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의 영성
박종인 라이문도신부님[ 가르멜의 영성5 ] 엘리야 예언자의 정신과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 사랑을 위주로 엄격한 청빈과 침묵을 바탕으로한 관상과 기도의 생활을 하던 가르멜산의 은수자들의 일부는 마호메트교도들의 침공으로, 성지(聖地)로부터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Simone Stock, 1166∼)성인은 관상생활과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하는 가르멜 수도자들이 영국에 왔을 때(1212년) 그들의 공동체에 자신도 가입하여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7년간 관상생활을 하고 1238년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1246년 영국의 아릴스포드(Arylesford)총회에서 (유럽에서는 최초의 가르멜 수도회 총회)가르멜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유럽의 새로운 가르멜 생활에 맡게 약간 손질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1247년에 승인 받으십니다. 비해 쉽지 않았으므로 식사와 성무일도 등을 함께 식당과 성당에 모여 하기로 하였고, 육식은 허약한 사람이나 병자는 가능하고 또한 손님이 되었거나 항해를 할 때에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위주였다면, 유럽내에서의 새로운 관상생활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과 함께, 엘리야 예언자가 회당에서 주님의 법을 설명하고 예언직을 행했듯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도직에도 힘썼습니다. 가르멜 수도원을 창립하므로써 수도회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성인은 특히 대학이나 학원이 있는 곳, 예를 들면, 캠브리지(Cambridge, 1249), 옥스퍼드(Oxford, 1253), 파리(Paris, 1254, 1255), 볼로냐(Bologna, 1260)에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불러 일으키자 반대와 박해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가르멜 수도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성인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평판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생겨난 수도회들로부터 질시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흰 수사들(Witte Friars)"이라 불렀습니다. 유럽에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가르멜산의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형제들이라는 명칭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박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또한 수도회 내에서도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안팎의 어려움을 당하여, 시몬 스톡 성인은 밤낮으로 동정 성모께 애원하며, 어머니로서 특별히 보호 해 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유일한 동정이며 어머니시여, 우아하고 순결한 어머니시여,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인 가르멜인들에게 팔을 펼치소서. 오! 바다의 별이시여, 그리 하소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이 가르멜 수도자들의 참 어머니시오, 보호자이심을 실제로 보여 주셨습니다. 스카풀라를 손에 들고 나타나셔서, <이것은 너를 위해서 그리고 모든 가르멜인들을 위해서 하나의 특전(UN PRIVILEGIO)으로 주는 것이니, 그 은혜 안에서 죽는 사람은 영원한 불의 고통을 받지 않는 표지가 되리라.> 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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