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찬선(레오나르도) OFM

~ 연중 제 10주간 수요일 - 하느님 없는 황홀경 / 김찬선 신부님 ~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오늘 독서는 카르멜산에서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입니다.

누구의 신이 응답하는지 그것을 놓고 대결하는데

그 과정에서 거짓 예언자들이 예언 황홀경에 빠지지만 신의 응답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

 

이것을 보면서 저는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과 같은 경험을

우리도 하거나 하려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황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이 없는 꽃 감상을 하고,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하느님 찬미는 없고 꽃 감탄만 하는 일은 우리에게 많지요.

 

이것은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서 그리고 기도한다면서

하느님 없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부좌 틀고 관상 기도를 한다면서

실제로는 명상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에 그치거나

하느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그 목적인 기도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목적이 하느님 또는 이웃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라면 그것은 재물을 많이 달라고 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적인 기도이기에 당연히 사랑의 기도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시시하게 물질을 탐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탐욕인 황홀경을 기도 욕심으로 원할 수 있습니다.

 

황홀경을 다른 말로 하면 무아지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마약 중독자들도 원하는 황홀한 경지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황홀경을 탐할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했듯이 하느님과 이웃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원해야 할 것이고,

그랬을 경우,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아닌 크나큰 고통이 반대로 올 수도 있습니다.

 

성인들의 경우, 특히 프란치스코의 오상의 경우와 같이

너무나 사랑하여 기도할 경우, 주님의 상처를 같이 받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도 사랑하면 똑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기도라고 알려진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지요.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당신이 황송하옵게도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꿀과 같은 당신 사랑에 내 마음 달게 해주시고,

불과 같은 당신에 내 마음 뜨겁게 해주시어, 당신 사랑의 크신 힘으로

하늘 아래 있는 그 모든 것에서 저의 마음을 빼내어 차지하소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 주님을 사랑하듯이 지극한 사랑으로 기도하면

그의 고통을 내가 대신 느끼는 일도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의 고통이 내게 옮겨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고 신체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프란치스코처럼 이런 기도를 바치기까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거짓 예언자들처럼 고차원적인 욕심을 채우는 기도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