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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6주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창세18,1-10ㄴ/콜로1,24-28/루카10,38-42)

 

제1독서

<나리,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18,1-10ㄴ
그 무렵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이제는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1,24-28
형제 여러분, 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7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를 "좋은 몫"(루카 10,42)으로 초대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일화는 활동과 관상의 비교 관점에서 교회 역사 내내 논란을 선사했고 여전히 끝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활동과 관상의 우열을 가리려는 낡고 소모적인 논쟁은 양편 모두 자기 소명에 대해 의구심이나 편협한 우월감을 갖게 만들어 통합적 영성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할 뿐이지요.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오늘 복음 대목은 마르타의 적극적 환대에서 시작됩니다. 현대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낮고 발언권도 없었던 과거 중동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마르타가 미혼 여성이라면 그의 아버지나 오빠가, 기혼 여성이라면 그녀의 남편이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관습상 자연스러웠을 텐데, 루카 복음사가는 별다른 배경 설명 없이 마르타가 주도한 초대 행위를 언급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직관력과 자기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진취성, 서슴치 않고 낯선 그분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용기를 지닌 여성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동생 마리아의 태도가 흥겹고 화기애애해야 할 손님 접대 현장에 찬물을 끼얹는 갈등의 발화점이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런 줄도 모르고 주님 발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발치!"
한 인간에게서 이만큼 가깝고 또 겸손한 거리의 자리가 또 있을까요? 어딘가에 걸터앉거나 바닥에 앉아서 말씀하시는 분의 발치라면 그분 바로 앞, 그분 발에 닿을락 말락한 곳, 그분 음성이 직접 귀에 꽃히는 위치일 겁니다. 말씀의 파장은 공기를 가르며 가장 가까이에서 듣는 이의 귀를 관통해 들어와 마음까지 관통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습니다. 안주인인 언니를 도와 손님을 접대해야 한다는 의무도 까마득히 잊고 말았습니다.

"주님, ... 보고만 계십니까? ... 도우라고 ...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정말 바쁠 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고 하지요. 귀한 손님을 대접하느라 혼자 동분서주하며 땀을 뻘뻘 흘리던 마르타가 급기야 예수님께 자신의 요구를 피력합니다. 질책과 명령까지 넌지시 섞어서요. 자청해서 맞아 들인 분께 원망의 기색까지 흘리는 걸 보면 정말 힘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루카 10,42) 그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료합니다. 주님 앞에 머물러 말씀을 듣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하십니다. 허기지고 피곤하셨을 예수님과 그 일행의 육적 필요에 마음을 기울이며 애쓴 마르타의 노고도 참 귀하고 고맙지만, 설령 당장 굶는다 해도 지금 이 자리에 말씀이 현존하시니, 혹여 나중에 대접이 소홀했다고 뒷말이 나온다 해도, 영혼의 양식이 차고 넘치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를 놓치는 것만큼 아까운 손실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마음속 외침을 대신 답으로 전하십니다. 논란의 주인공이 된 마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녀의 생각, 굳은 의지를 아셨을까요? 서로 마주보며 머무르는 사이, 한 쪽은 말하고 한 쪽은 듣는 동안, 음성으로 말하는 이는 침묵하며 듣고 있는 이의 마음 속에서 공명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은 당신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마음을 듣고 아십니다. 말씀 안에 머무를 때 말씀과 나, 서로에게 일어나는 신비입니다.

제1독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천사 일행을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물과 양식이 귀하고 듵짐승이나 자연재해의 위험에 쉽게 노출된 고대 사막 지대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주인과 나그네 양편 모두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품위를 높여주는 동시에, 무엇보다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는 매우 중요한 관습이었습니다.

"고운 밀가루,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엉긴 젖, 우유..."(창세 18,6-7) 아브라함이 서둘러 구체적으로 지시한 접대 양식들은 당시 환경에서 볼 때 최고급 재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군지도 모르는 나그네에게 이처럼 후한 온정을 베풀지만, 음식 장만과 대접으로 주인의 역할을 끝내지 않습니다.

"그들이 먹는 동안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창세 18,8) 먹을 것, 쉴 자리를 나누는 것만으로 최대의 호의가 될 수 있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 앞에 머무르면서 필요를 살피고 응대하는 겸손한 집중이 때론 초대를 더욱 빛나고 가치롭게 완성합니다. 노동력과 시간, 재화에 그치지 않고 눈과 귀, 마음까지 내어주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오늘 대목의 아브라함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역할을 모두 수행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아들의 탄생 예고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앞두고 하느님께서 그를 믿고 당신 마음을 열어보이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치열하게 마음과 생각을 나누며 반복해 청하고 응답을 받은 그 모든 과정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지고의 신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말씀은 ...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 그 신비는 그리스도이십니다."(콜로 1,26-2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과거에 "신비"로 감추어져 있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말씀이 예언자나 임금 등 일부 계층에게만 전달되는, 마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습니다. 일반 백성은 예언자를 통해 말씀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 존재와 말씀은 직접 닿을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었지요. 그런데 말씀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신약 시대에는 그 "신비"가 드러나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됩니다.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예전에는 "신비"라 감히 근접 못 했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는 어느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모든 이가 말씀에 머물도록 초대된 것입니다.

온 인류에게 그리스도가 계시된 이상, 말씀은 어느 신분에 국한하여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지식적으로 말씀에 접근하는 학문적 경로와 자격은 존재할지 몰라도 그것이 꼭 말씀과의 친밀한 거리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향유하는 축복, 그분 신비 안으로 흡수되는 은총은 역할이나 신분이 아니라 한 영혼의 들음, 머무름, 갈망, 사랑에 달렸습니다. 주님 발치에 겸손히 머물며 귀와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이를 향해 불타오르는 영혼에게, 그가 대단한 학설을 몰라도, 엄청난 재력이나 능력이 없어도 말씀께서 겸손히 당신을 낮추어 다가오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 영혼은 절대로 "그것을 빼앗기지 앓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마주하며 말씀을 듣고 사랑을 나누도록 이 모든 장을 마련해 준 이는 예수님을 모셔 들인 마르타라는 사실입니다. 그 역시 우선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능력 출중하고 용기 있고 멋진 그녀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고자 한다면 길은 명료할 겁니다. 이제는 마르타 자신이, 자기가 열어준 장의 내적 주인공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깊이 깊이 말씀 속으로... 마르타 정도의 저력이면 못 할 것도 없습니다. 듣고 머무르고 갈망하고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말씀은 열려 계시니까요. 우리 모두가 말씀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농민은 농작물의 모든 소리를 듣습니다. 또 농작물은 주인인 농민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요. 이런 사랑과 관심이 농작물을 키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농민들의 들음과 흘린 땀이 풍성한 수확으로 보답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축복하고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