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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축일:2월22일(5월16일)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회개자
Santa Margherita da Cortona Religiosa,OFS
Laviano, Perugia, 1247 – Cortona, Arezzo, 22 febbraio 1297
Patronato: Prostitute pentite
Etimologia: Margherita = perla, dal greco e latino
Saint Margaret of Cortona
Born : 1247 at Loviano, Tuscany, Italy
Died : 22 February 1297 at Cortona,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 1515 by Pope Leo X
Canonized : 16 May 1728 by Pope Benedict XIII 

 

 

 

작은 형제회의 막달레나라고 불리는 마르가리따(1247 - 1297)는 꼬르도나 근처의 라비아노에서 출생하였다.

7 세가 되던해 신심 깊은 어머니를 여의게 되는 데 이 때부터 그녀의 시련은 시작되었디.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돌보는 데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고 새로 들어온 계모는 무정하게도 거칠게 대하였다.

견디다 못한 마르가리따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가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바로 그녀의 유혹이었다.

그리하여 9 년동안 부유한 귀족의 정부 노릇을 하며 공적인 죄의 생활을 한다.


 

어느 날 그의 정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의 개가 와서

그녀의 치마자락을 끌며 숲속으로 인도했는데 거기에는 피투성이가 된 정부가 쓰러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스스로 반문했다.

 

"지금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즉시 자신의 생활을 청산하고 공적 회개와 겸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계모는 그녀를 받아 들이지 않았지만

작은 형제들의 지도 아래 회개 생활을 계속할 결심을 고수하였다.
 

 
 

3 년 동안 시련기를 마친 후 3회 착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초인적인 엄격한 보속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지상적 유혹을 극복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관상과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셨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에 그녀의 중재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녀의 시체는 썩지 않고 지금까지 꼬르도나에 보존되어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작은형제회의 막달레나라고 불려지는 코르도나의 성녀 마르가리따 성당

Santa Margherita da Cortona Religiosa


 

 

 

...때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그녀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 분의 입술은 성스러우면서도 인간다웠다. 어느날 아침 그녀는 탄식하며 울다가 시공을 초월하는 탈혼상태에서 자신을 잊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십자가 상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가난한 자여, 무엇을 원하느냐?"  마르가리타는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즉시 대답하였다. "당신은 나의 주님, 저는 단지 당신을 원합니다." 마르가리타는 부활하기 위해 투쟁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나의 가난한 자여!" 하고 부르셨다. 그녀는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여 더욱 더 강렬하게 정화를 위한 열정을 불태웠다.....

 

...마르가리타는 맨발로 8일 동안이나 지운타 신부를 찾아와 자신을 비난하는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총 고해성사를 하였다. 진정으로 과거의 모든 찌꺼기가 태워지길 원했다. 마치 세례를 준비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순결함으로 돌아가길 원하였다.

그런 후에 경건하게 성체를 받아모셨다. 마르가리타는 이때 예수님의 형언할 수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고 그녀의 고해 신부는 말하고 있다. "나의 딸아!" 그녀는 이 말씀을 듣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황홀경에 빠졌다.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자가 아니라 '나의 딸' 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소망했던 순간이었던가! 얼마나 열망했던 사랑의 확인인가!....

- 코르도나의 성녀 마르가리타(사무엘레 두란티 지음, 프란치스코출판사 2005년)에서

 

 

 

그녀는 투스카니의 라비아노에 살던 어느 농부의 딸인데,

 7세 때에 훌륭한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갖은 학대를 받았으며,

진정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채로 성장하였다. 외모가 뛰어나게 예뻤을 뿐만 아니라,

다소 관능적이었던 그녀는 집을 뛰쳐나와 몬떼풀치아아노에서 온 어느 기사와 눈이 맞았다.

 

그는 그녀와 결혼을 약속하고는 9년 동안이나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녀는 그 후 마치 죄녀의 대명사처럼 불렸고, 천시를 당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개 한 마리가 자기 옷을 물고 잡아당기므로

어느 밤나무 밑에 가보았더니 무참하게 살해된 자기 애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처참한 모습을 보자마자 하느님의 심판을 절실히 깨닫고,

몬떼풀치아노를 떠나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안고, 고행 복장을 한 채로 아버지께 돌아갔지만, 계모에게 쫓겨났다.

이제는 거의 실망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문득 프란치스꼬회원에게 도움을 청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리하여 그 수도원을 찾아 헤메었으나 찾지 못하던 중에, 어느 두 부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가 재속 3회원이 되고자 하였으나 죄녀라는 이유를 들어 허락받지 못하다가,

3년 후인 1227년에 입회가 허락되어 철저한 보속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탄이 그녀의 통회를 방해하니,

지난 날의 욕정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기도와 고행의 무가치함을 보여주며 실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따뜻이 안아 주시니, 관상의 은혜와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은총을 주셨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통회생활을 시작한 지 23년 되던 해인 1297년 2월 22일에 50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녀는 "프란치스꼬회의 성녀 막달레나"로 불린다.

그녀의 시체는 꼬르또나의 성 프란치스꼬 성당에 안장되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유해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7월22일

 

 

 

어느 날 예수 그리스께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사이에게 초대를 받아 만찬을 같이 한 때의 일이다.

한창 연회가 베풀어졌을 때 더러운 죄인으로 세상 사람에게 배척을 받고 있는 한 여인이 들어와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발에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것을 본 주인은 상을 찌푸리면서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저런 여인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는가 하고

이상히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본 예수께서는

"이 여인은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부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하고 여인을 변호했다.

 

이것은 성서에 있는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지금 말하려고 하는 마르가리타도 처음에는 윤락(淪落)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뜻밖에 은총의 빛을 받고서 하느님을 많이 사랑하고 많은 죄의 용서를 받고,

여러 가지 고행으로 전죄를 보속하고 덕행을 많이 닦아 새롭게 된 성녀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코르토나의 근처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가난했지만 선량한 백성이었으며 마르가리타는 시골 처녀로서는 볼 수 없게 영리했다.

그녀의 별과 같은 눈동자, 꽃과 같은 얼굴은 일찍부터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불행하게도 친어머니는 그가 아직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아버지는 즉시 후처를 얻게 되었는데,

그녀는 성질이 나쁜 여자였으므로 마르가리타는 매사에 계모(繼母)의 학대에 못 이겨

17세 때 집을 나와 몬테브르자노 성(城)에 하녀로 들어갔다.

 

성주(城主)인 공작(公爵)은 향락을 즐기는 남자였으므로 미모의 마르가리타를

여러 가지 감언으로 꾀어 마침내 그녀를 자기의 처로 삼았다.

이와 같이 마르가리타는 야비한 애욕에 양심도 마비된 것과 같이 9년간이나 이런 부당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자녀까지 낳았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돌연 번개와 같은 은총의 빛으로 죄악의 암흑에서 헤메는 그녀의 영혼을 각성시켰다.

그것은 주인인 공작이 어느 날 갑자기 암살된 사건이었다.

그의 시체는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풀속에 숨겨져 있었는데

마르가리타의 마음은 형용키 어려운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이 때 처음으로 현세의 허무함을 확실히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의 영혼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같은 생각을 할수록 그녀의 가슴에는 과거에 범한 많은 죄가 솟아올라

자기 영혼의 캄캄한 장래에 대해서 무서움에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사건을 기회로 흙구덩이와 같은 생활에서 발을 씻고

아무리 어렵더라고 바른 길로 돌아가서 지금까지의 죄의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굳을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그 날 밤 즉시 자녀를 데리고 성을 떠나 밤새도록 걸어서 이튿날 아침 아버지의 집에 당도했다.

그러나 전부터 그녀를 미워하고 있던 계모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음탕녀로 멸시받고 있는 그녀를

얌전하게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그리하여 마르가리타는 그곳에도 있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집에서 나왔지만

몸도 의지할 곳 없는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양친에게도 버림받은 신세인데

세속의 뭇 남자들을 상대하며 짧은 인생을 향락으로 재미있게 지내 버릴까?"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지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마귀의 유혹이다.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야 될 말인가?

너는 그처럼 굳게 결심한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후 마르가리타는 코르토나의 프란치스코회의 성당에 들어가 뜨거운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오랜만에 모든 고해를 하고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은 후 친절한 고해 신부의 권고에 따라

한 칸 짜리 누추한 집을 빌려 아이와 같이 살면서 엄격한 고행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죄가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에게 악한 표양이 된것을 보상하기 위해

어느 주일, 성당문 앞에 서서 그곳에 모인 신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의 용서를 청하고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내놓으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껏 때려달라고 간청했다.

이러한 일든 예사로운 결심으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의 이러한 비장한 결심의 태도는 모든 이들을 감동시켜 동정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마르가리나는 더욱 보속을 철저히 실행하기 위해

’통회의 프란치스코회’라 불리는 제3회에 입회할 것을 열렬히 원했지만,

무엇보다고 과거가 과거인 만큼 만일을 염려하여 입회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3년이 지난 후 통회가 확실하다는 것이 인정되어 겨우 입회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고행과 보속의 노력은 그 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오히려 그녀의 열성은 날이 갈수록 더 증가되어 심한 악마의 유혹에도,

병환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주저함이 없이 가시덤불에 싸여있는 것 같은 통회의 험한 길을 바로 걸어나갔다.

 

 

 

그와 같은 탄복할만한 정성이 자비 깊으신 예수의 성심에 통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 옛날 시몬의 집에서 죄 많은 여인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주신 주님께서는

마르가리타에게도 몇 번이고 발현하셔서

육신과 영혼이 녹아 없어질 정도록 천상의 위로를 내려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참된 표양으로 인해 회개한 죄인은

코르토나 읍내만 하더라도 상당한 수에 달하며,

일반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열의도 놀랄 만큼 높아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굴의 보속 생활을 행하기 실로 18년,

오랜 고행으로 몸이 지쳤는지, 용감한 마르가리타도 이제는 몸의 허약함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불의(不意)의 병이 원인이 되어 17일간 앓다가

마침내 1297년 2월 22일을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는 완수할 것을 온전히 완수한 안심된 기색이었고

입에는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녀의 유해는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존되어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약 2만5천년 전부터 인간과 관계를 맺어 온 개는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친구다.

많은 성인들이 개를 친구처럼 키웠겠지만, 그런 내용이 성인전에 기록된 예는 별로 없다.

그러나 마르가리타의 경우는 아주 예외적으로 개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질 뿐 아니라

그가 묻힌 교회에도 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마르가리타는 9년 동안이나 어떤 부유한 남자의 정부로 살았다.

 

어느 날 그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르가리타 앞에 항상 남자를 따라다니던 개가 혼자 나타났다.

개가 이끄는 대로 어느 참나무 아래 당도해 보니, 그곳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해 있었다.

그 후 마르가리타는 지난 삶을 뉘우치게 되었고, 남은 생애를 엄격한 참회와 보속으로 보냈다.

 

그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하였던지 초기 성인전은 그를 회개의 모범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녀 마르가리타의 뜻하지 않은 회심이 사랑하는 사람의 애완견 덕분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 개가 성녀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명백하다.

 

개들은 우리에게 변치 않는 사랑과 끊임없는 충성의 모델이 되고 있다.

애완동물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어떤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The Throne of Saint Peter-BERNINI, Gian Lorenzo

1657-66 Marble, bronze, white and golden stucco. San Pietro, Rome

 

축일:2월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Feast of the Chair of Peter

Cattedra di San Pietro Apostolo

Cathedra St. Petri Romae

 

 

 

The Statue of Saint Peter-ARNOLFO DI CAMBIO

early 14th century. Bronze Treasury of San Pietro, Vatican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모든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래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날이었다.

이날에는 죽은 이를 위하여 가족들 자리 곁에 빈 의자 하나를 마련해 놓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이날에 바티칸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무덤과 오스티아로 나가는 길 위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무덤 곁에서 신앙의 아버지인 두 사도에게 공경의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 된다.

 

베드로 사도좌는 성 베드로 사도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축일은 4세기경부터 로마에서 지켜 왔다.


지금도 로마에는 성 베드로가 집회 때에 사용했다는 의자가 잘 보존되어 있고, 새 교황이 선출되면

그 의자에 앉음으로써 성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거룩한 권리를 이어받는 표시로 삼는다.
그런데 313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 자유 선언으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축일이 6월 29일로 바뀌면서,
2월 22일은 갈릴래아의 어부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만 지내게 되었다.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

(Sermo 4 de Natali ipsius, 2-3: PL 54, 149-151)

 

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굳건한 신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온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베드로가 모든 민족을 구원으로 부르고 모든 사도들과 모든 교부들의 으뜸이 되도록 간택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많은 사제들과 사목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먼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지만 베드로도 자신의 고유한 권한으로 다스립니다.

형제들이여, 이러한 직분의 부여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 권능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몫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권한을 갖기를 원하시지만, 그것은 항상 베드로를 통해서만 주십니다.

 

주님께서 언젠가 모든 사도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호한 대답을 전해 주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희들 자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맨 먼저 주님을 고백한 사람은 사도들 가운데서 첫 자리를 차지했던 그분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세상의 견해가 너를 오류로 이끌지 못하며,

천상적 감도로 말미암아 교훈을 받고  육정이나 혈통이 아닌 외아들의 아버지이신 그분께서 가르쳐 주셨기에 너는 복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너에게 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나의 신성을 계시하신 것처럼 나도 너에게 너의 높은 위치를 알려 주겠다고 하십니다.

"너는 베드로, 반석이다." 말하자면,

"내가 부서질 수 없는 반석이고  두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모퉁이 돌이며

누구도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반석이라면, 너도 내 힘으로 견고해진 반석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한에 참여함으로써 너도 그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즉, 이 견고한 기초 위에 나는 영원한 성전을 짓겠으며 하늘까지 오를 내 교회가 이 신앙의 견고함 위에 세워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힘도 이 신앙을 누르지 못하고 죽음의 사슬도 이 신앙을 묶어 버릴 수 없다. 이 말은 생명의 말이다.

이 신앙은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것처럼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던져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지극히 복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이 권리를 행사할 권한을 다른 사도들에게도 물려주셨으며 또 교회의 모든 주교들에게도 물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이들에게 나누어 줄 권한을 한 사람에게 위임하시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에게 이 권한을 위임하시는 것은 베드로를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의 으뜸으로 내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홈에서)

 

 

 

가톨릭 신자하면 누구든지 다 아는 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사도를 선택해

3년간 이들을 특별히 가르치셨고

그 중에서 성 베드로를 뽑아 교회의 으뜸으로 삼으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은 베드로 반석입니다.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마태 16,18). 또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시오”(즉 신자와 성직자를 잘 다스리라)(요한 21,15-17) 하고

말씀하신 것을 보더라도 명백하다.

 

이처럼 성 베드로가 온 교회의 으뜸이라면 그의 교좌(敎坐)가 있는 교회가

전 그리스도교회의 모교회(母校會)로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당연지사라 볼수 있으며 로마 교회야말로 이에 해당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 강림으로써 굳은 신덕을 갖게 된 성 베드로는

그 후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삼고, 혹은 전교에 활약하고,

혹은 사방의 신자들을 방문해 그들을 격려했다.

교회가 점차 발전됨에 따라 헤로데 왕의 박해는 시작되어

예루살렘의 주교 성 야고보는 순교하고, 성 베드로는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결국 그도 사형에 처하게 될 몸이었지만, 기묘하게 천사의 특별한 도움을 받아 감옥에서 구출되고,

신자들의 요청으로 안전 지대인 안티오키아로 피하게 되었다.

그곳은 신자들도 많고 성대한 교회가 있어서 베드로는 그 교회를 7년간이나 다스리며

착한 목자가 되었고, 다른 사도들에게는 착한 지도자가 되었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마르16,15)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사도들에게 남겨주신 이 말씀은 항상 베드로의 마음을 울려왔다.

전 세계의 서울이라고 할만한 로마, 굉장한 인구를 가지고 있는 로마, 그곳이야말로 교회의 씨를 뿌릴 많한 가장 좋은 땅이 아니었던가?

마침내 이 신천지의 개척을 결심한 베드로는 안티오키아를 후계자 하가보의 손에 맡기고 로마로 가기로 했다.

 

그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42년이었다.

그 후 25년 동안 그는 주로 이 지방에서 전교에 전력을 다해 큰 책임을 가진 그는 그동안 대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온 교회를 다스리는 큰 책임을 가진 그는 그동안 이곳 저곳 교회의 시찰과 전교를 위해 순회했을 때도

있었고 예루살렘의 사도회의(使徒會議)에 참석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그의 성좌의 소재지였던 것은 언제든지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

교회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오의 시대까지는 비교적 평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네로 왕이 황제가 되자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매일 수백 명의 신자가 체포되어 살육되었다. 이런 때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위험한 것이 교황인 베드로였다.

신자들은 간곡히 그의 피난을 재촉했다.

“당신이 다스릴 신자들은 비단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많은 신자들을 위해서도

아무쪼록 귀중한 목숨을 아껴 주십시오”하고 요청했다.

베드로는 처음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마침내 그들의 요청에 의해 일시 로마를 떠나기로 했다.

 

옛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어느 날,

날이 새기 전에 사람 몰래 로마를 떠나려고 유명한 아피아 가로(街路)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멀리서부터 큰 십자가를 지고 창백히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상히 생각하면서 베드로가 가까이 가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까

그는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시며 고통과 비애에 깊이 잠겨 계시는 바로 예수님이었다.

베드로는 즉각 그대로 땅에 엎드려 말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쿠오 바디스 도미네?)

 

주님께서는 그가 주님을 세 번 배반했을 때와 같은 슬픈 얼굴로 한참 바라다 보시면서 대답하셨다.

 

“그대가 신자들을 버리고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재차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로마에 들어가는 길이오!”

 

이런 비통한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솟아오르는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곧 일어선 베드로의 얼굴에는 굳을 결심이 보였다. 그는 그곳에서 바로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주님의 훈계로 자기 갈 길을 확실히 깨닫고 지금이야말로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당신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요한 21,18) 하신

주님의 예언 말씀이 이루어지고, 순교할 때가 온 것을 깨달았다.

과연 베드로는 오래지 않아 체포되어 십자가 형(刑)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는 주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부당히 생각하고 스스로 자원하여 거꾸로 못 박혀 장렬히 순교했다.

때는 67년 6월 29일이었다.

 

* 성 베드로 사도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29일

 

 

 

 

 

지금도 로마에는 성 베드로가 집회(集會)시에 사용했다는 의자가 잘 보존되어 있다.

새 교황이 선발되면 우선 그 의자에 앉음으로써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거룩한 권리를 받는 표시로 삼는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사도좌는 이런 형태를 가진 교좌나 베드로의 의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교좌, 즉 예수께서 설정하신 지상 교회의 중심인 교황직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대구대교구홈에서)

 

 

 

Christ Handing the Keys to St. Peter-PERUGINO, Pietro

1481-82, Fresco, 335 x 550 cm Cappella Sistina, Vatican

 

그리스도가 직접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는 이 그림은 마태오 16,18-19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보면 그리스도는 사람들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광장의 한가운데 서서 한쪽 무릎을 꿇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를 엄숙하고 경건하게 건네 주고 있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거구의 사람들과 시민들 뒤에는 넓은 광장이 보이고

그 광장 뒤편에는 육각형의 사원 건물들이 보이고 있다.

그 옆에는 콘스탄틴 대제의 개선문을 상기시키는 문이 양쪽에 서 있다.

넓고 긴 광장 중간에는 어른과 어린이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듯 놀고 있으며

건물 뒤편에는 멀리 보이는 산과 하늘의 구름이 드넓은 공간을 느끼게 펼쳐져 있다.

그림의 배경에는 페루지노의 치밀한 기하학적 구도와 투시도의 세밀한 계산이 깔려있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광장은 수많은 금빛 평행선과 수직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리스도와 베드로를 감싸는 중심선을 비롯해서 수많은 수직선과 수평선은

사원의 정문 입구에 보이는 두 인물의 머리 위에서 만나는 원근법과 소실점을 이룬다.

통일된 효과를 위한 여러 개의 대기 원근법이 넓은 공간과 정확하게 균형 잡힌 인물들, 섬세한 하늘,

눈에 보이는 먼 풍경들을 기하학 선상에 모두 포함시켰다.

이러한 페루지노의 화법은 제자인 라파엘로의 그림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작품 중에〈아테네 학당〉그림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이 성당 벽화의 그림은 로마 교황청의 청탁으로 그려진 그림인데 그 당시 초청받은 화가는

페루지노 외에 보티첼리와 기를란다요, 시뇨렐리이다.

 

이 그림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직접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는 행위를 통해

로마 교황청이 처음부터 교회에 대한 권위를 물려받게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페루지노(Pietro Perugino)화가

페루지노는 15세기 르네상스 초기의 움브리파(이탈리아 중부 티베르강 상류지방의 움브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화파)의 화가이며 라파엘로의 소년 시절의 선생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동문으로서 여러 가지 점에서 레오나르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페루지노는 특히 기하학적 초상화와 투시도를 성공적으로 실현한 화가이기도 하다.

 

 

사도좌 使徒座 
라틴어  Sedes Apostolica  영어  Apostolic See  

사도의 장인 성 베드로가 창설한 로마 주교좌를 말한다. 따라서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로마 사도좌의 주교도 된다. 그러므로 사도좌는 교황좌, 혹은 성좌(聖座)라고도 하며 수위권을 가지고, 전세계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세계교회를 말한다.

 

성좌 聖座 
라틴어  Sancta Sedes(S.S.)  영어  Holy See, Apostolic(Papal) See   

세계 교회를 뜻하는 로마의 주교좌를 가리키는 말이나. 일반적으로는 최고의 주교인 교황과 교황을 보좌하는 로마 교황청의 각 성성(聖省), 재판소 등의 행정기관까지도 포함하여 이를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교황은 이 기관을 통해서 세계 각국의 교회를 관리한다.


주교좌  主敎座 
라틴어  cathedra  영어  cathedra  

주교좌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교회의식(敎會儀式) 때 주교가 앉는 의자를 가리켰다. 초기 교회시대에 주교는 이 주교좌에 앉아서 의식을 거행하고, 교도직을 수행하였다. 이 때문에 주교좌란 말은 주교의 권위, 주교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상징하는 말로도 쓰인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에서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에서 모세의 자리(Super Cathedram Moysi)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앉은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편 전례용어로서 주교좌라는 말은 주교가 그 직위에 오르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가 로마에 ‘주교좌’를 정한 축일”(The feast of the Cathedra of St. Peter at Rome, 1월 18일)의 경우에서 주교좌는 바로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주교좌 성당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주교좌는 나무나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천장이 있고, 팔걸이와 등받이가 있다. 그 위치는 복음서대 옆 3대의 계단 위에 위치한다. 천장의 색은 축제일의 색을 사용한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수위권 한자  首位權 
라틴어  primatus  영어  primacy  

모든 주교 가운데 제1의 지위인 교황이 가진 권한을 수위권이라 한다. 이 수위권은 교회의 창설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권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교회의 반석이라 부르고, 그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였다(마태 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도들 가운데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이루어졌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세 번씩이나 당부하셨다(요한 21:15-17). 이러한 베드로의 수위권은 그를 계승한 후임 교황들에게 전수되었다.

수위권에 대한 교리는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년), 피렌체 공의회(143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 등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규정되고 확인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에 따라 성 베드로가 전 교회에 대해 수위권을 가지고, 그것은 후계자들에게 영속적으로 계승된다"고 발표하고, 이를 부정하는 주장은 이단이라고 하였다. 또한 베드로의 수위권을 계승할 자는 로마의 주교임도 아울러 밝혔다. 즉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의 주교는 어떤 시대이든가를 막론하고 수위권을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 로마의 주교가 수위권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는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로서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죽었으며, 로마의 주교들은 베드로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의 질서를 보존해 왔다는 것으로, 이 견해는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가 수위권을 갖는다는 사실은 사람이 정한 바가 아니라 신이 정한 바라고 한다.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수위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발전해왔다. 가장 최근의 견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다. 공의회는 교화에 대한 주교들의 역할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기본적인 가르침은 변경되지 않았다. 여전히 교황은 전교회와 신자들에게 신앙과 도덕을 가르치고,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한 최고의 권우를 갖는다.

(가톨릭대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