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4월 5일
성 빈첸시오 페레르 사제
ST. VINCENT FERRER
San Vincenzo Ferrer Sacerdote
ST. VINCENT FERRER, CONFESSOR
St. Vincentius Ferrerius, C
St. Vincent Ferrer, O.P.
The Angel of the Apocalypse
Born:1350 at Valencia, Spain
Died:5 April 1419 at Vannes, Brittany, France
Canonized:1458
Vincenzo = vittorioso, dal latino = victorious, from the Latin
1350년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도미니꼬회에 입회하여 신학을 가르쳤다.
설교자로서 많은 지방을 두루 다녔고 참된 신앙을 보호하고 윤리를 혁신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1419년 프랑스 바느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 사제의 저서 [영신 생활]에서
(Cap. 13: ed. Garganta-Forcada, pp. 513-514)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설교나 권고의 말에서 어떤 문제를 다룰 때 소박한 말과 스스럼없는 말씨를 사용하십시오.
할 수 있는 데까지 많은 예를 들어 어떤 구체적인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 마치 여러분이 그 사람 개인에게만 설교하듯 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끔 말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말이 오만이나 경멸로 가득 찬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 말고
어버이다운 사랑과 자비로 가득 찬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이십시오.
자기 아들의 죄와 중병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처럼 하고,
깊은 함정에 빠져 든 아들을 구출해 내려 하는 어머니가 근심하는 것처럼 하십시오.
한마디로 그들의 진보를 기꺼워 하고 그들을 천국의 영광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사람처럼 하십시오.
그러한 설교 방법은 일반적으로 회중에게 좋은 효과를 줍니다.
반대로 덕과 악에 대한 이론적이고 일반적인 설교는 청중들로부터 거의 반응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고해성사에서도 이와 똑같이 하십시오.
소심한 사람을 부드러운 말로 위로할 때나 마음이 굳어진 죄인에게 하느님의 두려움을 더 준엄하게 넣어 줄 때에,
여러분은 언제나 가장 깊은 사랑을 보여 주어 그 죄인이 항상 여러분의 말이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깊숙이 찌르는 말보다 먼저 감미롭고 사랑에 찬 말로 권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영혼에 보탬이 되려 하면 여러분은 우선 진심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고,
당신 자비하심으로 모든 덕의 총합이며 또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이 소망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그 사랑을 여러분 안에 부어 넣어 주시기를 단순하게 청해야 합니다.
(가톨릭홈에서)
오늘날 교회의 양극화는 이 성인의 생애 동안에 교회가 갈라졌던 폭풍에 비하면 부드러운 미풍에 불과하다.
화해의 수호 성인으로 꼽는다면 당연히 빈첸시오 페레르를 첫번째로 들 수 있다.
그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세에 고향인 스페인에 있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뛰어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친 후 그는 베드로 데 루나 추기경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 베드로 데루나 추기경은 그의 일생에서 비극적으로 그려질 것이다.
대단히 열성적인 본성을 지닌 그는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을 열성적으로 실천했다.
그는 서품된 지 얼마 안되어 발렌시아의 도미니코 수도회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서방의 대분열이 처음에는 두 교황으로, 나중에는 세 교황으로 그리스도교를 분리시켜 놓았다.
클레멘스는 프랑스의 아비뇽에 살았고, 우르바노는 로마에 있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로마 교황의 지지자로서 대단히 헌신적이었지만 빈첸시오는 우르바노의 선출이 무효라고 확신했다.
데 루나 추기경을 도와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클레멘스를 따르도록 설득하는 활동을 했다.
클레멘스가 사망하자 데 루나 추기경은 아비뇽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베네딕토 13세가 되었다.
빈첸시오는 교황의 고해 신부로서, 교황청의 시종장으로서 베네딕토 13세를 위해 일했다.
그러나 교황은 모든 교황 후보자들이 투표 장소에서 실천하기로 맹세한 대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왕과 거의 모든 추기경으로부터 소외되면서도 자기의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빈첸시오는 환멸에 빠져 결국 심한 병이 들었다.
그는 교회의 어떤 쇄신도 분열을 극복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느꼈지만
결국은 그저 단순하게 "온 세상에 가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일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뛰어난 웅변가요 열정적인 설교가로서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 스위스, 베네룩스 3국, 룸바르디아 지방 등에 복음을 전하고
회개의 필요성과 다가오는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강조하면서 생애의마지막 20년을 보냈다
(그는 ’최후 심판의 천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1408년과 1415년에 과거의 친구였던 교황에게 은퇴하도록 설득하려 애썼다.
결국 그는 베네딕토 13세가 참다운 교황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몹시 불편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 13세가 주재하고 있는 회의의 단상에 올라가 과거에 자기를 사제로 서품시켜 준 그 사람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베네딕토 13세는 과거에 자기를 지지한던 사람들로 부터 버림을 받고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가 교황으로 선임되자, 빈첸시오는 북프랑스 지역에서 교회 일치를 위해 부르짖었고,
그의 공헌으로 기난긴 백년전쟁도 끝을 맺었다. 그는 1455년에 시성되었다.
빈첸시오 페레르 시대의 교회 분열은 숙명적인 것이었다.
36년이란 긴 세월 동안 교회에는 두 개의 ’머리’가 있었다.
만일에 제2차세계 대전의 발발 이래에 세계의 반은 로마에 있는 교황의 계통을 따르며
또 반은 이른바 리우데자네이루의 교황이라는 ’공식적’계보를 따랐다면 오늘날 교회의 상황이 어떠했을지 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교회가 오만과 무지, 탐욕과 야심의 바위에서 오래 전에 파선되지 않고 있는 것은 계속되는 기적이라할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교수대에, 오류는 언제나 왕좌에."라는 로웰의 말과는 반대로
우리는 "진리에는 막강한 힘이 있으며 결국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긴 시간을 요구하기도 한다.
성빈첸시오 호칭 기도에서
정결의 보석이여
애덕의 횃불이여
참회의 거울이여
영원한 구원의 나팔이여
천상 지혜의 꽃이여
악령의 정복자여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천주의 설교자회(도미니코수도회)에서
ORDO FRATRUM PRAEDICATORUM
성 빈 첸시오는 일찍부터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가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을 때와 세례를 받았을 때에 경이로운 일들이 나타났으며, 5살 때에는 중병을 앓던 이웃의 어린이를 치유시켰다.
이러한 은총들,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인성과 성격은 일찍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빈첸시오는 특별한 삶을 살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8살 때에 고전 공부를 시작하고, 14세 때에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생각했던 대로 그는 4년 후에 그가 태어났던 도시에서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그의 모습은 너무나 천사 같았고 그의 행동은 너무나 거룩했으므로, 하느님께 삶을 바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전혀 가능하지 않게 보였다.
그가 이 생활을 선택하자마자, 악마가 가장 위협적인 유혹으로 그를 공격했다.
그의 부모들까지도 그에게, 수도원을 떠나 재속 사제가 되라고 간청했다.
기도와 믿음, 특히 성모님과 수호 천사에게 바친 기도로 빈첸시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련기를 끝냈다. 그는 1379년에 바르셀로나에서 서품을 받았다.
특히 성서와 히브리어를 공부했으므로, 빈첸시오는 유다인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에 스페인에는 많은 유다인들이 있었다. 그가 설교했던 몇 년 사이에, 3천 명 이상의 유다인들과 무어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의 무수한 기적들, 그의 강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그리고 그의 순수하고 분명한 교의는 서로 결합되어 그의 설교를 효과적인 것이 되게 했으며,
또한 그 설교는 확고한 기도의 토대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도미니코회 성인들
성 빈첸시오의 시대에, 두 가지의 악이 치료약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것은 흑사병이 남겼던 도덕적인 이완과 교황의 분열이었다.
전자에 대하여, 그는 시대의 악에 대항하여 지칠 줄 모르고 설교를 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더 좋은 생활을 하게 했다.
그가 교황권의 분열에서 옳지 못한 편을 지지했다는 것은 그의 성덕에 대한 반대 논거가 되지 못한다.
혼동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그 시대에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말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하여,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의 혼란에 질서를 찾게 하고자 애썼다는 것이다.
그는 너무나 열심히 일을 하여 치명적인 병에 걸리게 되었으나, 성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가 그를 방문하는 기적으로 치유되었다.
이 때에 그는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든지 그를 필요로 할 때에는 설교를 하라는 명을 받았다.
빈첸시오의 설교는 이상하면서도 놀랄만큼 효과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수 백명의 ― 만 명 이상이 된 일도 있었다 ― 사람들로 하여금 순례자의 모습으로 곳곳으로 그를 따르게 만들었다.
그들 가운데서 사제들은 매일 미사를 노래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며, 빈첸시오의 설교로 회개한 이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남녀들이 여러 그룹으로 다니면서, 이 도시 저 도시를 맨발로 걸어 다니며 기도를 바쳤다.
그들은 필요한 곳에서는 교리를 가르치고, 병원을 세우고, 흑사병의 시대에 사라졌던 신앙을 살아나게 했다.
이렇게 그는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를 돌아 다녔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영국에도 갔다고 한다. 설교의 짐은 그에게는 고행이었다.
대중 미술에서 성 빈첸시오와 마찬가지로 천사로 그려지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그는 죄의 광야로 나가 사람들에게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외쳤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죄인들은 그의 놀라운 설교를 들었으며 가장 완고한 이들까지고 죄를 버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무수한 기적들을 행했는데, 어떤 것들은 스페인의 격언 속에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
영성 생활에 대한 그의 책은, 아직까지도 열심한 영혼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성녀 클로테와 그 수녀들에게 설교를 했으며, 그녀는 그가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스페인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병이 들어 있었던 그는, 브르타뉴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르타뉴의 어부들은 아직도 폭풍에 대하여 그의 도움을 청한다. 스페인에서, 그는 고아들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중세기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거의 전 유럽을 순방하면서 강론하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그의 언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성덕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 빈첸시오는 1357년 1월 23일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귀족인 아버지는 윌리암 페레르로 발렌시아의 공증인(公證人)이었고, 어머니는 콘스탄시아 였다.
콘스탄시아라 함은 인내라는 뜻인데 사실 어머니는 그 이름대로 꾸준한 인내심으로 남편과 더불어 자녀 교육을 담당했고,
빈첸시오도 양친이나 스스의 말씀을 잘 들으며 부지런히 공부하고 기도했으므로
그의 뛰어난 재주는 충부히 발휘되어 학업의 진보는 놀랄 만큼 빨랐고 그의 덕행면에도 감탄할 바가 있었다.
그는 유난히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어려서부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앙 이틀은 단식재를 지켰다.
빈첸시오는 18세때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서원을 한 후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파리 등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384년에 신학박사가 되었다.
그는 아무리 연구에 몰두해도 기도를 소홀히 하는 적은 없었다.
그의 학문으로서의 성공은 끊임없는 기도의 선물로 간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종종 기적도 일어나게 해 주시곤 했다.
그가 바르셀로나에 유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심한 흉년으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때,
빈첸시오는 설교 중에 "곧 밀을 잔뜩 실은 두 척의 배가 들어와서 사람들을 구하여 주리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 예언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예언한 당일은 심한 폭풍우가 닥쳐와서 배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어 수도원장은 경솔히 예언한 그의 무모함을 비난했다.
그런데 막 그 시각이 되자 정말로 밀을 잔뜩 실은 두 척의 배가 항구에 들어 와서 사람들은 굶주림에서 면할 수가 있었다.
그가 발렌시아에 머물고 있을 때에 프랑스 왕 가롤로 6세를 방문하는 교황 사절 베드로 데 루나 추기경이 여행 도중
그 도시에 들른 일이 있었는데,추기경은 그의 학식과 사람됨에 감탄하며 일행중에 참가케 하고, 그 후 다시 그를 로마 교황청으로 불렀다.
당신 교회 내부에 어려운 문제가 생겨서 빈첸시오는 그 해결에 온힘을 다했지만 불행히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이 일로 인한 과로로 병상에 눕게 되어 임종이 가까이 온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어느날 밤 예수께서 성 도미니코와 성 프란치스코를 데리고 그에게 발현하시어
"빈첸시오야, 일어나라. 나는 네가 나의 이름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에서 설교하기를 원한다.
너는 훗날 타향에서 죽으리라. 이제는 가서 사람들의 죄를 경고하며 심판 당할 날이 가까웠다고 전하라"하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이 뺨에 손을 대시자 그의 병은 완전히 완치되었다.
*성 도미니코 사제 축일:8월8일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오상축일:9월17일
그가 예수께 의탁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허가를 교황께 받은 것은 2년 후의 일이었다.
그는 1398년부터 1419년 죽기까지 각지를 다니며 강론했다. 그는 항상 걸어서 다녔고, 연로한 뒤에는 당나귀를 타고 다닌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엄한 단식재를 지키고 여가만 있으면 늘 열심히 기도했다. 그에게는 언제난 수도원의 형제가 수명 따라다녔다.
그것은 고해성사를 주던가 혹은 예절을 행할 때에 돕기 위함이었다. 회개한 사람이나 그에게 교훈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늘 그의 곁에서 함께 했다.
빈첸시오는 하느님께 신기한 힘을 받고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성령 강림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그가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강론을 해도 프랑스인들이 들으면 프랑스어로, 독일인이 들으면 독일어로 들리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강론을 듣는 청중은 종종 수천 명에 달했고 구전에 의하면 어떤 때에는 8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대개 옥외(屋外)광장에서 강론을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구석구석까지 들렸다고 한다.
1417년 그는 브르다뉴 후착의 청에 의해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토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매우 풍기 문란한 곳이었지만 그의 훈계로 말미암아 일변하여 오래지 않아 나쁜 풍속도 거의 개량되었다.
그 후 성인은 영국에 가려고 했으나 이미 노쇠한 몸이고 해서 부축하는 사람들은 그를 고국인 스페인을 모시고 가 거기서 돌아가시게 하고자
저녁 때 프랑스 브리타니의 반느를 출발했다.
밤새도록 걸었음에도 어찌된 일이지 다시 반느 마을 앞이라 그는 이곳에서 죽는 것이 하느님의 성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갑자기 위독해져 병자 성사를 받고,
형제들에게 주님의 수난기를 읽도록 부탁하고 그는 합장하고 시편을 외우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때는 1419년 4월 5일이었다. 그는 1455년에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우표로보는 성인전에서.최익철신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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