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마태 9,14-15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는 단식♣
오늘 제1독서의 저자인 제 3 이사야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을 향하여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하면서, 진실한 신심은 종교 행사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그 핵심이 된다고 말한다. 참된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 58,6-7)이다. 이처럼 사랑과 정의의 실천으로 표현되는 단식을 통해 우리 각자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상처가 곧바로 아물게 될 것이다.’(58,8) 단식은 사랑과 치유의 열쇠이다.
오늘 복음의 메세지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에게는 단식이 아니라 기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어 함께하는 시기는 인류의 혼인잔치 시기이며 제자들은 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현재적 시간이 결혼 잔치의 때로 연결되고 예수님의 선교 활동의 시기가 메시아적인 잔치로 제사된다. 그러나 신랑이 떠날 때가 올 터인데 그때는 슬픔 때문에 단식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마태 9,15). 우리가 단식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나 자신과 교회와 사회가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함을 애통해 하며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과의 별거, 하느님의 부재의 때이지 않은가!
단식은 무엇인가? 단식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에 대한 슬픔의 표시로 행해진다 해도 결코 나의 공적(功績)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단식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며, 동시에 고요함의 가능성을 자신에게 허락하는 인간의 자연적이며 순수한 표현이다. 이런 고요함 가운데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선사받기 위해 마음을 열어놓는 것이 바로 단식이다. 단식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있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절제이다. 단식은 육의 정신과 성향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을 마음과 혼 안에 모시는 것이다. 단식이란 새로운 탄생이며 새로운 일치이며 회심이다. “우리 영혼을 단식으로 희생제물을 만들어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의 강론)
단식은 나눔의 몸짓으로서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한 생명의 용트림이요 사랑과 정의의 몸짓이다. 단식은 이웃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며, 자신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나, 이웃과의 만남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단식에는 형식이나 꼴이 아니라 하느님의 얼에 따른 의로움과 사랑이 표현되어야 한다. 단식은 우리를 괴롭히는 구속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며 하느님 나라로 문을 열어준다. 하느님께서는 단식을 통하여 선으로 초대하시고, 영혼을 드높여 주시며, 덕행을 넓혀주신다. 단식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단식은 어떤 자세로 하는 것이 좋을까? 무엇보다도 단식은 자발적으로, 마음의 집착을 끊어버리고 진심으로 해야 한다. 단식은 단순한 희생이나 극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심이 되어야 한다. 단식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 안에서 일치되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만 하여야 한다. 특히 단식은 음식의 절제만이 아니라 나의 악습과 세속적인 경향, 육의 정신을 끊어버리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울러 단식은 일시적인 통과의례에 그치지 않도록 항구하게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진실하고 순수한 단식을 통하여 내 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는(이사 58,8) 영적 환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을 비우고, 끊고, 채우고 나누고 있는가? 단식해야 할 나의 악습과 육의 정신, 사회적 무관심 덩어리는 무엇인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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