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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축일 / 정인준 신부님 ~

1월 25일 토요일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제1독서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2,3-16<또는 9,1-22>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8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9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15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사도 바오로의 삶을 묵상하면 많은 것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도 나타나지만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실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말씀,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넘기 힘든 산과 같았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사도 바오로는 태어나기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도 말하지만 자신은 유다인이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그야말로 자긍심이 대단했던 사람이고 유다교에 열성을 다해 충성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사도 22,3-5)

그렇게 자신에 차 있던 그가 다마스쿠스 부근에서 하늘에서 번쩍이는 빛을 받아 예수님을 체험하며 바닥에 엎어집니다. 그는 장님이 되고 주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마스쿠스에 가서 하나니아스를 만나면서 세례를 받고 이방인의 사도의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웃들을 쉽게 판단합니다. 그것도 자기 위주로 또 자신의 입맛대로 하기 때문에 그나마 객관성도 없습니다.

매일 우리가 착각이나 또는 실수로 내 이웃을 좋게 보다는 나쁘게 판단하고 또 내 판단이 맞다고 믿고 삽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넉넉하고 긍정적인 삶이 몸에 배이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험담, 또는 비방의 늪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반대로 내 이웃이 나를 좋게, 때로는 과장하게 판단하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는 흔한 농담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행기 태우지 마. 떨어질라.’ 아니면 ‘제 자리에 갖다 놓아줘.’

부정적으로 이웃이 나 자신에 대해서 헐뜯는 말을 한다고 해서 사실 슬퍼할 필요도 없고 누가 나를 더무니 없이 추겨 세운다고 우쭐 댈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정확하지가 않거나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바탕이 하느님이 아니고 일시적인 인간의 감정이나 경험을 갖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사실 주님 한 분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이고 복음을 실천한다는 교회에서도 사실 사도 바오로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를 않고 두려워했습니다.

인간사회의 판단이라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도 바오로를 미래의 모습까지 제대로 보시고 그를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늘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손에 우리를 맡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