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간 수요일 강론>(2024. 11. 27. 수)(루카 21,12-19)
복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2-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2-19).” 1) 여기서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더라도 굴하지 말고 신앙을 증언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을 증언할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일부러 박해를 일으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박해는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복음 선포를 방해하고, 신앙의 증언을 막으려고 하는 범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는 곧 기회다.” 같은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데, 예수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박해와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굴복하지 말고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위기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파됩니다.>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당시 신자들의 모습이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1ㄴㄷ.4).”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졌지만, 신자들은 숨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 일은, “박해 덕분에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된 일”이 아니라,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한 일”입니다.> 2)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는, “인간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마라.”입니다. <우리는 말재주가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증언해야 합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라는 말씀은, 어떤 특별한 말재주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도와주시겠다는 뜻입니다(마르 13,11). 따라서 이 말씀은, “너희가 ‘삶’으로 신앙을 증언한다면, 어떠한 적대자도 인간적인 언변이나 인간적인 지혜로는 너희의 증언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말’을 잘한다고 신앙을 더 잘 증언하는 것은 아니고, 복음 선포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답게 잘 사는 것, 그것이 곧 신앙을 증언하는 것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삶’이 안 되면 ‘말’에 힘이 없습니다. 또 만일에 신앙인의 ‘삶’과 ‘말’이 다르면, 그것은 ‘위선’이고, 그 경우에는 복음 선포도, 신앙의 증언도 모두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3)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는, “미움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과 초대교회 공동체가 처음부터 미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ㄴ-14).” 만일에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이라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있겠지만, 선교활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만일에 실제로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신앙인을 미워하고, 박해자들에게 넘기려고 한다면, 아예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종말이 다가올수록, 믿는 사람들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가 더욱더 멀어지면서 박해와 탄압이 심해질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4)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어떤 고난과 박해를 겪더라도 참고 견뎌라.”입니다. <신앙생활이 언제나 항상 고통만 있는 생활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인내해야 할 상황을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만일에 힘들 때에는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 때에나 편안할 때에나 변함없이, 꾸준히, 끝까지 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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