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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02. 성모 마리아에 대한 4대 교의(2)

 I. 마리아 교의(2)

마리아의 일생은 당신의 아들 예수의 일생에 온전히 달려 있으나, 신약성서 속에는 그리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마리아 연표는 결정적이기 보다는 암시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연표는 우리에게 마리아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보게 해주며, 강생과 구속사업에 대한 마리아의 역할을 알아 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름: 마리아/ 출생: B.C. 23(또는 20)/ 부친: 요아킴/ 모친: 안나/ 자녀: 예수/ 사망: ?
 연표:
- B.C 23/20 ...... 마리아가 안나와 요아킴으로부터 탄생하심
- B.C 20/17 ...... 마리아를 성전에 봉헌하심
- B.C 11/8 ....... 요셉과 약혼
- B.C 7/6 ......... 예수의 잉태와 출산
- B.C 6/4 .........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예물
- A.D 6 ............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으심
- A.D 6? ...........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예수가 나자렛에서 생활하심(루가2,51)
- A.D 27/28....... 마리아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심(요한2,1-11)
- A.D 30 ........... 예수의 공생활 중에 아들과 함께 계신 마리아
                        (마태 12,46-50 마르3,31-35 루가8,19-21 요한2,12-13)
                        예수께서 마리아의 믿음을 간접적으로 칭찬하심(루가 11,27-28)
- A.D 30 ...........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요한19,25-27)
- 예수 승천 후 예루살렘의 어느 이층방에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하신 마리아(사도1,14)
- 지상생활을 끝내신 후에 승천하심(교황 12세께서 회칙 "무니피첸띠시무스 데우스"로 성모 승천 교리를
   반포하심(1950년 11월 1일)

   [1-1] : 마리아에 대한 4대 교의(2)

 

[1-1-3] :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

1. 마리아 교의 형성의 역사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무염시태)' 교의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의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에 의해 선포되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DS 2803).

이 교의는 마리아가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원죄와 그 과실에 빠져들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비록 성서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이 교의가 초대교회로부터의 긴 전승을 배경으로 하는 것만은 확실하다.초대 교부들은 성서의 몇몇 구절을 통해 마리아의 탁월한 성덕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순명을 통한 마리아의 업적이 죄와 불순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스띠노는 처음으로 에와의 불순명과 마리아의 순명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마리아의 무죄성을 암시하였다. 아타나시오나 에프렘 부제도 육화의 신비와 관련하여 마리아의 완벽한 동정성과 무죄함을 표현하였다. 특히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마리아가 하느님께 동정으로 자신을 봉헌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성화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깨끗해졌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교의에 힘을 더했다.

이후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를 통해서 마리아의 전적인 성성(聖性)과 무죄성에 대한 명제가 일차적으로 서방교회에서 관철되고, 오랜 발전을 거친 끝에 동방교회에서도 관철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동방교회는 7세기부터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축일을 지내오고 있다. 12-13세기가 되자 스콜라파 철학자들은 마리아의 무원죄성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했다.

중세 가톨릭 신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inas, 1225-1274)가 이를 부인하는 쪽이었다면, 또 다른 탁월한 신학자이었던 둔스 스코투스(Duns Skotus, 1266-1308)는 이를 열렬히 옹호하는 편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교부들처럼 마리아의 완벽한 성덕과 무죄함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로부터 자유롭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적 원죄 이론을 따랐다. 그래서 마리아가 원죄로부터 면제된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적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그리스도로부터 힘입은 은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경륜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 같은 입장의 차이는 이후에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도미니코회 회원과 둔스 스코투스의 프란치스코회 회원간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15세기에 들어 비록 실재적인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무염시태가 신앙조항으로 선포 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염시태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자 식스토 4세는 회칙 "Grave nimis"를 선포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쟁을 금지시켰다.

트렌트 공의회(1545-1563)는 종교개혁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논쟁거리인 '무염시태'를 다루지 않음으로써 식스토 4세의 중립적인 노선을 따랐다. 다만 원죄론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일반적인 원죄 이론에 마리아는 포함시키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삽입했다. 1667년부터 1799년까지 13명의 교황들 역시 선대의 교황들의 입장을 따라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 교회 전체의 분위기는 '무염시태'를 교의로 선포해야 한다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8세기의 비투스 쉐퍼(Vitus Scheffer)는 성모무염시태에 대한 교리가 창세기에 나타나 있음을 제시하기 위하여 일곱권이나 되는 책을 저술했다.

1830년의 '기적의 메달' 성모 발현은 신자들로 하여금 '무염시태'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여주었고, 1849년 10명의 프랑스 주교들은 공동 서한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교의 선포를 청원했다. 또한 마리아의 무염시태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어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1843년 프랑스 국가 교회의 총책임자였던 추기경 람브루스키니(lambruschini)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호의적인 성서, 전승, 교황청 문헌 등을 모두 수집하여 책으로 발간하였다.
또 예수회의 죠반니 바티스타 페론(Giovanni Battista Perrone)는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관하여]라는 책을 펴내어 큰 인기를 모았다.

성모 신심이 뛰었난던 비오 9세가 교황이 되자 교의 선포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가 착수됐다. 그는 신학 자문위원회와 추기경 자문위원회를 소집하여 의견을 수렴했다. 대다수 주교들의 호의적인 의향과 추기경단의 동의를 얻은 비오 9세는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축일을 맞이하여 회칙 [Ineffabilis Deus]를 선포하였다.


[1-1-4] : 승천하신 마리아

1. 교의형성의 역사

'성모 승천'교의는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성좌의 고유한 권위에 따라,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천주의 모친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다는 교의를 하느님이 계시하신 대로 공언하고 선언하며 분명히 정의하는 바이다."

이 교의의 바탕은 회칙에서 밝힌 대로 성서 '안에'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무염시태의 경우처럼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성서 '안에' 있다는 것은 승천교리가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전해주는 증언에 그 교의가 전적으로 부합한다는 뜻이다.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초대 교부들의 증언은 전혀 없다. 4세기말에 가서야 에피파니오(Epiphanius of Salamis)가 마리아의 죽음에 관한 여러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교회의 전승에 따라 5세기말부터 이와 관련된 축일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6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마리아 축일의 명칭은 '하느님 어머니의 기념일(Mneme Theotokou)'이었다. 이어 황제 마우리치우스(Mauricius, 582-602)는 자신의 통치 전역의 모든 교회로 하여금 '마리아의 잠드심(Koimesis)'이라 명한 축일을 8월 15일에 지내도록 했다. 이는 나중에 '하늘에 오르심(Analephsis)'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교황 세르지오 1세(Sergius I, 687-701)는 이 축일을 서방교회의 축일표에 포함시켰다. 이 때부터 축일이 되면 강론가들은 일반적으로 마리아가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제르마노, 크레타의 안드레아, 다마스커스의 요한 등의 성모 승천에 대한 강론은 매우 유명하다.

마리아의 '승천(Assumptio)'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8세기 이후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니코메디아의 Giorgio,†880)는 마리아의 무죄성에 관련하여 육체의 승천을 주장했고, Teodor Studiat(†826)는 마리아가 천상에서 우리의 위대한 중재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황제 레오 4세(†912)는 Giovanni Geometra(†989)와 더불어 마리아의 육체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다른 죽은 모든 이들의 승천의 중간 상태라는 점을 암시한다. Giovanni Furnes(†12세기초)와 Michaele Glicas(1204), Gregorio Palamas(†1359), Nicola Cabasilas(†1396)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육을 주신 어머니로서 예수의 육체와 유사성을 들어 승천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가명-예로니모], [가명-아우구스티노], [황금전설] 등과 같은 많은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성모 승천 교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오랜 동안 이 교의는 특별히 논의되지 않다가 '무염시태' 교의 선포를 계기로 재조명되었다. 1869년 라벤나의 대주교는 교황 비오 9세에게 승천 교의를 선언하도록 격려하였고,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 113명도 마리아 승천 교의를 청원했다. 20세기초에 많은 국제 마리아 회의가 열려 신학적 기초를 다졌고, 전세계로부터 800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서명한 3000여건의 청원서가 교황청에 답지했다.

또한 쉐벤(M.M.Scheeben), 페쉬(Christian Pesch), 추기경 알렉시오 레피시에(Alessio Lepicier) 같은 146명의 신학자들이 성모 승천 교의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재의 교회 신앙 의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신앙의 계시적 성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예수회의 휠로그라씨(G.Filograssi)의 주장이 교의 선포에 힘을 더해 주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를 기초로 주교들, 신학자들, 그리고 신자들의 동의를 묻고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1950년 모든 성인의 축일에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했다.


[1-1-5] :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공적으로 선포된 교의는 아니지만 가톨릭 교회안에서는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 내용이기에 이를 소개한다.

교회의 어머니 [라] Mater ecclesiae [영] Mother of the Church (한국가톨릭 대사전, "교회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란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낳아 육친의 어머니가 되듯이, 교회와는 신앙과 사랑의 모범으로 어머니가 된다고 믿는 신앙이자 마리아의 별칭.

교부 시대까지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는 신학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몇몇 교부들이 동정녀로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것처럼, 교회 또한 신자들의 동정 어머니라는 사실을 지적하였을 뿐이다.
중세 시대에도 몇몇 교부들이 은총이 가득하신 동정녀를 교회의 형상, 교회의 가장 탁월한 일원 그리고 교회의 사랑스러운 어머니로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그나마도 성 대 알베르토 (Albertus Magnus, 1200?-1280) 이후로는 점차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비오 10세(1903-1914)에 이르러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로 관계를 맺는다.

그는 교회에 대한 마리아의 기본적인 관계가 어머니로서 갖는 관계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은총이 가득하신 동정녀가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라는 사실로 전체 몸인 교회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 교회 역시 사람들에게는 교회로부터 사람들이 초자연적 삶을 얻고 주로 성사의 수행을 통해 양육되기 때문에 어머니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다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현대 신학에서 마리아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구원의교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주제로 등장한다.

현대 신학자들은 마리아가 당신 아들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제 8장은 그리스도 및 교회의 신비와 관련시킨 동정 마리아에 관한 교리를 공식화하고 종합한 문헌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에 대한 마리아의 모성적 위치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렸다.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한 역할을 격하시키는 것으로 인식될 위험 때문이다. 사실 그분의 모성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공로에서 나오고, 철저하게 그분의 중재에 종속되어 있다.

마리아가 교회와 맺는 관계에서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교회의 입장은 <교회 헌장> 제 8장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구원 사업에서 마리아는 동정녀로 그리스도를잉태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까지(57항) 성자와 결합하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되신다고 한다.

곧 신앙의 나그네 길을 걷고 아들에 대한 일치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충실히 보존하였으며, 하느님의 섭리대로 그 십자가 밑에 서 계셨고, 거기서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 함께 바쳤으며 당신이 낳은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인, 보십시오. 부인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하신 그 말씀으로 제자의 어머니가 되시고(58항), 아울러 당신 아들이 승천한 후 기도로써 초기 교회를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59항).

이처럼 마리아는 당신 아들의 구원 사업과 성령의 활동에 전적으로 참여하여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었다. 바로 이 삶의 모습이 마리아를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도극한 지체와 전형으로 보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53, 63항). 또한 지상에서 한 역할에 못지않게 은총의 세계에서도 영혼들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에 함께하여 구원 사업에 협력하신다고 본다(61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같은 내용을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에서, 교회에 대한 마리아의 모성적 관계가 예수가 제자(요한)에게 어머니를, 어머니에게 제자를 맡기신 행위(요한 19,25-27)로 확립되었다고 하면서, 주님의 뜻이, 곧 마리아의 특징인 모성적 협력이 교회의 특징이 되기를 바란다는 점을 재확인하였다.

................(계속)

출처 : 02. 성모 마리아에 대한 4대 교의(2)
글쓴이 : 봄처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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