕이 높고 학식이 많은 성인에게 영적 지도를 청하는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여서 그들에게 일일이 대답해 주기에는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지만, 끝까지 친절하고 온순한 주교는 서간으로써 각자에게 적당한 권고와 교훈을 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들의 희망을 채워주려고 했다. 또 그의 유명한 저작 필로테아라는 신심생활의 입문서도 그의 지도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청으로 저술한 것이다.

 

 

 

   성인의 개인적 지도로 가장 훌륭하게 된 이는 한 수녀원을 창설한 샹탈의 백작(伯爵)부인 성녀 프란치스카였다.

성인은 1604년 사순절의 강론때에 처음 프란치스카를 만나 즉시 그녀가 하느님께 간선된 부인이라 이미 1610년 6월 6일 두 동료와 같이 하느님의 전선을 찬미하여 유화(柔和), 소박(素朴), 자비(慈悲)의 정신을 세상 사람에게 알려주는 새 수도회(방문회)를 세웠다. 

   그 이상(理想)에 대해서 성 주교 자신의 얼마나 열렬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가는 그가 프란치스카에게 말한 다음의 말로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는 언제 참된 사랑과 온순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까? 나는 온전히 자기를 끊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모든 사람들의 희망대로 하고 그를 위해 진력하고 싶다!" 이와 같이 사랑이 대단하고 친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만큼 아무리 완고한 이단자라 해도 그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전후 20년간 주교직에 있으면서 모든 이에게 성덕의 감화를 주며 제네바에 있는 600여개의 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심을 북돋아 주고 교리를 모르면 그들에게 잘 깨닫게 해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중부 프랑스, 동부 프랑스의 사람들도 이 성스러운 주교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인을 초대하고 교훈을 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성무와 영혼의 지도에 진력한 결과, 과로하게 되어 아직 노년이라 할 수 없는 55세 때인 1622년 12월 28일, 리용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모인 사람들이 병자를 위한 기도문을 외울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신심 생활 입문(1609년)과 ’신애론(1616년)이다. 그는 사망한 해에 시복되었는데,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한 첫 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고, 1655년에 시성되었다.또 1877년에는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1923년에는 가톨릭 언론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청소년들의 스승이요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요한 보스코(St. John Bosco, 1815~1888) 에 의해 1854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창립된 살레시오 수도회는 청소년 교육을 주목적으로 한다.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성인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사도적 사명감과 고귀한 정신에 감명되어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로 하였다고 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 사제 축일:1월31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또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프란체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1567년 8월 21일 이탈리아의 독립 공국인 사보이아(Savoia)의 토렌스(Thorens)에 있는 가문의 성(城)인 샤토 드 살(Chateau de Sales)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Paris) 인근 안시(Annecy) 대학과 클레르몽(Clermont)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이탈리아 파도바(Padova) 대학교에서는 교회법과 일반법을 전공하여 불과 24세의 약관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가족들의 반대는 물론 법률가 자격 제의와 상원 의원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생활을 위하여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 12월 18일 안시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1594년 샤블레(Chablais) 지방의 선교사를 자원하여 5년 동안 활동하였는데, 그곳은 칼뱅주의자들이 약 50년간 가톨릭 신앙을 금지하고 프로테스탄트를 강요하던 지역으로 사보이아 공국이 되찾은 지 얼마 안 되는 선교 지역이었다. 암살자와 칼뱅교도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99년 5월 22일 그는 스위스 제네바 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 선임 교구장이 사망하자 그를 계승하여 교구장 주교가 되었다.
   그는 곧 종교개혁자에 대항하는 지도자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뛰어난 고해신부이자 설교가인 그는 해박한 신학지식과 이해심으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예비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교구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1604년 그는 부르고뉴(Bourgogne)의 수도인 디종(Dijon)에서 유명한 강연을 하였는데, 그때 네 명의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남작 미망인인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oanna Francisca de Chantal, 8월 12일)을 처음 만나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적인 우정으로 자라났다. 그 후 1607년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 함께 기존 수도회의 육체적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운 젊은 여성들이나 미망인들을 위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리옹(Lyon)에 있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원의 작은 방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뇌일혈을 일으켜 병자성사와 고해성사를 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예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라고 기도한 후 그 다음날인 1622년 12월 28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신심생활 입문”(1609년)과 “신애론”(1616년)을 들 수 있다. 그는 1662년 1월 8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되었는데, 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한 첫 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는 1665년 11월 19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고, 1877년 11월 16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으며, 1923년에는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작가와 언론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가톨릭홈에서)


 

... He was not a Franciscan Tertiary, but a member of the Third Order of the Minims, founded by St. Francis de Paul. However, he accepted affiliation to the First Order of St. Francis from the Capuchins in 1617; and his spirit undoubtedly has a close kinship with that of the Seraphic Saint. He once told the Capuchins that he belonged to the Franciscan Order by special ties; and in 1609, the holy bishop, girded with the cord, preached a beautiful sermon and took part in the traditional procession of the Archconfraternity. The Portiuncula Chapel at Assisi was especially dear to him because of the great spiritual favours he received there. At Evian, on the south shore of Lake Geneva, St. Francis of Assisi appeared to him and said: “You desire martyrdom, just as I once longed for it. But, like me, you will not obtain it. You will have to become an instrument of your own martyrdom.”  ....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1)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근대의 성인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 또는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영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 중의 한 분으로 일컬어지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독창적 방식으로 교회의 정통적 영성을 가르치고 생활하며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성(聖性)에의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다. 성인(聖人)으로 불린 이는 일부 소수의 특전 받은 사람이 아니고 주어진 각 생활 상태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중요한 교의는 그 후 약 400년 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밝히고 공식으로 천명하게 되는 진리('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39~42항 참조)이다. 먼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탈리아의 국경에 접해있는 프랑스 동남쪽 사보아 지방에서 1567년 8월 21일에 명문가 드 살르(de Sales) 후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경건한 신앙인들이었는데 특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모친은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인성 및 신앙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데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프란치스코는 지방의 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후 빠리에 유학하여 예수회가 운영하는 끌레르몽 대학에서 6년 동안 수사학, 철학 및 신학 등을 공부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신앙의 일대 위기를 겪게 된다. 그것은 그가 당시 파급되어 있던 칼뱅의 운명 예정설에 사로잡혀 자신이 혹시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예정된 것이 아닐까 심히 번민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체험이다. 그 때 그는 하느님을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상상에 빠져 들어가면서 크게 고뇌했던 것이다. 그는 이 고통스런 상상을 떨쳐버리려고 애썼으나 벗어나기 어려웠고 점점 더 깊이 우울한 환상에 사로잡혀 나중엔 온갖 신심이 한낱 기만으로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성모님 상 앞에 꿇어 기도하던 중 종신토록 정결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겠다는 서약을 했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마음의 폭풍우가 홀연히 진정되고 감미로운 평화로 가득 채워지게 됨을 느꼈다. 이러한 어둔 밤의 체험은 훗날 그가 사목 활동 중 어두움 속에 헤매면서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며 도와주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빠리에서 공부를 마친 후 그는 부친의 원의에 따라 유명한 법학부를 갖추고 있던 이탈리아의 빠도바 대학으로 옮겨가 법률 공부를 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법 뿐 아니라 또한 신학 공부에도 계속 열중하였다. 신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학문의 불충분함과 허전함을 보충하고 보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이 끌리던 사제 생활에 대한 성소를 그 때에 더욱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1592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샨 베리 시(市)의 원로원의 법률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부친의 주선으로 그는 원로원 의원직 취임 교섭까지 받았으나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가 걸어야 할 길과 수행해야 할 사명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자신의 소망을 채워주지 않아 실망스러워 하던 부친에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차분히 설명하면서 허락해 주길 간곡히 청하여 결국 부친을 설득하였고 이로써 그에게 사제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1593년 12월에 프란치스코는 사제 성품을 받고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봉사하였다. 교구의 장상이 샤블레의 칼뱅파 교도들을 다시 성교회로 귀의시키기 위해 선교활동 할 사제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그 사명을 수행하겠다고 자원하여 나섰다. 그는 많은 위험과 곤경 중에도 굴복하지 않고 칼뱅주의자들의 귀의를 위해 온갖 정성과 방법들(동기는 선의였으나 비판받을만한 방법들도 활용했음을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임)을 동원하여 투신하였으며 결국 7만이 넘는 사람들을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1602년에 즈네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구장으로서 그리고 사목자로서 교구쇄신을 위한 폐습의 교정과 조직 개편, 신자들의 신앙교육을 위한 여건 조성과 장려, 쇄신적 사제양성을 위한 배려, 수도생활 쇄신을 위한 독려, 영적 서적들의 저술, 영적 지도 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교구 내 산재해 있는 벽촌들을 끊임없이 순회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하며 고해성사 집전과 교리교육 등 헌신적인 사목 봉사를 하였다. 그는 또한 자주 사제들을 두루 방문하여 그들과 친교를 이루고 그들이 사도직에 더욱 충실하며 기쁨에 충만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단으로 황폐해졌던 그의 교구가 얼마 후엔 프랑스에서 가장 열심하고 모범적인 교구가 되었다.
 
1607년엔 성녀 요한나 샹딸과 함께 성모 방문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그 수도회는 봉쇄 공동체였는데, 심한 육체적 고행을 회칙으로 명하던 종전의 수도회들과 달리, 신체적으로 연약한 여인들도 입회할 수 있도록 수덕 행위를 덜 엄격하게 조절 완화하였다. 완덕에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은 육체적 고행보다 정신적 희생 즉 자신의 뜻을 떠나며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르고 일치하는 것이라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견해를 따랐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주교는 1618년 11월부터 다음 해 9월까지 빠리에 용무가 있어 머물게 되었는데 시민들은 이 유명한 대 강론가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매일 성당에 운집하였고 그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면서,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빠리에 상주하기를 간청하였다. 그가 그 곳에 머무는 동안 가장 큰 기쁨이 되었던 것은 자선사업의 사도이며 프랑스 성직자들의 쇄신 활동가로 유명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와 친교를 맺은 것이다. 그는 빠리 시에 있는 성모 방문회 수도원의 영적 지도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에게 부탁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영성은 그의 저작 총 27권 안에 풍성히 담겨있으나 특히 신심생활 입문과 신애론(神愛論) 그리고 영적 담화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작품 중 12권에는 영적 지도를 위해 그가 썼던 2100여 통의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과학, 예술 및 프랑스어의 연구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안느시에 플로리몬타느 아카데미를 세웠는데 그것은 프랑스 아카데미가 태어나기 30년 전 일이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1622년 겨울에 리옹 시에 있는 성모 방문회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는데 갑자기 뇌일혈로 인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때가 그의 나이 56세이던 1622년 12월 27일이었다. 그의 유해는 안느시의 성모 방문회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1665년에 교황 알렉산더 7세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시성을 통하여 성인품에 올렸으며, 1877년에 교황 비오 9세는 그를 좥교회의 박사좦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비오 11세는 그의 문학적 능력과 공헌을 높이 기리며 그를 언론인과 저술가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6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2)


2. 영성사 안에서의 역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혼자서 하나의 영성학파를 형성하여 교회의 유익에 기여함으로써 영성사 안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고 있다. 학자들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프랑스의 르네상스로 하여금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화 하도록 하였고, 인문주의가 경건하게 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는 또한 르네상스와 근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완덕, 성성, 수덕 및 신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방향 제시 등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영향을 미친 이들 중의 하나이다.
 

1)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신심의 보편성과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은 참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약 4세기 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하게 될 성성에의 보편성과 성화 및 영성의 다양성 교의를 앞서 밝힌 것이다. 그는 수도자 뿐 아니라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계층의 평신도들이 자신의 신분과 직업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완덕에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며 수덕과 성화의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였다.
 

2)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평신도의 영성에 관해 가르치고 글을 쓰게 된 최초의 영성 작가이다. 그 때까지 영성은 관상 수도자적 완덕의 삶으로 제한, 이해되고 있었기에 세상에 사는 평신도들에게는 요원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에 관한 저술가들은 속세와 관계를 끊은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썼으며 또한 영성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속세와 관계를 끊는 수덕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세상에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고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지내면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영적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여러 세기 동안 제한적으로 이해되고 제약되어 온 수도생활적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망을 갖도록 하였다.
 

3)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쓴 「신심생활 입문」은 이미 2세기 앞서 쓰인 「준주 성범」과 함께 교회 안에서 필독서로 추천되고 아장 많이 애독되어 온 영성생활 지침서이다.

1619년 「신심생활 입문」의 완성판이 출간되자 불어권 지역에 금방 널리 보급되었고, 그의 생애 중 40판 이상 인쇄되었다. 이책은 당시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신자들 뿐 아니라 대다수의 성직자, 수도자들한테 높이 평가되었다. 프란치스코 주교를 늘 존경하던 왕 앙리 4세는 이 책이 자신의 기대를 훨씬 초월한 걸작이라고 격찬하였으며 왕후는 이 책 한 권을 금강석으로 장식하여 영국 왕에게 보냈다. 그 책은 곧 18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빨리 전파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대변천에 상관없이 모든 계층의 신자들로부터 고전적 신심서로 읽히며 사랑받고 있다.

「준주 성범」이 수도자적 완덕의 길을 위한 지침서라면, 「신심생활 입문」은 평신도 를 위한 영성생활의 안내서이다. 「준주 성범」이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적지 않은 유익을 주는 고전적 교과서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고독과 침묵 중에 복음 권고 덕의 서원을 지키며 완덕의 길을 걷는 수도자의 규범서라고 한다면, 한편 「신심생활 입문」은 수도자들을 위해 유익한 영적 입문서가 될 수 있지만 그보다 세상 안에 살고 일하며 봉사하는 평신도들에게 참신한 영성을 제시하는 교본인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문장은 이해하기 쉽고 흥미를 끌면서도 세련미를 갖추고 있고, 그의 영적 가르침은 온전하고 중용적이다.
 

4)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회원들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에 영성실천에 있어서는 다분히 이냐시오적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무엇보다 성서와 성전 그리고 교부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그는 세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 필립보 네리의 작품들에 정통했고, 수덕 신비 신학 분야에서는 스페인학파의 저자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요한, 그라나다의 루도비꼬 등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사망 근 두 세기 후인 1859년 성 요한 보스코는 수도회를 창설하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라 부르며 그를 수호 성인으로 모셨다. 요한 보스코는 수호 성인의 영성 뿐 아니라 저서들을 통해 그분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를 수도회원들의 모범과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5)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가톨릭 신앙생활에서 감정을 다시 일깨움으로써 지성에 치우쳐 신심행위가 타성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을 반성하고 좀더 따뜻한 정감을 되찾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인간을 하느님과 비슷하게 해주는 이성(異性)을 하느님의 귀한 선물로 여겼지만, 신심이란 정적 생활에 근거를 두는 것이기에 신심 생활을 위해서 정적 측면을 소중히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을 장려하게 되었으며 차차 교회 안에 예수 성심 공경이 파급되어 갔다.

그가 설립한 성모 방문 수도회에서 예수 성심 신심의 사도 성녀 마리아 알라꼬끄(1647~1690)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6)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경건한 인문주의 사상을 통해 17세기 프랑스 교회와 그 주변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었다.

그가 살던 시기의 사회는 그리스도교 정신이 희석되어 가는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거기엔 인문주의가 한 몫을 하였다. 자연과 학자들의 운동으로서 인문주의 뿐 아니라 진리의 미적 표현을 추구하는 교양 운동으로 이해되는 인문주의 방향도 그리스도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고 하였다. 인문주의는 인간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었으며, 결국 그리스도교 정신의 감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와 인문주의의 분리는 어느편을 위해서도 유익한 결가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가 인간성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경우 영성생활에도 중요부분을 잃게 되며, 한편 인문주의가 그리스도교 정신을 포기할 경우 그 기반과 전통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이러한 문제점을 명확하게 인식한 인물이 프란치스코였다. 그는 두 가지가 내적으로 상반된다고 믿지 않았다. 여러가지 대립을 화해시키는데 특별한 소질이 있던 그는 조화적인 성품으로 두 운동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자연과 초자연을 화해시키며 속된 영역과 거룩한 것에의 노력을 통일시키려는 그의 새로운 신심 이상은 바로 인문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융합에 있었다. 그것은 「경건한 인문주의」또는 「그리스도적 인문주의」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인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신앙적 기반 위에 선 인문주의인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하늘에서 내려옴에 여러 형태와 인간성의 완성을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경건한 인문주의적 신심운동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실재에 대하여 과도한 엄격함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엄격함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영적발전을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문주의를 신심행위에 유용하고자 노력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페츠라르카, 에라스무스 등이 이미 형성한 전통의 계보에 속한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13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3)


3. 인성 · 영성 및 사목적 성숙과정

「온유함의 성인」혹은 「신사 성인」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평온과 온유는 본해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온화함과 밝은 마음 그리고 친절이 일상적 행동 양식이 되기까지엔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고의 수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는 내 과격한 성격을 극복하는 데 20년이나 걸렸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인성, 영성 및 사목적 성숙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 제1단계

젊은 사제 프란치스코는 샤블레 지방의 칼뱅주의자들을 개종시키는 임무를 자원해 맡으며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치 서적 외판원처럼 집집마다 돌면서 문틈으로 자신이 쓴 전도지를 밀어 넣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강론하는 등 2년간 열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결실은 겨우 열 아홉명이 개종자였다. 그는 시몬처럼 이렇게 푸념할 수 밖에 없었다.

『주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루가 5,5)
 

▲ 제2단계

결실이 미흡하자 그는 선교방법을 바꿨다. 공권력을 선교에 이용하여 억지로라도 데려오는 방법(루가 14,23 참조)을 택하고자 한 것이다. 사보아의 공작이 자신의 속령인 샤블레 지방에서 공권력 행사에 동의하였다. 군주로서 그는 칼뱅파의 설교자들을 추방하고 신도들을 공직 채용에서 제외시켰으며 그들의 성서를 압수했다. 프란치스코를 대동하고 공작은 주민들을 광장에 집합시켜 칼뱅파의 신앙을 고수할 사람은 그 지역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강압적 방법은 샤블레 지역의 사람들 2000여명은 다시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다.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선의에서 행한 것이라 변호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역사적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 큰 피해를 주며 안타깝게도 구원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있다고 믿었던 프란치스코에게 혈기 왕성한 정의감은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는 아직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수적으로 볼때 성공적이었을지 모르나 방법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시몬과 함께 이렇게 고백해야 할 입장이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가 5,8)

프란치스코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끈 매력적 온유함과 설득력을 갖추기까지엔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길고 엄한 자기 수련의 인고의 과정이 요청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생애 중 가톨릭 교회를 떠났던 칼뱅주의자들 7만 여명을 귀의시킨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여기엔 영욕(榮辱)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 제3단계

그는 천부적으로 사람 낚는 어부였다. 사도적 열성이 그를 사로잡아 그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주교로 축성된 후 사도적 방향을 바꾸었다. 이교도들은 개종시키는 선교보다 우선 교회 안에서 확신을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목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그 목표는 냉담한 신자들의 무관심을 일깨우고 해이해진 신자들에게 신앙을 견고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신앙을 선포하는 기존 방법을 바꿔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 따라서 무엇보다 교리 교수법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신심의 다양성과 수덕의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면서 모든 신분과 직업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완덕에 나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렇나 그의 가르침을 참신한 방법으로 서술한 「신심생활 입문」은 프랑스 뿐 아니라 주변 여러 나아에 선풍을 일으켰다.
 

▲ 제4단계

프란치스코는 인격적, 영적 발전에 큰 영향을 받은 한 사건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녀 요한나 샹딸과의 우정관계였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녀의 우정 관계는 성인들 사이에서 가끔 있어온 일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요한나 샹딸의 우정은 성인들의 세계에 있어서도 매우 새로운 사건이어서 어떤 범주에 분류해야 할 지 당혹스럽다. 이 두 성인을 서로 연결한 독특한 체험은 프란치스코 뿐 아니라 요한나 역시 비상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디죵 시 부르궁디 의회 의장의 딸이었으며 샹딸 남작의 미망인이던 요한나는 1604년 32세 때 마침 디죵 시 친정에 머물러 있던 동안 그 곳에 사순절 강론을 하러 온 프란치스코 주교를 처름 만났다.

이 때부터 두 성인 사이에는 세상에서 드문 우정이 맺어졌다. 두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그들의 관계가 용납될 수 있는지 대답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식별하느라 분투하였으며 결국 하느님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믿었다. 요한나는 총 고해를 한 후 프란치스코의 모든 지시에 순종하기로 서원했다. 한편 프란치스코는 항상 그녀를 사랑 안에서 인도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의 영혼이 그녀에게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승인하였다. 이것은 오늘 가톨릭 교회에서 생각할 수 없는 영적 결혼으로서 바로크 시대에나 주교가 체험할 수 있었음직한 것이다.

두 성인의 우정 관계는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공동 작업 안에서 연결되어 구체화된다. 그것은 처녀들과 미망인들을 위한 「성모 방문회」의 창립을 위한 협동 작업이었다.

그들 간의 영적 우정의 순화는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등 스페인의 신비주의자들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들이 쓴 책에서 하느님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프란치스코는 점점 매력을 더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요한나에게 그들의 정다운 영혼의 일치에서 벗어나기를 요구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큰 시련을 겪으며 그것을 극복해야 했다. 『하느님이 우리 사이에 맺어주신 우정이나 영적 결합에 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라는 프란치스코의 편지를 받은 요한나는 그것을 십자가로 받아들였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묵묵히 그리고 충실하게 그와 함께 일하였다.
그들의 우정을 자신들의 개인적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상호의 인간적, 영적 성숙과 사도직 사명 수행을 위해 유익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우정을 영원에 이르는 다리로 체험했으며 우정의 도움으로 그는 더욱 긴밀히 하느님께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제5단계

성 프란치스코는 특출한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우선 인간의 심성을 읽는 직관력과 영의 움직임에 대한 식별력, 지성 그리고 설득력 있는 말씀의 은사 등을 타고났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인내, 온유함의 자세를 키웠으며 끊임없이 공부했고 많은 것을 체험했다. 그는 신심(영성)의 다양성, 성성의 본질과 단계, 성화의 방법 등에 대한 지식과 교회의 정통한 가르침에 입각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당시의 사람들의 사고에 가까이 접근시키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 적격의 인물이었다. 그는 영적 지도자에게 모범적 삶이 무엇보다 더욱 값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고 있었다.

실로 프란치스코는 근대적 영적 지도자의 사부라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이에게 언제나 온유하고 친절한 자세로 도왔으며 강론과 저서 그리고 편지들을 통해 직접, 간접적으로 영적 지도 봉사를 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20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4)


영적 가르침

교황 바오로 6세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탄생 400주년을 맞아 사도적 서한(1967.1.29)을 썼다. 교황은 이 서한에서 성인이 이룬 은총의 결실들을 장엄하게 회상하며 기리고 있다.

『예지에 밝고 통찰력을 가진 시각, 건실하고 명석한 이성, 날카로운 판단력,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한 친절과 호의, 말과 표현에 있어 부드럽고 친절한 우아함, 항상 활동하는 정신의 조용한 정열. 차분하고 조용한 평온. 힘과 분리되지 않은 온건, 정신의 높은 앙양과 다른 사람드에게 가장 좋은 재산, 하늘과 시를 주기를 희망하는 아름다움의 예찬, 다른 모든 덕행을 초월하는 거의 무제한적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모습을 묘사하는 특징들입니다』

그과 같이 인간적, 지성적, 영적으로 성숙해 풍요로움을 지녔던 성 프란치스코의 중요한 가르침 중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애덕

프란치스코가 영성신학에 기여한 큰 공헌의 하나는 애덕의 유대 안에 모든 그리스도교 윤리와 성성을 통일시킨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완덕 혹은 진정한 신심의 본질이 특별한 수덕 실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진리를 강조하였다. 그것을 이미 교의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의 다른 신학자들이 언급하엿지만 그 때까지 프란치스코 만큼 큰 열정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고자 한 사목자나 신학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에 의하면, 애덕이 모든 덕들 중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가 다른 모든 덕에 능동적이고 현실적인 효력과 조화를 주기 때문이다. 실로 덕은 사랑의 질서인 것이다. 애덕을 통해 인간은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절정에까지 오를 수 있게 되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

완덕에 이르는 최고의 길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받는다. 한편 가장 중요한 것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사랑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따라서 이웃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2) 온유의 덕

프란치스코가 가르치고 실천한 덕들 중에서 애덕 다음으로 탁월한 것은 온유의 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 마디로 남겨 주신 중요한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 그것을 하루에 백 번이라도 반복해야 합니다.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본받으시오」이것이 모두입니다. 이웃에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며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에 의하면, 온유함이란 그리스도 정신의 구현이며 그 온유함에는 한계가 없다. 오랜 내적 투쟁을 통해 얻은 승화된 온유함은 그의성성의 한 표현이었다. 그는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니』(마태 5,5)라는 주님의 말씀을 눈에 보이도록 구체적으로 생활한 증인이다.
 

(3) 신심 혹은 경건한 생활

프란치스코는 참된 신심이란 어떤 비상한 은총이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많은 이들이 덕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잇으나 그것들은 전혀 덕이 아니다. 나는 탈혼, 황홀경, 무감각, 무감정, 신적 일치, 고양, 변형 등 영혼을 순수한 지성적 관상에로 들어올리고 근원적으로 정신을 응용하며 탁월한 생활을 하도록 해준다는 모종의 책에서 논하는 바 유사한 다른 완덕을 언급하려 한다. 이러한 것들은 덕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덕을 위해 또는 미래의 삶을 즐거움을 맛보이는 작은 표본으로 내리시는 보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은총을 받기를 열망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유일한 목표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작품집 Ⅲ, 131). 그리고 참된 신심이 어떤 특수한 영성 훈련이나 수덕에 있는 것도 아님을 역설한다.

『어떤 이들은 준엄한 생활을 덕으로 여기고 또 어떤 이들은 절식을, 어떤 이들은 자선을. 또 어떤 이들은 구송 기도나 묵상 기도를 덕행이라고 생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어떤 수동적이고 탁월한 관상 기도에 덕을 두기도 하며, 무상으로 받은 특은들에 두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결과를 원인으로, 개울을 샘으로, 가지를 뿌리로, 부속물을 주물로, 흔히는 그림자를 실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나로서는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했다. 이것이 없는 다른 모든 완덕은 거짓 완덕이다』

그에게 그리스도교적 완덕과 동일한 참된 신심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애덕에 관한 이중적 계명(마태 22,34~40)의 실천인 것이다.

『참되고 살아있는 신심은 반드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실로 하느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일 뿐 결코 다른 어떤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신적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한 그것은 은총이라 불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된다. 신적 사랑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힘을 주는 한 그것은 애덕이라 불린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할 뿐 아니라 조심스럽게, 빈번히 그리고 신속하게 행하게 한다면, 바로 그것은 신심이라 불린다』(작품집, Ⅲ, 14)

 

(4) 신심의 다양성

프란치스코는 뒷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언급하게 될 「성성」을 「신심」으로, 영성의 다양성을 신심의 특성으로 표현한다.

신심의 다양성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당시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비판받고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그는 사람이 완덕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니 하느님께 가는 길도 여러가지라고 하였다. 그는 「신심생활 입문」에서 이렇게 신심(영성)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하셨다. 이와같이 하느님은 또한 교회의 생활한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각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명하신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 등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을 각각 달리 해야 한다』(신심생활 입문, Ⅰ,3).

그는 진정한 신심 수련이 모든 이에게 필요하고 모든 처지에서 가능하지만 그것은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상태, 신분, 직업에 따라 다르게 배려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한 사람에게 적합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세상을 떠나 수덕하는 소수인들의 특권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달성해야 할 목표임을 강조했다. 『신샘생활이 군인들의 병사, 직공들의 공장, 제왕의 궁정, 결혼한 이들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며 이단 교설이다. 관상적, 수도자적 신심이 이런 이에게 맞지 않는 것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신심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신심생활 입문, Ⅰ,3)

성화와 완덕이 수도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생활 조건이든지 세상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그의 가르침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