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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12주간 목요일 / 이영근 신부님 ~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4)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항상 이야기의 결말처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늘나라의 참 행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된 이 설교는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4)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리지는 나라’이기에, 당연히 자기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에게서 오신 외아들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과 그 실행방법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당신이 양식이다.’(요한 4,38 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직접 겟세마니에서는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잔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를 뒤집어쓰고 돌아가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외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곧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이요,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었습니다. 부당함을 당하고도 침묵으로 감싸주고, 그러고도 억울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신 까닭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마태 7,24)이라고 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가 진정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