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행복하다 -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을 보고 군중이 매우 놀라워하였다. 그 군중에서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라고 외친 것이다. 같은 여인으로서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가 무척이나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마 이 여인은 자식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썩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 아들을 생각할 때 이처럼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인만이 생각할 수 있는 행복관이다. 사실 어머니들의 행복은 자식들이 잘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식이 좋은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모습을 보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이 여인은 소박한 여인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여인만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기 위해 쏟았던 정성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인이
말한 행복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 행복은 여인이 남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얻어진 행복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행복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것을 정성껏 돌보고 가꾼 것에서 주어지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정성껏 가꾸고 생활하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이 육체의 모성적인 표현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라는 표현은 영적인 모성적인 표현이다. 다만 인간적인 모성이냐 영적인 모성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육체적인 모성을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듯이 영적인 모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모성애는 행복의 근원이다. 다만 무엇을 배에 잉태하고 가슴에 안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인이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기쁨에서 오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영적인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은 제한적이고 또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도 있는 행복이다.
빼앗길 수 있는 행복이다. 불안한 행복이요 변할 수 있는 행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한 행복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행복이요, 영원한 행복, 늘 함께 할 수 있는 행복, 변치 않는 행복이다.아무튼육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맛보는 행복 그 이상의 행복 즉 영적인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여인이 생명을 배고 젖을 먹이듯이
그런 정성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모태에 배고 가슴에 안아 젖을 먹이는 정성과 사랑을 쏟는 이만이
맛볼 수 있는 행복이다.
파스칼은 모성애에 관해서 말할 때면 꼭 그 특징적 장점으로서 "합일의 정열"을 든다. 자식과 함께 있고 싶다,
함께 살고 싶다는 모성의 정열을 말한다. 자식과 운명을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그 합일의 정열이야말로
여성의 본능이며 위대함이기도 하다. 사실, 한자에서는 여성과 자식을 안데 합쳐서 "좋다"(好)라는 뜻으로
읽고 있다.하지만 여기에서 파스칼은 합일의 정열만으로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식의 어리광을 조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식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어머니가 자식의 인격 형성에 최대의 장애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모성의
"분리의 정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녀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지만, 모성애는 하나였던 것이 두 사람의 별개의 인간으로 나뉘
는 사랑이다. 모성애란 이별과 상실을 최종 목표로 한 서글픈 사랑인 것이다. 사실 태아는 어느새 모태에서
미끄러져 나와 곧이어 젖이 떨어지고 마침내는 창세기의 결혼관에 나오듯이 "어버이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간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의 최종 단계를 다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를 멀리 놓아 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이나 지배욕을 버리고 그 대신에 이타심을, 주는 능력을 사랑하는 자의행복만을 바랄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시련을 돌파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교육이란,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작업을 말한다.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끔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서 세상을 비관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왜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독립시켜 준 그만큼 자식은 부모를 독립시켜 주는 셈이고 그것이야 말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보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식의 도약대로서 짓밣히고, 자식의 비료로서 썩어갈 각오 가 어머니 쪽에 있을 때에 비로소 자식은
주체성을 지닌 인격으로 커나가는 것이다. 가장 숭고한 모성애는 "합일의 정열"이 아니라 그야말로
"분리의 정열" 속에 있음을 마리아는 몸소 증거해 보이셨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말한 행복은 자식과의 일치 즉 자식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관은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관이다. 인간적인 행복관은
합일의 정열에서 오는 행복을 언젠가는 빼앗기기 때문에 서글프고 허전하고 외로운 행복관이라면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은 이별이 없는 영원히 함께 사는 행복관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적인 합일의 정열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관이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 하느님의 말씀과의 합일의 정열이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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