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데 피치 동정 / 성 베다 사제 기념일 +++









축일:5월25일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
St. GregoriusⅦ
Saint GREGORY VII
Pope St. Gregory VII
St. Gregory VII (Hildebrand), OSB Pope (RM)
San Gregorio VII Papa
Soana (Sorano, prov. di Grosseto), ca. 1020 - Salerno, 25 maggio 1085
(Papa dal 30/06/1073 al 25/05/1085)
Born:c.1020 as Hildebrand in Italy
Papal Ascension :1073
Died:1085
Gregorio = colui che risveglia, dal greco






힐데브란도는 1028년경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교육 받은 후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교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하던 교황들의 사절로서 그들을 도왔고,
1073년경 그레고리오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어 이 개혁작업을 꾸준히 수행해 나갔다.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반대에 부딪쳐 살레르노로 피신하고 그 곳에서 1085년 세상을 떠났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편지에서
(Ep. 64 extra Registrum: PL 148, 709- 710)


자유롭고 정결하며 보편적인 교회


당신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신 주 예수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수들 손아귀에서
얼마나 큰 환난과 고통을 당하고 또 무엇 때문에 당하고 있는지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고 이해해 주기를 요청하고 또 간청하는 바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가 심히 무가치한 사람인 나를, 하느님께서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그 자리를 원치도 않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도좌에 올린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하느님의 신부이고 우리 어머니이신 성교회가
자신의 참된 위치로 되돌아가 자유롭고 정결하며 보편적인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옛 원수는 이 모든 것을 싫어하기에 모든 것을 전복시키고자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를 거슬러 무장했습니다.


이 원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부터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큰 피해를 우리에게, 특히 사도좌에 입혔습니다.
진정코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세월이 더 지나면 지날수록 그 옛 원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살하려고 더욱더 광분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을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진실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전세계 누구라도
사도들의 으뜸이신 성 베드로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이며 그리스도 다음의 첫 목자라는 것과
거룩한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요 스승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고 또 흔들림 없이 지지한다면,
여러분의 형제요 자격 없는 스승인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청하고 명하니,
여러분이 이들을 통하여 모든 죄의 사함과 현세와 내세의 축복과 은총을 얻고자 한다면,
위에서 말한 여러분의 아버지와 여러분의 어머니를 도와주고 구출하십시오.
모든 선의 원천이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여러분의 정신을 언제나 비추어 주시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게 해주시어,여러분이 변함없는 헌신으로써 위에서 말한
여러분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러분에게 빚진 분들로 만들고 부끄럼이 없이 그분들과 친교를 이루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가톨릭홈에서)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축일:5월21일.
*성 레오 9세 교황 축일:4월19일.






[그레고리오 개혁]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본명이 힐데브란트(Hildebrand, 1020/25-1085)로서
그레고리오 6세(재위1045-1046)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로마 교회의 암흑기 말(1046)에 교황과 함께 쾰른으로 축출되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에 머물며 엄격한 수도생활 가운데 클뤼니 개혁을 체득하였다.
1049년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9세(재위1049-1054)의 요청으로 로마에 돌아온 그는 차부제품을 받고, 교황청의 재정 관리인과
로마 성 바울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073년 교황에 선출되어 개혁을 통한 교권 확장에 나섰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그의 정치적 성향으로 클뤼니 개혁과는 달랐다.
클뤼니 개혁에서 교회의 자유는 세속 군주와 주교들의 외부 압력과 침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개혁은 황제나 귀족들을 통해 또는 성직매매의 방법으로 주교와 수도원장이 임명되던 제도를 공격하였다.
즉 그레고리오 7세의 주요 과제는 성직매매와 평신도(황제)의 성직(주교직) 서임권(敍任權)에 투쟁하는 것이었다.


서임권 문제에 있어서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를 교회에 복종해야 하는 평신도로 보았고,
인간에게 있서 영혼이 육신 위에 위치하듯이 그리스도교 제국에 있어서 교회와 교황은 국가와 황제에 우선한다는 신학적 주장을 내세웠다.
1075년 교황은 그레고리오 개혁의 지침서가 된 27개 항묵의 ’교황의 훈령’(Dictatus Papae)을 선표하였다.
교황은 이 훈령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강조하였다.
(세계교회사에서)










그레고리오는 희랍어로 ’파수하다’ 또는 ’지키다’란 뜻이다.
10세기와 11세기 전반기는 교회의 암흑기였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황권이 몇몇 로마 가문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49년에 개혁가인 교황 레오 9세가 선출되자 사태는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젊은 수사인 힐데브란드를 로마로 불러서 교황의 고문 겸 중요한 사명을 담당할 특사로 임명했다.
그가 바로 그레고리오 7세이다.
그 당시 세 가지 악습이 교회를 휩쓸고 있었다. 성직이나 성물을 사고 파는 성직 매매, 성직자의 불법 결혼,
왕과 귀족들이 교회의 성직자 임명을 통제하는 평신도 서임권 등이 문제였다.
이 모든 악습에 대하여 힐데브란드는 개혁의 초점을 잡았는데 처음에는 교황의 고문으로서,
다음에는(1073-1085) 교황이 되어 스스로 개혁해 나갔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칙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 일치를 위한 볼 수 있는 중심으로서 로마 주교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의 기나긴 투쟁으로 유명한데,
하인리히 4세는 주교와 수도원장의 선출을 마음대로 하려 했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회의 자유에 대한 어떠한 공격에도 맹렬히 저항했다.
이 때문에 그는 괴로움을 당했고 결국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는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러므로 유배지에서 죽는 것이다."하고 말했다.
30년 이후에 교회는 평신도 서임권 투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1606년에 시성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이정표가 되는 그레고리오 개혁은 이 세상 통치자의 부당한 간섭에서 온 교회를 구하고
교황권을 보호하고자 애를 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특정한 지역의 불건전한 국가주의적 교회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 기초를 둔 온 교회의 일치를 주장했고 로마의 주교가 성베드로의 후계자임을 강조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사회적 또는 민족적 종교가 미묘한 요구를 해오고 있는 우리 시대에 하실 말씀이 많을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는 가장 가난한 여인이라도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 그리고 또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합당한 남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의 욕구나 악한 행실에 의하여 하느님의 배필이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거룩한 교회는
하느님의 율법과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서 지상의 배우자를 정당하게 지키는 것이 용납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성그레고리오 7세,’신자들에 대한 호소’)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그레고리오 개혁’ 영권(靈權)의 우위 확립


교황직은 그레고리오 대교황 때(590-604) 세계적 지배자로 부각되었으나 그 후로는 11세기 초까지 침체와 쇠퇴를 면하지 못했다.
그간 니콜라오 1세(858-867)를 제외하면 별로 뛰어난 교황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카롤링 왕조가 멸망하지 교황직은 강력한 황제들의 후견을 받지 못함으로써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교황직은 로마 귀족들의 파벌 싸움의 노리개가 되어, 점차 그 보편성을 잃고 일개의 평범한 교구로 전락했다.
후세의 역사가는 이 시기를 ’암흑의 세기’로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카롤링 왕조가 멸망한 880년부터 교회가 자율을 되찾으려고
자각하기 시작하는 1046년까지 계속되었다. 여교황 요한나도 실은 이런 암흑세기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전설이다.


그 사이에 교황직보다 황제직이 먼저 재기했다. 즉 962년 오토대제의 등장으로 신성 로마제국이 탄생하고 잇달아 뛰어난 황제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교황과 주교들이 하는 일에 마구 간섭했다. 이러한 속권의 우세는 1046년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점은 동시에 전환점을 의미하였으니, 이때부터 영권이 우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1046년부터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주와 자유를 수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먼저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수도원과 수도생활을 주교나 제후들의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운동이었으니, 클뤼니 수도회가 이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수도회에서 일어나 교회 개혁운동은 곧 교황청으로 파급되어, 이른바 그레고리오 개혁을 낳게 했다.
그레고리오 개혁이란 성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교황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교황이 되기전 클뤼니 수도회의 수도자로 있을 때부터 이 운동을 주로 했었다.
그에게는 국왕도 단순한 평신도였고 그래서 교회에 순종해야 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개혁은 교회를 세속의 권세가들의 간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레고리오는 교황이 된 후 그의 유명한 ’교황령’에서 이러한 원칙을 이론화했다. ’교황령’에 의하면 교황은 그리스도교 세계 최고의 권위자이다.


그는 모든 주교들의 권리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또한 영적인 최고권의 소유자로서 제왕들보다 높고, 따라서 종교적원리적 견지에서 필요한 때엔 제왕을 파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는 도리어 영권을 구속하려 했다. 그는 왕인 동시에 사제임을 부인했다.
속권과 영권을 둘러싸고 이와 같이 대립된 견해는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그것은 속인에 의한 성직서임의 폐단을 제거하려는
소위 임직권(任職權) 논쟁에서 구체화되었으며 카노사에서 결판을 내리게 되었다.


성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밀라노 주교 선거에 간섭하려 하자, 임직권을 엄금하고 그것을 어길 경우 파문도 불사할 것을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교황의 그러한 선언에 개의하지 않을뿐더러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다.
교황은 하인리히에게 파문으로 응수했다. 어떻게 판결이 날것인가. 온 세계가 숨을 죽였다.


상황은 하인리히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편을 들지 않았고, 만일 1년 이내에 교황으로부터 파문의 해제를 받지 못하면 새 왕을 선출할 것을 선고했다.


하인리히는 하는 수 없이 교황을 찾아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로마로 가려면 알프스를 넘어야 했고,
거기서는 하인리히를 반대하는 제후들이 있어서, 알프스를 쉽게 넘을 수가 없었다.
부득이 하인리히는 가족을 이끌고 에페닌 산맥의 북쪽에 있는 카노사 성으로 갔다. 그 때가 1077년 1월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여기서 하인리히 황제는 참회자로서 참회복을 입고 그레고리오 교황에게 사죄를 간청하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처음에 사죄를 거부했다.
그러나 하인리히의 대부인 클뤄니 수도원장과 카노사를 포함한 변경의 태수 부인의 간청으로 독일 제후들의 분쟁에 있어서
교황의 판결을 수락한다는 조건하에 하인리히를 파문으로부터 풀어 주었다.


하인리히는 패배했다. 그레고리오가 강자임이 드러났다.
속권이 영권에 굴복함으로써 서구 세계의 헤게모니가 황제에게서 교황한테로 넘어갔다.
독일 왕권은 소위 ’카노사의 굴욕’으로 앞으로 재가가 거의 불가능한 정도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처럼 카노사의 사건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후 모든 제왕들에게 굴욕적인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1872년 문화투쟁의 주인공인 비스 마르크는 독일의회에서 교황과의 문제가 나오자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고 선고함으로써 의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과 하인리히 4세 황제와의 관계는 곧 다시 악화되었다.
그레고리오는 다시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하인리히는 대립교황을 세움으로써 그레고리오에게 응수할뿐더러, 직접 로마 공격에 나섰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부득이 이탈리아 남쪽으로 피신했다. 그는 거기서 1085년 5월에 사망했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귀양살이에서 죽는다"는 마지막 말은 남겼다고 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하다. 이 말은 시편(44)에 나오는 말이다.


그레고리오는 시편의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너를 기쁨의 기름으로 발랐다’는 말을 ’이로 말미암아 나는 귀양살이에서 죽는다’는 말로 바꾸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말을 패배자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즉 하느님이 의로운 그레고리오에게 그의 공적으로 보답하기를 거절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그 해석을 다르게 하고 있다.
즉 그 말은 오히려 그레고리오의 순교자적 고백을 나타낸 것으로서, 세상이 하느님의 사자인 그레고리오를 유배시킴으로써,
세상이 하느님이 주신 구원을 배척했음을 입증하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죽음은 패배 같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승리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성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해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라고 말씀하신 예언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압박과 박해, 내부에서의 분쟁과 소란도 없지는 않았지만 많은 폭풍우 속에서도
로마의 성좌는 천고의 바위와 같이 높고 뚜렷하게 솟아 있어 그 위에 서있는 교회를 태산과 같이 안전하게 지탱했다.


그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교회라는 작은 배가 큰 파도에 휩쓸려 금방이라도 침몰될 위기에 처할 것 같으며
반드시 훌륭한 분을 선두에 내세워 교회를 위험에서 하셨다.
여기에 수록할 성 그레고리오 7세도 교회의 위기에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되신 위대한 교황 중의 한 분이셨다.


힐데브란트(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전 이름)는
1020년에서 1025년 사이에 이탈리아 토스카니아 지방 소아나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정은 가난했지만 본당 사제가 그의 영리함을 보고 로마에 유학시켜 고등교육을 받게 했다.
그 후 수도 생활을 시작했고 클뤼니 수도원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1045년,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 은사 그레고리오 6세 교황에게 초청되어 로마에 갔다.
그레고리오 6세 교황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으나 그 뒤 5대에 걸친 교황들에게 봉사하며 로마에서 중책을 맡았다.


성 레오 9세 교황은 그의 열렬한 신앙심을 인정해 그에게 로마의 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개혁을 의뢰했다.
그 회 수사들은 사기가 퇴폐되고 수도 생활의 열심도 놀랄 만큼 식어져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늘어진 인심을 가다듬고 그들의 열심을 일으키기 위해
말보다는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예상외로 빠리 수도회를 쇄신 할 수 있었다.
이 비상한 수완은 그가 나중에 행한 바 있는 전 교회에 걸친 혁혁한 혁신의 성공을 미리 약속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 레오 9세 교황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루가 8, 16-17)하신 성서 말씀대로
이처럼 훌륭한 그레고리오를 추기경에 오르게 하고, 프랑스 주재 교황 사절로 임명했다.
그 후 그레고리오는 독일의 교황 사절이 되어 황제 하일히 4세와 여러가지 절충에 노력했는데
언제든지 그의 직무에 대한 감탄할 만한 열심과 출중한 인격 등은 만족한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073년 알렉산데르 2세 교황이 서거하자 추기경, 주교 사에,
평신도 등 모든 방면의 삶들에게 교황 취임을 의뢰받게 된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전승에 의하면 고화의 장례식을 마친 후 어떤 사람이 "힐데브란트 경이야 말로
베드로의 성좌에 오르실 부니다"라고 절규하자 모든 사람이 이에 합해 폭풍우와 같이 환호하며
그레고리오를 들고 교황의 옥좌에까지 모시고 갔다 한다.
여기에서 그는 이것이 하느님의 성의라는 것을 깨닫고 이 중책을 받아들여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책임의 중대함을 통감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했다 한다.


당신 교회내에는 슬프게도 성직 매매의 폐풍이 유행하고있었고, 성직자의 타락도 우려할 만한 것이어서
단호히 개혁하지 않으면 전 교회를 부패의 병독(病毒)에서 구할 수없으리라고 평소부터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감된 일이지만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도 성직 매매에 관계가 있었으므로 전대의 교황에게 파문당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는 등극 후 바로 로마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위와 같은 폐단의 방지책으로
새로이 엄중한 규칙을 정하고 많은 회칙을 교회의 각 지방에 보내 이를 개혁하는 데 힘썼다.






오랜 인습에 젖은 성직자들 중에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을 좋아하지 않고
그의 훈계를 따라가지 않는 자도 있었다.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1075년 이와같은 불만의 주교들을 모아놓고 보름스에서 회의를 열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폐위를 기도하고 무례한 결의문을 그에게 보냈다.


그는 우리 주 예수와 같이 진심으로 원수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로마 귀족이 분개해
결의문을 가지고 온 사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도 그를 보호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회 질서를 어지럽힌 황제 등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없었으므로 그는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파문했다.


하인리히 4세 황제는 크게 분노하며 우트레히트의 주교에게 그를 살해하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부터 주교좌 성당이 벼락을 맞아 전기가 끊기는 등 천벌이라고 할 만한 여러가지 불행이 닥쳤고,
독일 국민은 황제를 배반해 하인리히는 곤궁에 빠졋다.
그래서 할 수없이 독일의 제후들의 트리부르 회의에 참석한 교황을 카노사(Canossa)성에서 방문하고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해 겨우 파문은 벗어났으나 진심으로 회개한 것은 아니었다.


하인리히 4세는 다시 포악한 태도로 교황을 괴롭혀 다시 한번 파문을 내리자 그는 교황에 대해
갖은 욕설을 퍼부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인솔하고 이탈리아에 침입해 로마를 포위하고
교황을 포로로 삼으려고 해서 교황은 할 수 없이 살레르노(Salerno)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교황은 병을 얻어 1085년 5월 25일 귀양살이와 같은 적적한 생애였지만
주님과 함께 살았던 자로서의 고요한 최후를 맞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몸은 정의를 사랑했다. 그랬던 만큼 추방되어 이 유배지에서 죽는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5월25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데 파치 동정
Santa Maria Maddalena de’ Pazzi Vergine
Saint Mary Magdalene de’ Pazzi Carmelite
St. MARY MAGDALEN of Pazzi
Born:1566 at Florence, Italy as Catherine
Died:25 May 1607
Beatified:8 May 1626 by Pope Urban VIII
Canonized:28 April 1669 by Pope Clement IX
Maria = amata da Dio, dall’egiziano; signora, dall’ebraico
= mistress from God,






1566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종교 교육을 받은 후 가르멜회에 들어가 기도와 극기의 숨은 생활을 하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많은 수녀들을 완덕의 길로 인도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영적 은혜를 받고 1607년 세상을 떠났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데 파치의 동정의 계시와 시련에 관한 글에서
(Mess. III. 186.264: IV. 716:Opere di S. M Maddalena de Pazzi,
Firenze, 1965, 4, pp. 200, 269:6, p. 194)


오소서, 성령이여 하느님의 말씀이여, 당신은 성령 안에서 참으로 오묘하십니다.


당신은 성령께서 영혼 안에 들어가게 하시어 영혼이 성령의 부름을 받아 하느님과 결합하여 그분을 즐기고 그분에게서만 위로를 찾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죽임당한 어린양이신 주님 피의 보배로운 인장으로 날인된 영혼 안에 들어가십니다.
더욱이 성령께서는 스스로 활동하시고 영혼안에 들어가실 의향이 있으시지만, 그 피가 성령께서 들어오시도록 자극합니다.
스스로 활동하시는 이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같은 실체이시고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의지로부터 발출하시어
샘물처럼 영혼 안에서 퍼져 나가시고 영혼은 그 성령 안에 잠겨 버립니다.


두 개의 강줄기가 합류할 때 하나가 되어 작은 강이 제 이름을 잃고 큰강의 이름을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영혼에 들어 오시는 영혼과 합치되실 때에도 그러합니다.
성령보다 못한 영혼이 자기 이름을 잃고 성령의 이름을 얻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영혼은 성령과 하나가 될 정도로 성령 안에서 변모되어야 합니다.


성부의 품안에 계시는 보화의 분배자이시고 성부와 성자간의 통교를 맺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영혼 안에 너무도 조용히 들어가시므로
영혼이 성령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의 위대함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적습니다.
육중하시고도 가뿐하신 성령께서는 당신을 받아들 일 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끊임없이 소근거리시는 말씀과 깊은 정적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움직임이 없으시면서 동시에 가장 분주히 움직이시는 그분은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만물 안에 들어가십니다.


성령이시어, 당신은 움직임이 없으신 성부 안에 머물지 않으시고 성자 안에서 머물지 않으시면서도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당신 자신 안에 그리고 모든 복된 영들과 피조물 안에 계십니다.
피조물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분이 되신 그 외아드님이 흘리신 피를 통하여 당신께서도 피조물에게 필요한 분이 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은총의 선물을 통하여 순결 가운데 당신의 유사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피조물과 성자의 피의 효과를 자신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당신께서 거처하시기에 합당한 자가 된 이들 안에 안주하십니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성부의 결합이시여,성자의 마음에 드는 이시여,
오소서. 당신은 진리의 영, 성인들의 상급, 영혼의 안식, 어둠속의 빛, 가난한 이의 부요, 사랑하는 이의 보화, 배고픈이의 만족,
그리고 순례자의 위안이십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온갖 보화를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말씀이 육화되게 하신이여,
오소서. 당신께서 은총과 자연으로 성모님 안에 이루신 것을 은총으로 우리 안에 이루어 주소서.


모든 정결한 생각의 부양자이시고 모든 인자의 샘이시며 모든 순결의 극치이신 이여,
오소서, 오시어, 당신 안에 흡수되는 데 장애되는 모든 것을우리에게서 제거해 주소서.
(가톨릭홈에서)




파치의 피렌체 명문 출신인 가테리나는 15세에
피렌체의 가르멜로 디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수녀원에 들어가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의 일생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의 전형적인 모범이었다.


그녀의 불붙는 듯한 신앙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에게 열심히 서한을 띄웠으나 그 당시 큰 효과는 없었다.
교회의 개혁에 바쳐진 그녀의 일생은 깊은 기도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금욕적인 생애였다.
그녀는 이러한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재현시킨 것이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신비적 탈혼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영적 일치를 의식하면서
내적 외적으로 감각의 세계에서 벗어날 만큼 하느님과의 영적 일치에로 몰입되는 것이다.
파지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을 너무나 퐁요롭게 받았기 때문에 그녀를 ’탈혼 성녀’라고 부를 정도이다.


그녀는 1566년, 플로렌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때의 플로렌스는 큰 도시로서 일류 가문들이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
카타리나 파지와 같은 환경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귀족과 결혼하여 안락한 생활을 즐기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홉 살 때, 가족의 고해 신부로부터 묵상하는 것을 배웠다.
그녀는 당시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첫영성체를 하고 한 달 후에 사적 동정 서원을 하였다.
16세가 되자 그녀는 플로렌스에 있는 갈멜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는 매일 성체를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타리나는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이름을 받고 1년 동안 수련 기간을 보냈는데 그때 심하게 앓았다.
장상은 그녀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녀를 침대에 눕힌 채로 소성당으로 데리고 가 개별적인 예식으로 서원을 하게 했다.
서원을 하자마자 그녀는 약 두 시간에 걸처 탈혼상태에 빠졌다. 그 같은 탈혼 상태는 그 후 40일간 아침 영성체 후에 계속 일어났다.
이러한 탈혼 상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풍요롭게 체험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착각에 대한 보호 조처로서 또한 계시를 보존하기 위하여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해 신부는 그녀의 체험을 다른 수녀에게 구술하도록 명했다.
이것은 6년이 지난 후엔 다섯 권의 두꺼운 책을 쓸 정도였다.


처음 세 권의 책은 1548년 5월 27일부터 1585년 성령 강림 주간 동안의 탈혼 상태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간은 5년간의 혹심한 시련을 위한 준비였다. 네 번째 책은 이 시련에 대한 기록이고, 다섯 번째 책은 개혁과 쇄신에 관한 편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또 다른 책인 ’영적 권고’는 수도자 양성에 있어서 그녀의 경험들을 모은 것이다.
예외적인 것이 이 성녀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했다.
그녀는 생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사람에게 발현하였으며 많은 병자를 고쳐 주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탈혼 상태에 머무는 것이 쉬운 일이므로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하느님께서는 그녀가 그 다음 5년 동안 영적 삭막함을 체험하게 될 때 느끼는 괴로움에 대비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특별한 접근을 허용하셨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서 온통 무시무시한 것 밖에는 보지 못하는 어두운 상태에 떨어졌다.
그녀는 맹렬한 유혹을 당했고 크나큰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1607년, 41세에 세상을 떠났고 1699년에 시성되었다.
그녀의 사망 후 350년이 넘을 때까지도 그녀의 시체는 썩지 않았다.


신비가들에 대한 하느님의 친밀한 일치의 은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영원한 일치의 행복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에서 신비적 탈혼 상태의 원인이 되는 것은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성령이다.
탈혼 상태는 육체의 연약함과 하느님의 비추심에 거역하는 육체의 힘 때문에 기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가 정화되고 강해지면 탈혼 상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탈혼 상태의 여러 가지 면에 대하여는 아빌라의 데레사가 쓴 ’영혼의 성’제6편 5장과 십자가의 성요한이 쓴 ’어둔밤’제2편 1장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파지의 마리아 마달레나는 고통 속에서 구원의 은총을 발견하였다.
그녀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을 때 그녀는 자신의 남은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것에 대한 그녀의 바람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동료 수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에게만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당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서로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축일:10월15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축일:12월14일.






파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1566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의 명문 파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세례 때에는 시에나의 가타리나라고 이름지었다.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격언과 같이 그녀에게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성덕의 싹이 트여 만 2세가 되자마자 성체속에 주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한없는 애정을 표시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놀 때에도 문득 하느님을 생가하고는 즉시 성당에 달려가 몇 시간이고 마음껏 기도에 몰두하기도 했다.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도 아이답지 않은 깊은 이해와 종정을 가지고 자신도 편안히 있을 수 없다하여
제 손으로 가시관을 만들어 쓰고 침상에 누워 그 아픔으로 인해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그 고통을 세상 사람들의 죄의 보속으로 바쳤다.
이처럼 경건하고도 출중한 아이였으므로 그 당시에 특별한 관면(寬免)으로 열살 때에 첫영성체를 허락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고,
그때에 그녀는 평생 동정의 서원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코르토나의 시장으로 부임된 후 그녀는 플로렌스의 수녀들에게 위탁되어 교육을 받게되었다.


몇 해가 지나서 코르토나에 돌아온 아버지는 그녀를 출가시키려고 했으나 그녀는 서원 한 바도 있고 또 수도원에 들어가서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결심이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대노하여 여러 가지로 그녀를 괴롭히며 억지로 자기의 의사에 복종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자기의 신념을 관철시켜 드디어 16세 때에 플로렌스에 있는 가르멜회에 들어가고 말았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녀의 수도명이다.


그녀가 가르멜회를 선택한 이유는 아직은 일반인들에게 영성체가 자유로이 허락되지 않았던 당시에 있어서
이 수도회만은 매일 영성체를 할 수 있는 허가가 있어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매일 일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84년 서원을 한 후에 그녀는 탈혼의 은혜를 받았다.
그때 막달레나는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 14)라고 한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을 외우자
그녀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며 형언키 어려울 만큼 위엄있는 태도로 변해 두 시간이나 자기를 잊고 황홀경에 빠진 것이다.
그동안 그녀는 사랑하는 주님과 신비적 일치를 체험했다. 이러한 신비로운 일치는 그 후로도 종종 일어났으나
막달레나는 고통의 인간이라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필로서 적합할 만큼 여러 가지의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선 중병에 걸려 거의 위독 상태에 빠졌던 것을 비롯하여 그것이 간신히 회복되자 이번은 무서운 정신상의 고민과 아주 심한 유혹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그녀를 모독, 절망, 탐욕, 불순명 등의 대죄에 떨어뜨리려고 하는 악마의 끊임없는 노력에는 그녀도 몹시 속을 태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할 때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른 수녀들 앞에 엎드려 "부디 불쌍한 죄인인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한 적도 몇번 있었다.


이 같은 가혹한 시련은 실로 6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잘 참아 1590년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자 하느님께서 예정하셨던 고민의 잔도 이미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없어졌는지
그렇게도 예정하셨던 고민의 잔도 이미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없어졌는지 그렇게도 심하게 밀려오던 유혹의 물결도 갑자기 그치고
겹겹이 맺혀있던 우울한 검은 구름도 깨끗이 다 벗겨져, 그녀의 가슴속에는 비찰 데 없는 평화의 햇빛이 환하게 비치게 되었다.


막달레나는 그 동안에 배운 희생의 정신을 일평생 잊지 않았다.
이 사실은 그녀가 ’죽음보다도 고통’이란 말을 항상 명심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녀는 후에 수련장이 되고 또한 부원장이 되어 깊은 초자연적 지식과 뜨거운 사랑을 기울여 그녀에게 위탁된 수녀들을 완덕의 길로 잘 인도했으나
곧 다시 중병에 걸려 갖은 고통을 인내한 후 1607년 5월 25일, 깨끗한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그 뒤 그녀에 의한 기적은 무수히 일어나 20년 후에는 복녀위에오르고 마침내 1669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9세때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St. Bede the Venerable, Priest, Monk, Scholar


축일:5월25일
성 베다 사제 학자
St. Bede the Venerable
St. Bede, Benedictine, Doctor,
San Beda detto il Venerabile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Monkton in Jarrow (Inghilterra) 672-673 - Jarrow, 25 maggio 735
Born:672 at Wearmouth, England
Died:25 May 735
Canonized:1899 by Pope Leo XIII
Father of English History






673년 위어마우스 수도원 근교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도 비스코프에게 교육을 받았고 수도원에 입회한 후 사제가 되어 가르치고 저술하는데 생애를 바쳤다.
교부들의 전승을 따르고 성서를 주석하는 신학 및 역사학의 저술을 남겼다. 735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베다의 임종에 대한 커버스트의 편지에서
(Nn. 4-6 PL 90, 64-66)


나는 그리스도를 보고 싶습니다.


예수 승천 대축일 전 화요일이 되었을 때 베다 형제의 병세는 악화되어 숨결이 매우 거칠었고 발은 약간 부어 올랐다.
그러나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온종일 우리에게 학습을 지도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이 저술하려는 것을 받아쓰게 하였다.
다른 여러 가지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습 과제를 지금 속히 배우십시오.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있을지는, 잠시 후 나를 지으신 분께서 데리고 가실는지 모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가 자신의 죽음이 언제 올지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수면도 취하지 않고 감사 드리면서 그날 밤을 지새웠다.


수요일 아침이 밝아 오자 우리가 이미 시작했던 것을 지체하지 말고 끝마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아홉시까지 그일을 했다. 아홉시자 되자 그날 늘 하던 대로 유해 행렬을 했다.. 우리 중 하나가 그의 곁에 남아 있었는데,
그는 베다 형제께" 스승님, 스승께서 받아쓰게 하신 그 책은 아직도 한 장이 더 남아 있습니다.
저희 질문에 계속 대답하시는 것은 무리가 되시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펜을 뾰족하게 깍고 나서 빨리 쓰시오." 그 형제는 성인이 지시하는 대로 했다.


오후 세시가 되자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옷장속에는 몇가지 선물, 후추가루, 수건 그리고 향이 있습니다.
빨리 달려가서 우리 수도원의 사제들을 모시고 오십시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은 비록 적은 것이지만 그분들게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사제들이 왔을 때 모두 모아 놓고 말씀하면서 각개인에게 자기를 위하여 미사와 기도를 바쳐 달라고 권고하며 간청했다.
그들은 기꺼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그들의 얼굴을 이 세상에서 얼마 더 보지 못할 것같이 생각된다고 말했을 때 형제들은 모두 큰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다음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모두 기뻐했다.
"나를 지으신 분의 마음에 드신다면, 지금 이 시간이 내가 존재하기 전 무로부터 나를 지어내신 분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나는 오래 살아왔고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는 내 일생을 당신 섭리로써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내 몸이 해체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내 영혼은 영광 속에 나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감화를 주는 다른 여러 가지 말씀을 하면서 저녁이 될 때까지 이날을 기쁘게 보냈다.


내가 이미 말했던 윌버트라는 젊은 형제가 다시 "스승님, 아직도 쓰지 못한 문장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 그 문장을 빨리 쓰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젊은 형제가 "이제 다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스승은 " 그 말이 맞습니다. 다 되었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손으로 내 머리를 받쳐 주시오.
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즐겨 기도했던 성당을 향해 기대어 앉기를 정말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바닥에 누워 영광송을 외우기 시작하여 "성신께"를 외울 때는 숨을 거두었다.
그가 항상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그토록 노력한 것을 생각하면 자기가 그리워하던 천국의 기쁨으로 틀림없이 옮겨 갔다고 우리는 믿는다.
(가톨릭홈에서)






성 베다 사제의 「루가 복음 주해」에서
(Lib. 1,46-55: CCL 120,37-39)  


성모 찬송가


"그리고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이 그다지도 엄청난 전대 미문의 은총으로 나를 높여주셨기에 어떤 말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고
또한 마음의 가장 깊숙한 정감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영혼의 힘을 다 합쳐 감사와 찬미를 바치는 데 모두 소모해 버립니다.
내 모든 삶과 모든 정감과 모든 이해력으로 감사와 찬미 가운데 끝없으신 그분의 위대함을 관조합니다.
나의 태중에 시간 안에 육신으로 잉태된 구세주 예수님의 영원한 신성을 보고 내 영혼은 기쁨 속에 즐겨 뛰놉니다.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마리아는 여기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나이다." 라는
찬가의 시작 부분을 되돌아보시고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이 위대한 일을 해주시는 영혼만이 마땅한 찬송으로 주님을 찬미할 수 있고
그와 함께 구원의 약속을 받은 이들에게 함께 찬송하라고 다음과 같이 응당히 요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주님을 찬송하라. 우리 함께 그 이름을 높여 드리자."


자기가 알고 있는 주님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찬송하는 것과 그분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분은 당신이 지니신 유일하고도 가장 큰 능력으로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시고 당신이 지어내신 만물에서 멀리 떨어져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이스라엘은 내 종이기에 나는 그를 사랑했노라." 는 호세아서의 말씀에 따라
주님은 복종 잘하고 겸손한 이스라엘을 구하시고자 뽑으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이스라엘을 아름다운 말로 "주님의 종" 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을 낮추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고, 예언자와 더불어 "보라, 주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도다."
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라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하여 영원히 우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
마리아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이 아닌 영신적 후손을 말해 줍니다.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육신을 따라 내려오는 할례를 받은 이들만이 아니라 할례를 안 받았어도 아브라함의 신앙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할례를 받기 전에 믿어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따라서 구세주의 오심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즉 약속의 자녀들에게 약속되었습니다.
그들에 대해 바울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


주님의 어머니도 요한의 어머니도 자기 자녀들의 탄생을 예언 중에 미리 전하는 것은 옳습니다.
죄가 여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축복도 여인으로부터 비롯되고,
한 여인이 속임을 당해 잃어버린 그 생명이 서로 다투듯이 예언하는 이 두 여인으로 인해 되찾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홈에서)






베다는 살아 있을 때부터 공경을 받기 시작한 몇 안되는 성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는 신앙과 학식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공의회는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도 교회 안에서 그 책들을 공적으로 읽도록 지시할 정도였다.
베다는 어린 나이에 자로우의 성베네딕토 수도원 원장의 보호에 맡겨졌다.
학덕과 성덕을 겸비한 수도자들의 가르침을 받게 된것은 이 천재에게는 행운이었으며,
따라서 그가 성인이 되고 뛰어난 학자, 어쩌면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당시의 모든 학문 즉 자연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원리,천문학,산수,문법,교회사,성인들의 생애,
그리고 특별히 성서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다.


30세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19세에 부제품을 받음-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배우고 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필사(筆寫)한 수 많은 책 외에도 자신이 직접 45권이나 되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 30권은 성서 주석에 대한 것이다.


왕과 다른 귀족들, 심지어는 교황 세르지오 1세까지도 열심히 그를 찾아왔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의 수도원에 계속 머물러 있고자 했다.
단 한 번 그는 요크의 대주교가 운영하는 학교에 가르치러 가기 위해 몇 달 동안 수도원을 떠난 적이 있었다.


베다는 그가 좋아하는 기도인 영광송을 바치면서 735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의 ’교회사’는 저술 역사의 기술과 학문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죽었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황금시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그는 서방의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벗어난 북쪽의 야만족들에게 적응할 준비를 하던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적응의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베다는 교회 생활에 있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베다의 ’교회사’는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지만 다른 모든 학문,
특히 성서에 관한 그의 저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사순절에 그는 성요한의 복음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고 죽는 날까지 그것을 보충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나누어 주는"이 저서는 오늘날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베다의 그리스도교인다운 생활과 죽음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모든 발견들은 그 정도인 것처럼 보인다."(’교회사’의 편집인 C.플뤼머)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웨어마우스에서 태어난 그는 성 베네딕도 비스코프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영국 쟈로우이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을 그곳에서 자신이 표현한대로 "신성을 찬양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지냈다.
자연주의자이며 역사학자, 시인이었던 그는 또한 훌륭한 신학자였다.


간단한 설교로써 성서를 쉽고도 감동적으로 깨닫게 하였다.
그분의 시 중에서는 동정녀 성 마리아를 찬양하는 매우 아름다운 시가 몇 편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며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다니 12,3).
이 구역의 예언은 성 베다에 대해서도 적용될 것이다.
그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자로서 4세기부터 5세에 결쳐 게르만 민족이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 침입해
찬란한 문화의 꽃을 뿌리 채 멸망시키려고 했을 때 이를 보호해
뒷날 서양 문명의 귀중한 모태가 되도록 한 것은 주로 그의 공로 덕분이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의 신학과 기타 일반 학문의 방면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672년 영국 웨어마우스 쟈로우의 세인트 피터와 세인트 폴 수도원 근처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이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베네딕토 비스콥 원장과 체오프리드의 지도 아래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베다는 매우 급속히 지식이 진보해 교사인 수사까지 놀라게 했으나
그의 경건한 신심도 이에 못지 않게 뛰어나 모든 덕을 닦는데 극히 열심했다.
이리하여 19세로서 일찍이 부제가 되고 나서 신학 연구에 전념하기 11년만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나
 그 뒤에도 연구를 계속해 마침내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성인이라는 평판은 이미 그 수도원에서부터 영국 전토에 퍼져 주교, 국왕과 같은 권력자도 그와 교제하며
그의 예지와 덕행의 빛이 충만한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더욱이 그의 말이 일층 더 권위를 지니게 한 것은 그의 성스러운 생활인데, 일반 사제, 수도자들도
그의 고결한 모범을 우러러보고서는 엄숙히 정장을 하고, 스스로 반성해 개과천선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St. Bede, Benedictine, Doctor


성인이 무엇보다 힘을 쓴 것은 성서 지식의 보급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보급을 위해 거의 모든 성서의 주해서를 저술했다.
또한 여력을 기울여 물리, 천문, 식물 등의 방면에서도 박학한 지식을 쌓아 많은 저서를 발간했고,
동양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도 크게 공헌한 바 있었다.
이상을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베다는 직접 선교 사업으로 진리를 수많은 나라에 전한
성 보니파시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와는 달리 주로 문필로써 사람들 사이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끊임없는 노고 때문이었는지 위의 질병과 호흡 곤란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담당하고 있던 신학생에게 하는 강의를 중단하지 않고
공동 기도에도 출석할 뿐 아니라 한밤중에도 다윗의 시편을 외우며 주님께 기도드린 때가 많았다고 한다.
병약의 몸인 그가 주님께 불리어 그의 찬란한 공적의 보수를 받기 위해 천국으로 떠난 것은 735년 5월 26일 마침 주님 승천 축일이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했으며 영국사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교회 박사로 선언했고,
성 보니파시오는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우리 스승이신 복자 베다’라 했다.
그는 단테의 천국 편에 나오는 유일한 영국인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축일:6월5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축일:12월3일.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 축일:7월14일.






St. Bede’s Tomb
Photo ⓒ The Dean and Chapter, Durham Cathedral.


시편 제 103 (102)편1)


[다윗]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라. <104,1.35>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라.
그분께서 해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130,8>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41; 출애 15,26; 욥 42,10>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내시고 <107,20>
자애와 자비로 네게 관을 씌우시는 분.
그분께서 네 한평생을2) 복으로 채워주시어
네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지는도다. <이사 40,31>
주님께서는 정의를 실천하시고
억눌린 이들 모두에게 공정을 베푸시는도다. <146,7>
당신의 길을 모세에게,
당신의 업적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리셨도다. <로마 3,2>
주님께서는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86,15; 145,8; 출애 34,6-7; 야고 5,11>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는도다.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며 <이사 57,16; 예레 3,12; 에제 20,44; 요엘 2,13; 요나 4,2>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시는도다.
오히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그분의 자애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에 굳세도다. <36,6; 47,2; 이사 55,9>
해뜨는 데가 해지는 데서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하시는도다. <미가 7,19>
아비가 자식들을 가엾이 여기듯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시니 <145,9; 예레 31,20>
우리의 됨됨이를3) 아시고 <욥 10,9>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 <90,3>
사람이란 그 세월4) 풀과 같아 <90,5-6; 102,12; 이사 40,6-7>
들의 꽃처럼 피어나지만
바람이 그를 스치면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아내지 못하는도다. <90,6; 욥 7,10; 8,18>
그러나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100,5; 출애 20,6; 루가 1,50>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에 머무르고
당신의 정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당신의 계약을 지키는 이들에게 <신명 33,9>
당신의 규정을 기억하여 실천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하늘에 당신 어좌를 든든히 세우시고 <11,4>
그분의 왕권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도다. <22,29>
주님을 찬미하라, 그분의 천사들아
그분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힘센 용사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그분의 모든 군대들아 <148,2>
그분 뜻을 실천하는 신하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그분의 모든 조물들아, <145,10>
그분 왕국의 모든 곳에서.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라. <다니 3,57>


1. 시편 103은 ‘개인 감사시편’의 요소가 들어있는 ‘찬양시편’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감사 찬양시편’이라 부르기도 한다. 입문 4, (1)의 (가)와 (2)의 (다) 참조.
2.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본디 ‘치장, 장신구’를 뜻하는 낱말이지만, 여기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칠십인역은 “원의”, 시리아어역은 “몸”, 아퀼라와 예로니모는 “치장”, 타르굼은 “노년”으로 옮긴다.
3. 이 낱말은 (2행의 “티끌”도 참조) 창세 2,7에 묘사된 하느님의 창조를 상기시킨다.
4. 직역: “그의 날들.”  
(새번역성서. 가톨릭홈.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