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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대림 4주간 화요일 /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2024년 12월 24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1972년, 철학자 휴버트 드 레이퍼스는 자신의 책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에서 컴퓨터에게 체스를 가르치려고 한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인간 초보 플레이어조차 이길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로는 주방 보조를 대체하는 것 정도로 멈출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이 예측이 틀린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방 보조는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직 아무리 정교한 로봇도 바쁜 레스토랑의 테이블에서 접시를 치우고, 식기 세척기 안에 깨지기 쉬운 접시와 유리컵을 넣고 꺼내는 데 필요한 복잡한 기술을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아시며,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길 따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종종 어떤 일을 행하는데 이렇게 될 것이라면서 수정하거나 멈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다양한 방법으로 이끄시는 그 손길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모든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게 됩니다. 갓 태어난 아들 세례자 요한을 안고서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에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판단했다가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에 대해 세속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돌잔치에서 아기의 미래를 예측해 보는 소소한 행사인 돌잡이가 있습니다. 엽전, 마패, 붓, 복주머니, 오방색지, 명주실, 바늘 쌈지 등이 준비됩니다. 이 중의 하나를 잡으면 아이의 미래가 보인다는 것이지요. 즉, 엽전을 잡으면 인생에 재물 운이 따른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준비된 이 모든 것은 세상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미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즈카르야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벙어리가 되는 하느님 체험을 통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노래합니다.

 

 

 

이제 오늘 밤이면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대림 시기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우리 역시 세상의 관점보다 하느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사람이나 사물이 아닌 목표에 의지하라(아인슈타인).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루카 1,67)

 

즈카르야의 예언은 찬미가다

믿음·경건·기도·단식·인내·정결·찬미 노래 등, 구약성경의 영적인 것들이 모두 신약성경에서 줄어들지 않고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오랜 침묵을 깨고 찬미가 형식으로 예언하는 것을 보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레메시아나의 니케타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엑카르트는 다른 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한다.

짤막한 이야기 한 토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추기경이 베르나르두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러자 베르나르두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무이십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방법 없이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길 없는 길이야말로 이유 없음이다. 이 영적인 터에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무 이유 없이 행하라. 무작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천국이나 영원한 행복과 같은 종교적인 목표를 없애는 데까지 확장된다. 우리의 바깥에 있는 목표룰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이분법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국과 영원한 생명이 이미 여기에 있음을 망각한 것이고, 우리가 이미 신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이 신적인 삶은 어떤 삶인가? 하느님은 어떻게 사는가? 신적인 삶은 이유 없이 사는 삶이다. 하느님은 “이유 없이” 산다 2(302)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올해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모든 이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 당신 나라에 들게 하소서. 그들이 당신 목소리를 듣고 평온히 응답하게 하소서. 그 누구도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당신을 만나뵙지 않게 하소서. 저희 모두 깨어 기도하며 기쁘게 그날을 기다리게 하소서. 예수님, 저를 비롯한 모든 이가 당신이 마태오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다리게 하소서.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4,45-51)

(이제 당신이 죽는 그 순간을 묵싱하며 주님의 손에 맡겨드리고 기도한다. 당신이 임종하는 순간 가까이 있게 될 사람들을 주님께 봉헌한다. 그리고 지금 서서히 죽어가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한다.)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