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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스테파노) 신부님 말씀 강

~ 사순 제 3주간 화요일 / 양승국 신부님 ~

2024년 3월 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저 밥먹듯이 용서하십시오!


복음서는 온통 하느님 아버지의 흘러넘치는 자비와 우리를 향한 측량할 수 없는 너그러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무거운 죄와 악습, 치명적인 실수와 허물이 떠올라 괴로울 때마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는 즉시 복음서를 펼쳐 드는 일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와 관련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공동생활을 시작한 베드로였습니다.


성장 배경이나 출신 성분이며 모든 것이 다른 사도들이 함께 동고동락하다 보니, 너무나도 당연히 충돌할 일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공동체 역시 우리와 비슷한 공동체였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삐그덕거렸을 것입니다.


더구나 수제자로서 사도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던 베드로는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유난히 미운 마음이 드는 사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컸던 베드로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나름 고민한 흔적이 있습니다. 마음 크게 먹고 심호흡도 한 후,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 사도를 뒤로 나가떨어지게 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곱이란 숫자는 충만함, 완전함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니!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씀은 결국 용서니 뭐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냥 습관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삼시 세끼 밥 먹듯이 틈만 나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면 깊숙이 차곡차곡 쌓아둘 때, 우리 영혼과 육신에 끼치는 악영향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한두 번, 일곱 여덟 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수시로, 숨쉬듯이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를 통해 충만한 대자유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차곡차곡 쌓아둠을 통해 혹독한 고통 속에 살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양승국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