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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7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제1독서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25,1.8-17
1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11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12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서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파는 것이다.
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마태오 복음 14장으로 넘어가면서 구약과 신약을 잇는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비보를 접합니다. 이 대목은 어쩌면 바로 앞 13장의 마지막 부분이자 우리가 어제 묵상한,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이야기에 상응하는 듯합니다. 이 모습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하느님 사람들, 예언자들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마태 14,2)
겁에 질린 헤로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지혜가 충만하고 기적까지 베푼다는 한 예언자(예수)에 대한 소문에 그가 기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군중이 예언자로 여기는 요한을 헤로데가 자기 치부를 덮으려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왕명에 의한 죽음이라 마치 사형과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상은 권력자의 무도하고 비겁한 사욕에 의한 살인이었지요.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의 환생이라 여기는 헤로데의 이 오해는 자기 죄에서 옵니다. 양심에 드리운 그늘이 그를 죄의식 안에 가두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요한은 고행과 설교, 세례를 행했을 뿐 기적은 일으키지 않았는데도(요한 10,41 참조) 예수님의 기적을 요한의 힘과 연결시키는 걸 보면 두려움이 그의 내면에서 왜곡과 착각까지 일으킨 듯합니다. 궁에서 온갖 영화에 둘러싸여 산다 해도 영혼은 죄에 묶이고 상처 난 양심에 갇힌 듯 보입니다. 스스로의 죄가 자기를 고발하기에 그렇습니다.

같은 내용의 병행구인 마르코 복음(마르 6,17-29)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다소 장황한 수식어와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가 정말 원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인 듯 헤로데의 고뇌마저 느껴지지요. 하지만 마태오 복음사가는 냉정하리만치 담담히 골자만을 기술하여 그 판단을 독자에게 넘깁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경솔한 맹세, 손님들의 이목을 앞세워 불의를 저지릅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보다 중요했나 봅니다. 한때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지"(마르 6,20)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상들과 다를 바 없이 예언자의 박해자, 살해범이 되어 버립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일로 시작된 불씨가 끝간 데 없는 죄악의 폭주로 치닫게 된 셈입니다. 안타깝게도 양심의 소리는 그를 정의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복음의 분위기와 사뭇 다릅니다. 바로 기쁨 가득한 "희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정하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 골고루 나누어 받은 재산(땅)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의 사정에 의해 처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견하신 듯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더 확실히 체험하고 있듯이 부의 편중 현상은 권력과 지식의 불균형을 낳고, 이는 동족 간에 불평등과 착취, 억압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약자와 소수자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당한 채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게 되지요. 한 아버지 하느님의 같은 형제 자매로서의 대등하고 공평한 관계가 깨지면서 그 불의한 환경에 익숙해지면 사람에 대해 마땅히 지녀야 할 존중감도 희박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께 대한 경외감마저 사라지게 되지요.

하느님은 이를 바로잡을 기회를 미리 마련해 놓으신 겁니다. 그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부를 쌓은 이도, 다 잃어버린 이도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본래 하느님께서 주셨던 자리, 땅, 본연의 자녀된 존엄성을 되찾으라는 의미입니다. 잃었던 걸 되돌려 받는 이는 기쁠 것이고, 제 것처럼 소유했던 것을 내놓아야 하는 이에게도 양심의 자유와 기쁨을 선사하게 될 축복의 시간이지요.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은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다 함께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경외와 찬미와 순종을 드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모든 만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까요.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이런 희년 제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제 우리가 들은 나자렛 회당 사건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바가 바로 이 "희년"이었는데(루카 4,16-30), 루카와 달리 마태오는 편집 의도 상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 희년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죄의 빚을 탕감해 주고, 질병과 죽음에서 일으키며, 잡혀가고 갇힌 이들을 해방하는 일, 억압과 착취에서 구해내고 죄로 짓눌린 양심의 무게를 덜어 주는 일, 자기 본연의 자리와 영혼의 아름다운 본모습을 되찾아 주는 일, 눈물을 닦아 주고 어깨를 펴게 하며 무릎에 힘을 실어 주는 일, 죄의 짐을 벗고 하느님 앞에 맑고 밝게 서도록 깨끗이 해 주는 일... 굳이 50년을 세면서 기다리지 않아도 이 모든 기적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레위 25,17)
희년의 정신은 하느님을 경외함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뿌리에는 모든 이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이 자리합니다. 하느님께서 눈동자처럼 아끼시는 모든 이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새로 출발할 수 있게 기회와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합니다. 이미 무수한 예언자들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이 이러한 경외심의 절정을 보여주셨지요. 비록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악인의 비겁하고 치졸한 간계로 맞이한 죽음일망정, 모든 의인들의 죽음은 하느님께 소중하고 값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진정한 해방을 맛본 이는 누구일까요? 왕궁 안에서 두려움에 떨며 값싼 체면, 얕은 허세를 부여잡고 멈출 타이밍을 놓친 채 살아가는 헤로데가 아니라, 피로써 하느님 나라를 증거한 세례자 요한일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시는 희년의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하느님 자비와 용서의 품에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은총의 선물은 물론 죄와 약함의 짐까지도 다 내려놓고 오늘도 새로운 희년을 희년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살아갑시다. 매일이 희년인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