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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스라엘은 크게 패배하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겼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4,1ㄴ-11
그 무렵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려고 모여들었다.
1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러 나가 에벤 에제르에 진을 치고,
필리스티아인들은 아펙에 진을 쳤다.
2 필리스티아인들은 전열을 갖추고 이스라엘에게 맞섰다.
싸움이 커지면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배하였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벌판의 전선에서
이스라엘 군사를 사천 명가량이나 죽였다.
3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
4 그리하여 백성은 실로에 사람들을 보내어,
거기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왔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
5 주님의 계약 궤가 진영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은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을 올렸다.
6 필리스티아인들이 이 큰 함성을 듣고,
“히브리인들의 진영에서 저런 함성이 들리다니 무슨 까닭일까?” 하고 묻다가,
주님의 궤가 진영에 도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7 필리스티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하였다.
“그 진영에 신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망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는데.
8 우리는 망했다!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저 신은 광야에서 갖가지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을 친 신이 아니냐!
9 그러니 필리스티아인들아,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히브리인들이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가 그들을 섬기지 않으려거든,
사나이답게 싸워라.”
10 필리스티아인들이 이렇게 싸우자,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11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청합니다.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그로서는 큰 용기를 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하고자 하는' 의지가, '이루는' 능력과 하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을 예수님께 겸손히 의탁합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르 1,44).

그가 청한 대로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어 낫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의 의지와 행위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모두는 "선"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깨끗해진 그에게 침묵을 권하십니다. "말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기보다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권고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그러나 치유받은 그는 이 권고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지 본인 이야기를 들어봐야 정확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저 나름 인간적인 방식으로 예수님께 보답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사제에게 보여 깨끗해진 몸으로 공동체에 받아들여졌으니 굳이 더 소문낼 필요는 없었을 테고, 혹 이 기적으로 예수님께 더 큰 명예와 영광이 돌아가게 해드리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정말로 그게 예수님을 위하는 거라 여겼을 것 같습니다.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그 결과는 이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지나 부활까지 이르러야 성경에 기록된 진정한 메시아의 예언이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이 차원에서는 자칫 예수님이 기적이나 마술을 일으키는 신비가, 치유자 정도로 보이기 십상이지요. 이에 열광해 몰려드는 이들 역시 딱 그만큼이 필요한 이들입니다.

나병에서 치유된 이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자기 나름대로 "선"이라 여기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 활동에 제약을 초래하지요. 불순종과 활동 방해. 여기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그의 보답은 그리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5).

예수님이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실 수 없어 머무르신 "바깥 외딴곳"으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니, 이제 예수님 계신 곳이 중심이 됩니다. 세상의 중심이 경제와 종교, 문화가 융성한 고을 한복판이 아니라, 거기서 밀려난 변두리 인생들이 거하는 곳으로 이동된 셈이지요.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제자리는 예루살렘 성전 한가운데가 아니라 바깥 외딴곳입니다. 그분이 여기 계셔야 성전이나 성문 곁에 감히 얼씬도 못하는 가난하고 비참하고 죄인인 이들이 예수님을 쉬이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치유받은 이의 불순종이 꼭 부정적 결과를 낳은 것만은 아닌 것 같네요.

제1독서는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의 싸움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1사무 4,3).

패한 이스라엘은 패배의 원인에 대해 질문은 던지지만, 깊이 성찰하고 찾기보다 우선 계약 궤를 이 전장으로 모셔오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구원하시도록 합시다."는 말에서는 어째 주종이 뒤바뀐 듯한 냄새가 납니다. 마치 하느님이 그들의 명령을 들으셔야 할 것 같은 기세입니다.

"온 이스라엘은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을 올렸다"(1사무 4,5).

계약궤의 도착에 고무된 이스라엘은 적진에 들릴 정도로 함성을 지릅니다. 그런데 이 경솔한 함성이 적군의 결기를 돋구어, 죽기살기로 항전한 필리스티아에게 오히려 더 크게 패하게 되지요.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이십니다. 결코 우리 편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되실 수 없는 분이시지요. 하느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자신들의 패인을 살피지도 않은 이스라엘이 계약 궤를 이용해 승리를 얻으려 한 자체에서 이미 패배는 시작되었습니다. 기적은 바라는 이의 지향의 순수성에 상응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순수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1사무 4,10).

여기까지 보면 이런 비극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필리스티아에게 시달리며 고통을 겪어왔으니까요. 게다가 하느님 현존인 계약 궤마저 이방인 손에 넘어갔으니 이스라엘로서는 전부를 잃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엘리는 주님께서 사제로 선택하신 지파에서 난 사제이기에(1사무 2,28) 그의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 역시 사제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악행이 너무 심하여 하느님께서 이미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셨지요(1사무 2,11-36; 3,11-14 참조).

엘리의 두 사제 아들들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사무엘의 존재가 부각됩니다. 사무엘은 주님께서 "믿음직한 사제 하나를 일으키리니 그가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것"(1사무 2,35)이라 하신 인물이지만, 사실 에프라임 지파 출신으로 엄밀히 말하면 사제 가문인 레위 지파의 아론 가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고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행동하던 혼란한 판관 시대에, 엘리에게까지 이어진 세습 사제직이 하느님 선택에 의한 사제에게로 넘어간 것이지요.

계약 궤를 빼앗기고 사제마저 잃은 이 전쟁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방인에게까지 하느님의 권능을 알리고 사무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전역을 다스리면서 왕정 제도로 이어질 준비를 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인간의 눈에 보이는 끝이 결코 하느님 계획 안의 끝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벗님! 살다 보면 구비구비 여러 일들을 겪게 되지요. 우리 눈에는 딱 비극 같은데 어느 결에 좋은 열매가 맺히는 일도 있고, 분명 운수대통인 줄 알았는데 쓴 물만 삼키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팔랑팔랑 일희일비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너무도 무한하고 거대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가 고백할 건 그저 "무지"밖에 없을 듯합니다.

다만, 무지한 우리의 청이 합당하려면, 주님을 자기 복락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고 흠숭하기 위한, 그분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자, 주님은 나에게 수단입니까, 목적입니까? 답은 내 안에 있습니다.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