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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바오로 미끼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이영근 신부님 ~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십니다.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복음 선포의 길’이 본질적으로 ‘함께 가는 길이요 여정’(시노달리따스, sinodalitas)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결국, ‘함께 가는 길’로의 초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견 받은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이며, 동시에 하느님과 함께 가는 길이며, 하느님께 함께 가는 길입니다. 복음으로 빛으로 함께 가는 길이며, 그분 영의 동행으로 함께 가는 길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들의 삶 자체, 그들이 살아가는 길 자체가 증거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가는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이는 오로지 당신께 의탁하고 당신께 신뢰를 두고 가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1코린 1,23)로 말입니다.

 

또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처신에 따르게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가 할 일이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는”(6,12-13) 것이며, 그 일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능력으로 일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제자임과 동시에 파견 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파견하신 그분께 매여 있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