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함께 머물기를 선택한 룻!
하느님의 숨
2025.03.17. 16:43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17일 월요일 (호명환 번역) 열두 번째 주간: 낯선이를 환영하기
룻기는 국경을 넘어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입니다.
신학자 줄리아 램버트 포그(Julia Lambert Fogg)는 세대에 걸쳐 일어난 성경의 이주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룻기는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와 역시 남편을 잃은 며느리가 피를 나눈 친척은 아니었지만 함께 살아남기 위해 국경을 넘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룻은 며느리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마을로 최근에 이주해 온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난 모압족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와 약혼한 사람은 나오미의 아들로서 유다인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인종은 서로 달랐지만 룻은 이주해 온 유다인 남자에게 시집을 온 것입니다. 그녀는 다른 모압인 동서와 유다인 시동생, 그리고 유다인 시부모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여섯 명의 성인(成人)이 요즘 말로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산 것입니다: 네 명의 이주민과 혼인으로 연을 맺은 두 명의 그 지역 사람이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부부는 아이들을 갖기도 전에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생계를 부양해야 할 남편들이 병에 걸려 한 사람씩 차례로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이 가족에게 크나큰 타격이었습니다. - 룻의 남편과 시동생, 그리고 시아버지까기 모두 죽었으니까요.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이 세 명의 여인만 남았기에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압인들 지역에서 살아가야 할지? 아니면 이 두 명의 젊은 여인은 새로운 가족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해야 할지? 그리고 모압 지역에는 친척이 하나도 없고 사회 관계를 맺을 수도 없으며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아 결혼도 할 수 없었고 아이도 낳을 수 없었던 이 두 사람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누가 돌보아야 할지?
세 여인은 각자가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룻의 동서는 자기 아버지의 집, 즉 "자기 민족과 자기들의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룻 1,15). 그녀는 다시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을 것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유다에 있는 유다인 친척들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곳에는 재정적인 밑받침은 없더라도 적어도 사회적 관계망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여인, 즉 룻의 동서와 시어머니는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자기들의 사람들에게 돌아갔다는 점에서 비슷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가족들과 문화에 다시 흡수된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녀는 자기 고향인 모압을 떠나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유다 땅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룻은 이 여정을 위해 시어머니와 자기의 연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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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례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에 묻히렵니다.
(룻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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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존경받는 한 인물이 됩니다:
룻의 말은 역사를 통해 있어 온 수많은 이주민들의 결연한 마음을 잘 표현해 줍니다. 그녀는 자기 부모와 자기 동서, 자기 겨례를 남겨두고 떠납니다. 룻은 나오미가 고향인 유다 땅에서 유다인들 가운데서 자신의 가계를 다시 이어갈 수 있게끔 도와줍니다. 우리는 룻이 자기 남편을 통해 시어머니와 한 번 맺은 계약에 충실했다는 점과 시어머니의 하느님을 신뢰하기고 마음먹었다는 점,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룻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룻을 통해 다윗 왕과 나자렛 예수님을 포함한 여러 후손들을 나왔다는 점에서도 이 용기 있는 이주자, 룻을 기억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깊이 성찰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 사마리아 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가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낯선이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삶에서 악의적인 사람들과 불친절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쓰라린 경험을 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두려워하며 하느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대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 계속해서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동정심을 보일 수 있을까요?
—Shannon M.
Julia Lambert Fogg, Finding Jesus at the Border: Opening Our Hearts to the Stories of Our Immigrant Neighbors (Brazos Press, 2020), 78–7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ucas Dalamarta, Untitled (detail), 2024,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알지 못하는 존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함께 나아가는 수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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