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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막데부르크의 메흐틸드: 하느님의 힘은 사랑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2월 26일 수요일 (호명환 번역) 아홉 번째 주간: 라인랜드(독일)의 신비주의자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권능"으로서의 힘을 포기하십니다.

 

 

학자 웬디 팔리(Wendy Farley)는 라인랜드 신비주의자 막데부르크의 메흐틸드(Mechthild of Magdeburg)를 소개해 줍니다:

 

 

메흐틸드[1212-1282]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지만, 그녀의 이름을 보면 그녀가 슬라브인들의 지역에 가까운 독일어권 국경 지대인 막데부르크에서 삶의 대부분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거의 매일 성령의 "인사"를 받기 시작했던 것은 열두 살인 어린 아이였을 때입니다. 스무살이 되던 무렵 젊은 메히틸드는 막데부르크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녀가 알았던 유일한 사람은 어떤 도미니코회 수사였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온 삶을 베귄(13-16세기에 금욕적 삶을 살면서 자선 행위를 실천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던 여성 공동체 회원)으로 살았습니다.... 메흐틸드가 쓴 아름답고도 과감한 내용을 담은 책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빛(The Flowing Light of the Godhead)는 중세 독일어로 쓰인 첫 번째 종교 작품입니다. 그녀는 당시의 그곳 지방 언어로 글을 썼기에 그녀의 영적 여정과 신학 성찰이 당시 여성들과 평신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1]

 

 

팔리는 하느님의 힘에 대한 메흐틸드의 급진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말합니다:

 

 

메흐틸트 시대의 교회는 인간 사회의 계급적인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군주적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시작해서 교황과 주교, 사제, 봉주들, 봉주들에 속해 있던 봉신들, 그리고 가장(아버지)들 순으로 내려가는 계급적 권력 체제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시의 통치자들처럼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바라야 했고, 하느님의 징벌을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메흐틸드도 왕(여황제, 여왕 혹은 주군)과 같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사용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힘마저도 사랑의 한 형태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런 군주적 은유를 특별한 방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전능하심마저도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신성한 갈망과 연결되어 있는 하느님의 특별한 속성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메흐틸드에게는 하느님으로하여금 신성한 존재가 되게 하는 원천은 순전한 힘이 아닙니다. 그 원천은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과 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놀이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녀는 이 책의 저자가 하느님이라고 주장합니다. "나는 나의 힘 없음[unmaht] 안에서 힘을 만들었다[gemachet]. 왜냐하면 나는 인간에게 선물을 내려 주는 것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이것이 바로 신성한 하느님의 힘을 묘사하는 역설적인 방법입니다. 하느님마저도 하느님을 억누를 힘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물을 내려 주시는 것을 멈출 힘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면 권력으로서의 신성 자체를 파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와 마틴 루터와 같은 신학자들은 사랑과 정의 혹은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선택 의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겪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힘을 강압하는 능력 혹은 외부에 의해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흐틸드에게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이 순전한 전능성과 호환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은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권력"으로서의 힘을 포기하시는 분이십니다....

 

 

메흐틸드는 엄격한 정의를 요구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감옥에 갇혀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느님에게 그런 힘을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보다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런 종류의 힘이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의) 힘을 무기력하게 하고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인해 아버지 하느님은 인간에게 영원히 고통을 주시는 것을 포기하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더 심오하고 더 참된 힘이란 구원하고 치유하고 회복해 주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죄로 인해 짐승처럼 된 이들도 사랑의 일치로 돌려 주는 묘한 형태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느님의 신성한 힘은 언제나 세상적 권능을 떨쳐 버리는 사랑입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 남편 더그(Doug)는 뇌출혈을 일으킨 후 신체적으로 약해졌고, 말하는 것도 어눌해졌습니다. 그는 조용히 앉아서 고요한 기도를 하며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일종의 평화와 만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더그는 그의 삶 대부분을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데 할애하였습니다. 내과의사인 그는 누구도 그냥 돌려 보내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를 의사라고 부르지 말고 "더그"라고 부르라고 고집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다양한 배경과 종교 그리고 문화의 사람들이 수 백명 참석하였는데, 대개는 더그가 그들의 삶에 영향을 준 이들이었습니다. 신비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일부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더그는 그에 대한 대표적인 본보기일 것입니다.

 

—Ann F.

 

[1] Wendy Farley, The Thirst of God: Contemplating God’s Love with Three Women Mystics (Westminster Knox Press, 2015), 27, 28.

 

[2] Mechthild, prologue to The Flowing Light of the Godhead, trans. Frank Tobin (Paulist Press, 1998), 39.

 

[3] Farley, Thirst of God, 60, 61–6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ugustin Fernandez,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과 더불어 이 땅의 식물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우리도 이 위대한 신비로 들어가는 관문에 발을 들여 놓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