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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사순 제 1주간 화요일 /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사순 제1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9-10)

 

교회는 믿음의 어머니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말씀하신 적이 무척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그분 말고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마태 23,9 참조)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기도할 때, 우리는 이 명령을 따릅니다. 아버지를 알아보는 이들은 복됩니다! 성령께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시고는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며, “내가 아들들을 기르고 키웠더니 그들은 도리어 나를 거역하였다”(이사 1,2)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느님이라고도 하니, 하느님 아버지라는 하나의 호칭에는 자식의 사랑과 그분의 권능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말은 아들을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머니 교회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의 뜻을 교회에서 배우는 만큼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어머니를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이 셜교에서, 엑카르트는 자신 역시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완전히 하느님 안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버렸기 때문이다. 고통을 버리는 또 다른 경험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고통을 떠맡게 하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무거운 짐을 하느님에게 내드리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단순한 위로자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떠넘기기만 하면 언제든지 고통과 아픔을 떠맡는 분이다. 엑카르트는 야훼를 이렇게 말하는 분으로 그렸다. “모세야 내가 화내는 것을 내버려 두어라. 나에게 이것을 승인하고 허락해 다오. 내가 화를 내어 백성에게 앙갚음하는 것을 허락해 다오.”

 

짐을 짊어지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 하느님을 위해서,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서만 고통을 겪고 싶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백성이 이제까지 겪었던 모든 고통과, 온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고, 고통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을 짊어지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347)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I. 성심을 둘러싼 가시관

 

두 번쩨 요점 - 자비의 관

 

성찰

구세주의 이마에 얹힌 자비의 관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다정한 관심이었습니다. 성심을 둘러싼 자비의 관은 우리의 슬픔에 대한 그분의 깊은 동정과 연민입니다.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예수님의 성심은 모든 비참함과 고통의 단계에 대해 가장 다정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히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동정적입니다.

 

적용

구세주의 사랑의 초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이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모든 슬픔, 시련, 고난 속에서 예수님의 성심에서 위로를 찾으십시오. 성심은 언제나 성체성사에서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며, 성체성사에서 당신의 위로와 지지가 되며, 성체성사의 거룩한 제사에서 당신의 죄를 위한 무한한 대속 제사가 되는 은총과 축복의 원천입니다.

 

애정과 결심

"주님, 당신 외에 제가 무엇이 있으며, 당신 외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세 번째 요점 - 정의의 관

 

성찰

그리스도의 머리에 얹힌 정의의 관은 최후 심판의 날에 그분께 가득하고 영광스럽게 보상될 것입니다. 성심에 얹힌 정의의 관은 그분의 수난 때 자신에게 가해진 비난과 모욕을 참으신 고요하고 꿋꿋한 인내입니다.

 

적용

과거에 예수님의 성심을 상하게 했던 모든 일들을 생각하며 내 삶의 작은 시련을 인내하도록 영감을 받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면, 나도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아무것도 참지 않으려 해야 할까요?

 

애정과 결심

불평하고 싶을 때, 당신의 죄와 그리스도께서 그 죄들 때문에 겪으신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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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1. 사순 제1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오늘 복음에는 기도의 방법이 전반에 설명돼 있습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50311. 01:14 ㅣNo.180652

 

 

 

오늘 복음의 구조를 보면 전반적인 기도의 개관 설명과 함께 이를 바탕으로 해서 주님의 기도를 예로 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설명해 주십니다. 원래는 주일복음만 간단하게 올리는 식으로 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냥 일단은 올리게 됐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번역이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저도 오늘 우연히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이것도 우연히 영어성경을 보고 엄청 고민을 해서 알아낸 사실입니다. 저는 이 부분은 언제 제가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있을 때 한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나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건 묵상이라기보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빈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잘못됐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이 번역 부분에 사용된 단어가 우리나라 말에 딱 떨어지는 말이 없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 내용을 너무 포괄적으로 광의적인 의미로 퉁쳐서 번역을 하면 실제 이게 이런 의미로 사용된 연유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도 알 수가 있지만 그냥 한글 성경만 본 사람은 이렇게 번역하면 완전 엉뚱하게 자의적인 해석을 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빈말이라는 뜻을 국어사전에 일단 정의된 뜻으로 이해를 해도 완전히 엉터리 번역입니다. 논리적으로도 그렇고 문맥상으로도 의미가 상이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사실관계만 여러분에게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참고하십시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게 더 중요한 의미일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에 이 부분에 해당하는 의미만 놓고 봤을 때 기도는 다음과 같이 하면 안 된다고 나옵니다. 두 가지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도 하나의 대화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또 혹은 뭔가 말을 해도 어리석은 판단이 들어가는 방식으로 말을 빨리하는 것 이것의 의미를 우리 성경에서는 그냥 빈말이라는 단어 하나에 함축시킨 것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럼 다시 역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기도의 요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말로서 한다는 전제 하에 천천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천천히' 라는 말은 실제 이 뜻의 의미도 맞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들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의미적으로 맞습니다. 또한 내용이 합리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사리에 맞는 이런 의미입니다. 사실 이런 의미를 한국어 단어 하나로 표현을 할 수 있는 단어를 찾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여기까지가 팩트입니다. 그럼 이 팩트를 기준으로 해서 마치 유권해석을 하듯이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여기서 기도의 상대방은 예수님이든지 하느님이 되실 것입니다. 근데 한 가지 의문점이 들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 보면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벌써 기도의 내용을 다 아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설령 우리가 중언부언해도 전지전능하신 분이 그 말의 의도를 모르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사람도 상대방이 어떤 표현을 그 사람이 표현능력이 없어서 개떡같이 말을 해도 듣는 청자가 똑똑하면 찰떡같이 해석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사람과 비교 그 자체를 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리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의 숨은 뜻은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요? 단적으로 말해서 기도는 첫째가 사리에 맞는 기도여야 하며 제딴에는 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진정한 의미의 기도인지도 모르고 내뱉는 말이 된다면 이땐 그게 정확한 자기의 뜻이 전달된 기도가 될 수 없을 겁니다. 기도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할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셔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도 다 아실 것이라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그런 의미로 말씀을 하셨다고 이해를 해야 합리적인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걸 다르게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 대상의 내용은 청자인 하느님이 아니시고 화자인 기도하는 본인 당사자가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사실 이 의미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난해한 내용일 수 있습니다. 제가 표현을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이렇게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의 생각입니다. 기도하는 그 내용 그 자체가 기도로서의 가치가 있어야 그게 기도가 되는 것이지 기도가 마치 뭔가를 주문하면 그 주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식으로 기도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오늘 복음과 같이 마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처럼 자꾸 조르고 조르면 귀찮아서라도 판결을 합리적으로 해서 요청을 들어주는 그런 내용으로 이해를 하면 안 된다는 걸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해석상 그렇게 이해를 해야 합리적인 판단이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오늘 복음 7절과 8절의 내용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사실에 근거해 저의 판단을 전해드리는 것입니다.

 

 

 

참고로 7절에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여기서 '들어 주시는' 이 의미는 어떤 부탁을 했을 때 그 부탁을 들어준다고 할 때 그 의미가 아님을 아셨으면 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단순히 아무 생각없이 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그 뜻이 아니고 단순히 어떤 소리라든지 하는 것을 듣는 순수한 청각적인 내용의 뜻이라는 걸 분명히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잘못 이해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 기도라는 것을 하는 이유는 부탁 같은 걸 하면 그 요청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의 의식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또 하나 아셔야 할 게 이런 의미로 사용할 때 국어 어문규정을 따르면 '들어주다'처럼 붙여서 써야 합니다. 만약 띄어쓰면 그냥 귀로 소리를 듣는 그 의미만 있습니다. 또한 이 의미로 사용하게 됐을 땐 붙여써도 되고 띄어쓰기를 해도 국어 어문규정에는 둘 다 허용합니다. 사실 이 의미까지는 말씀드리려고 하지 않았는데 오늘 번역의 오류인지 아닌지 그걸 고민하다 보니 실제 이것까지도 고민을 해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