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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 19주간 목요일 / 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18,21-19,1: 매정한 종의 비유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여섯이라는 수는 창조 활동을 암시하므로 수고와 노동으로 가득함을 의미하지만, 일곱에는 용서를 가리키는 휴식의 의미가 있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일흔일곱이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주어진 용서를 모든 세대가 다 받았음을 의미한다. “일흔일곱 번”이란 무슨 의미인가? 루카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의 족보를 역으로 기록하였다. 루카가 꼽은 세대는 바로 일흔일곱 세대이다(루카 3,23-38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세대를 모두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그만큼 모두 용서해야 한다.

 

복음에서 한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일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다.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26절) 이 말씀은 종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종은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26절). 주인은 종이 청한 것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주인은 그 종이 이 일을 통해서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또한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용서를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

 

이 용서의 조건은 우리 동료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백 데나리온이란 사소한 잘못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은 자기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도 같은 벌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을 갚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는 그 종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랑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 가혹한 벌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주인이 종에게 자신과 가족을 팔라고 했을 때, 분노에 찬 말은 아니었다. 자비의 순간이었다. 그때 주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은 분노와 처벌과 응징이 담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사악하고 악독한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