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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13주일 / 이영근 신부님 ~

연중 제1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

 

 

오늘은 연중 13주일이며, 교황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작가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지혜 1,13)고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를 창조하셨음을 말하며, <창세기>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다.”(창세 1,27)는 말씀을 반향해줍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지혜 2,24)는 사실도 동시에 말하면서, 불멸의 상급을 받도록 종용합니다. 그래서 <지혜서>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멸은 하느님 가까이 있게 해 주는 것이다.”(지혜 6,19). “당신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입니다.”(지혜 15,3).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물질적 어려움에 닥쳐 있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을 독려하는 장면으로,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고 밝히십니다. 이는 물론 물질적 차원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가난을 말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를 물질적, 영적 이중적 의미로 확장해 어려움에 빠진 신자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복음>은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인물이 보여준 것은 ‘간절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열병 앓은 여인에게는 “딸아, 너의 믿음이 네를 구원하였다.”(마르 5,34)라고,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두 번째 것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단지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죽은 이도 살리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그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간청을 드립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 23)

 

 

 

회당장은 그야말로 전적인 신뢰의 자세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당신 말씀으로 창조하시되, 인간만은 당신 “손”으로 창조하셨듯이, 이제 당신 “손”을 얹으시어 딸을 치유하시어 다시 살게 해 달라고 간청입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이 애틋한 사랑과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도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 35)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가! 모든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사람에게는 도저히 희망을 걸 수 없어서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는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가 싶더니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참담한 순간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진정으로 응답해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도 마르타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믿는다면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 23-26 참조)

 

 

 

그렇습니다. 죽음의 이 순간이, 바로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길러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생명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예,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11, 2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히로에게도 이 순간이, 병을 고쳐주실 분으로 믿었던 예수님을 이제는 나아가 이미 죽은 딸을 살려주실 분으로, 더 깊은 믿음을 끌어올리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고,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가 봅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 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가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이 밀려오는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 36)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지배하고 있던 자리를 예수님께서 지배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눈에 보이는 희망이 가라진 현실상황에서, 바로 그 상황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단지 지적인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기다리는 인격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일입니다. 이처럼, 회당장 야이로는 믿음으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야이로”라는 이름의 뜻대로, 곧 ‘주님께서 깨우치리라, 일으키리라’는 그 뜻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탈리다 쿰!”(마르 5,41), 이 말씀으로 일어나 걸어가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일어나 새 사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