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경의 명령!
하느님의 숨
2025.03.16. 16:14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16일 일요일 (호명환 번역) 열한 번째 주간: 낯선이를 환영하기
우리는 매일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사랑하기를 시작이라도 했는가?"
리처드 신부는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다른 이들, 특히 낯선이를 얼마나 제대로 사랑하는지에 대해 성찰하라고 초대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가 우리 시대의 여러 문제에 참여하는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또 그 방식을 변화시키기까지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종교라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참된 빛이 아닌 오직 우리 자신의 반사체만 볼 수 있는 불투명한 화면일 뿐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우리 중 누구도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어하지 않지만, (법과 규칙의 준수와 관련한) 종교의 높은 목표는 우리 모두를 불가피하게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로마 7,7-25에서 바오로가 이런 역설적인 현상을 설명하는데, 이를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법이나 규칙에 더 많은 신경을 쓰기보다) 우리는 매일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사랑하기를 시작이라도 했는가?"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자기 나라나 민족의 지배적인 집단의 문화적 편견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삶의 태도와 의식(consciousness)의 참된 변모를 드러내 주는 이들은 소수의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이는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 계급주의, 소비주의, 이민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 혜택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치유하고 외국인들을 찬양하던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에 기반을 둔 종교는 지배적인 것을 선택하는 식의 논리, 즉 대중심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혹자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 한 분이신 하느님의 동등한 자녀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와 계급 체제, 문화, 그리고 심지어 종교에 의해 생겨난 인위적인 경계들을 넘어서는 줄에 첫 번째로 서 있어야 하는데도, 우리는 그 줄의 늘 맨 꼴찌에 서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바를 정말로 우리가 믿는지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종교가 너무나 종종, 예수님께서 솔직 담백하게 가르치신 바와 같이 "자기를 버리는" 길(루카 9,23 참조)이 아닌 자기를 지키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1]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낯선이를 환영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우리 모두 집중해 봅시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아 주었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5-36). 우리 시대에 외국인들과 관련한 자선 행위는 어느 때보다 더 의미가 있고 또 필요합니다. 경제 위기와 무력 전쟁, 기후 변화 등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땅을 떠나 이주하게끔 합니다. 하지만 이주는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이는 인류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현상이 최근에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의식이나 기억이 부족한 탓입니다....
때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난민들과 이주민들을 돕고 돌보기 위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많은 남녀의 침묵의 노력이 본능적인 이기심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크나큰 함성으로 인해 가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경을 폐쇄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범죄적 인신매매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해결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연대입니다. 특히 외국인과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 전쟁과 기아, 폭력, 그리고 비인간적인 환경으로부터 도망 나오는 형제자매들을 환영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라면 자기들 땅과 가족과 일, 그리고 존엄성을 잃은 이들을 위한 충분한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있습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깊이 성찰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 사마리아 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가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낯선이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삶에서 악의적인 사람들과 불친절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쓰라린 경험을 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두려워하며 하느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대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 계속해서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동정심을 보일 수 있을까요?
—Shannon M.
[1] Adapted from Richard Rohr, “We Have Not Yet Begun to Love: Religion and Immigration,” Radical Grace 24, no. 4 (2011): 3.
[2] Pope Francis, “A Stranger and You Welcomed Me,” in A Stranger and You Welcomed Me: A Call to Mercy and Solidarity with Migrants and Refugees, ed. Robert Ellsberg (Orbis, 2018), 53, 54, 5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ucas Dalamarta, Untitled (detail), 2024,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알지 못하는 존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함께 나아가는 수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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