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간 목요일 강론>(2024. 11. 28. 목)(루카 21,20-28)
『종말이 어떤 날이 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0-28).” 1)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죄인들에게 멸망이 내릴 때 그 멸망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죄인들과 함께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천사들이 롯에게 한 말이 연상됩니다. “자, 이 성읍에 벌이 내릴 때 함께 휩쓸리지 않으려거든, 그대의 아내와 여기에 있는 두 딸을 데리고 어서 가시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 19,15.17).” ‘죄인이 아니어도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멸망을 당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세 18,25)” 의인과 죄인이 함께 있다면, 그 의인 덕분에 죄인이 멸망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생각이었는데,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은 죄인들과 함께 있다면 의인이라도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이 하는 말은 사실상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간청해서,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있다면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소돔을 파멸시키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얻어냈습니다(창세 18,32). 그런데 우리는 소돔에 ‘롯’ 외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어서 멸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라는 도시의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에 멸망이 내릴 것이라고 선포했는데도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자 화를 냈습니다(요나 3,10-4,1). 자기가 거짓 예언을 한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타이르셨습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 이 말씀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죄로 멸망에 휩쓸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니네베의 멸망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고, 하느님의 뜻은 니네베의 회개와 구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요나 예언자를 시켜서 멸망을 선포하게 하신 것은, 회개하도록 인도하신 일입니다. 3)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예수님 말씀도, 또 종말의 재앙들에 관한 말씀도,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도, 끝까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있을 때, 죄인들을 감화시키고 회개시켜서 함께 구원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의인들이 죄인들의 죄에 오염되어서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어떤 의인이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죄인들이 멸망을 당할 때 함께 휩쓸리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죄인이 아닌데도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아니라, 죄에 오염되어서 의인의 자격을 잃었기 때문에 당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의인들과 함께 있다가 구원받는 죄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죄인인데도 의인들 덕분에 운 좋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의인들의 인도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날이 나에게 ‘징벌의 날’이 될 것인지 ‘속량의(구원의) 날’이 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연중 제 34주간 목요일 / 전삼용 신부님 ~ (0) | 2024.11.28 |
---|---|
~ 연중 제 34주간 목요일 / 반영억 신부님 ~ (0) | 2024.11.28 |
~ 연중 제 34주간 수요일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 (0) | 2024.11.27 |
~ 연중 제 34주간 수요일 / 이수철 신부님 ~ (0) | 2024.11.27 |
~ 연중 제 34주간 수요일 / 조재형 신부님 ~ (0) | 2024.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