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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ic Ko 신부님

~ 사순 제 2주간 목요일 /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자선을 베풀지 않은 부자

 

자주색 옷을 입은 그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저지른 유일한 악은 교만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자여, 그대 몸의 한 지체가 그대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서도 가없은 마음이 일지 않소? 그대 눈에 하느님의 율법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더라도, 최소한 그대 자신의 처지를 가련히 여기고 두려워할 일이오. 그대 신세가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오. 그대가 낭비하고 있는 것을 그대 지체한테 주시오. 그대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말이 아니오. 그대가 내버리는 것,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이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우리는 복음서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우물가에서 한 이방 여인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시던 상황입니다(요한 4,5 이하). 그 이방 여인은 자신의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진짜 메시아가 오셨다고 알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 동네에서 나와서, 그분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분을 뵈었기 때문이오(요한 4,42), 모든 피조물의 지식이나 여러분 자신의 지혜나 여러분의 모든 지식으로는 하느님을 신적인 방법으로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신적인 방법으로 알고자 한다면, 여러분의 지식이 순수한 무지가 되어야 할 것이고, 여러분 자신과 모든 피조물을 잊어야 할 것입니다.(354)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하얀 작은 무덤

 

그로부터 15년 후 1935년 9월 12일 알비야젤 가문에서 축복의 원천이라고 소중하게 공경해 오던 유해가 그 가문의 열렬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레이리아의 주교의 명으로 파티마의 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레이리아 주교는 이 유해를 맞이하기 위해 작은 흰 묘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 유해의 이장에 앞서 우렘의 묘지에서 관 뚜껑을 열어 보았을 때 참석자 모두는 여간 놀라지 않았다. 히야친따의 얼굴은 완전히 생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히야친따는 전염성 병으로 사망하였으므로 매장 규정에 따라 시신에 석회를 덮었기에 사람들의 놀람은 한층 더 컸던 것이다.

너무나 조심스럽게 관을 열었었기 때문에 몸 전체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부패를 면했는지 어쩐지를 미처 확인할 수도 없었다.

 

참석자는 천과 신심물을 작은 유해에 갖다 대고 판을 다시 덮은 후 장송 행렬은 파티마의 묘지를 향해 갔다.

행렬이라고 말을 했으나 네 대의 자동차 뿐이었다. 남작과 그의 아들은 영구차에 탔고 다음에는 흰 영대를 두른 두 분의 사제, 세번째와 네번째는 히야친따의 가족과 친척이 되는 여러 명의 부인들이 탔었다.

 

그 옛날 어린 죄수였던 히야친따는 다시 우렘 시가를 지나갔다. 이 시가는 지난 1917년 그러니까 18년 전의 그 옛날 광기 어린 과격 당원 군수가 어린이들의 충절을 꺾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해 고문을 했던 곳이었다. 이어 파티마의 언덕길을 올랐다.(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