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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재의 수요일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재의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의 화와 슬픔을 존중합시다!

 

하느님의 숨

 

2025.03.04. 17:20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4일 화요일 (호명환 번역) 열 번째 주간: 존재들의 눈물

 

우리는 변화를 위해 노력할 때 슬픔을 느낍니다.

 

 

리처드 신부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치유를 가져다주는 화와 슬픔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에 대해 성찰합니다:

 

 

영적 지도는 물론이고 상담과 피정을 위해 일하면서 한 생애를 보낸 후 저는 분노가 대부분 무엇보다 먼저 깊은 슬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뉴 멕시코의 고스트 랜치(Ghost Ranch)라는 곳에서 남성 입문 의식을 지도할 때 이에 대해 언급하자 거기에 참석한 남성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얼굴이 창백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모두를 실망시키기도 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데, - 어린이들이 그러하듯 - 사람들, 특히 남성들 대부분은 화와 분노로 이런 실망과 상처에 대응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이는 방어적이고 반동적이며 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자세이기에, 종종 이런 자세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비통함과 보복의 악순환만을 만들어냅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히브리 예언자들은 슬픔과 화 사이의 심오한 연관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진리를 말하는 이들로 만들어 준 동기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불의와 억압, 그리고 잔혹한 전쟁에 대해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고, 심지어 덕으로까지 여겨졌는데, 특히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때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해지기 전까지만 분노하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에페 4,26). 만일 너무 오랫동안 분노와 노여움을 품고 있게 되면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전혀 새로운 곳에 그 상처를 전해 주면서 그것을 옳다고까지 여기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티스 모스 3세 목사(Rev. Dr. Otis Moss III)는 예언자들의 슬픔이 어떻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정의를 추구하도록 힘을 실어 주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 세상을 보면서 예언자들이 했던 것처럼 슬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심지어 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모습을 보면서 히브리 성경의 예언자들이 지녔던 영과 에너지를 견지한 채 슬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옛 스승들은 세상이 균형을 잃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듯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그들과 더불어 울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냉소주의와 증오, 그리고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변화를 위해 노력할 때 슬픔을 느낍니다.... 여기서 도전이 되는 것은 우리가 분노를 정당화할 때마저도 모욕을 모욕으로 갚고 악의를 악의로 갚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틴 루터 킹 박사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빛만이 그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언자들처럼 슬퍼할 때 우리는 소소한 것이든 파괴적인 것이든 상처나 화를 불러온 사람들의 영혼에 해를 가한 더 거대한 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 자신과 세상을 치유하게 됩니다. [1]

 

 

리처드 로어는 예수님을 예언자적 눈물의 모델로 여깁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존재는 눈물을 지니고 있고, 존재들 대부분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해방과 우리의 환상으로부터의 구원의 한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화가 무엇보다 먼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너무 깊이 들어 있어 찾아내기 어려운 슬픔의 표현으로 인지되어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하며 - 심지어는 사랑받기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 - 을 알았고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마저도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고(루카 19,41), 당신 친구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5). 그분은 게세마니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크나큰 "슬픔과... 고뇌"를 겪으실 때(마태 26,37), 그분에게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루카 22,44).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제 에고의 분노로 가득 찰 때 제 내면에서 울 수 있는 공간을 찾습니다. 눈물이 나오게 되면 그 눈물이 저로 하여금 화와 노여움, 그리고 두려움을 거쳐 해방에 이르게 해 줍니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내려놓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에게 마음으로부터 말하고 배울 공동체의 공간을 마련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Claire H.

 

[1] Otis Moss III, Dancing in the Darkness: Spiritual Lessons for Thriving in Turbulent Times (Simon and Schuster, 2023), 74, 76.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Prophetic Wisdom for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2025), 4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Noé Barnett, Untitled (detail), 2024, oil paint,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노에 바넷(Noe Barnett)이 그린 위 그림의 이미지가 리처드 로어의 책 존재들의 눈물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엄청나게 다정다감하고 엄청난 배려심으로 눈물 한 방울을 붙들고 있는 저 손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