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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멜의 영셩

[스크랩] 가르멜의 영성 7

가르멜의 영성

박종인 라이문도신부님[ 가르멜의 영성7 ]
 


예수의 데레사 성녀(1515∼1582, 스페인 아빌라)가 1535년에 들어가

아빌라의 강생 수도원 (La Encarnacion)은 완율(緩律)

가르멜 수도원이었습니다.


유럽을 휩쓴 흑사병(1348∼1349년)과 교황 난립으로 인한

서방 교회의 분열(1378)로 말미암아 수도회들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여파로 가르멜 수도회도 내외적으로 튼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스며, 이에 따라 총회에서 기존의 엄격한 규칙을

완화(緩和, mitigation)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르멜 수도회는 1432년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로부터 완화 규칙을

승인 받았습니다.


봉쇄 구역 엄수(嚴守)의 완화, 사순절과 대림시기 이외에 일주일에

네 번의 육식 허용, 재를 지키는 기간의 단축등으로 원 회규의

엄격한 생활을 완화하게 되었습니다.


1451년부터 1471년까지 20년간 가르멜회의 총장직을 지낸

복자 요한 소렛트(JEAN SORETH, 1394∼1471, 프랑스, Caen)는

비록 규칙은 완화 되었지만 원 회규의 근본 정신인 침묵과 기도,

그리고엄격한 청빈의 정신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개혁에는 비록 못 미친다 할지라도 성녀보다

약 1세기 전에 가르멜의 내부적인 개혁을 시도한 훌륭한

가르멜 수도자였던 복자 요한 소렛트(JEAN SORETH)는

가르멜 제2회 수녀회와 제3회 재속회의 창립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렛트는 1452년 5월 10일 네델란드의 겔드르(Gueldre) 지방에서

가르멜 수도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세속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서원은 발하지 않고 장상밑에서 순명하면서 살았음)여성들을

(beghine, 중세 네델란드의 반속(半俗)의 수녀들) 가르멜 수도회의

수도자로 받아 들였습니다. 1452년 10월 7일, 니꼴라오 5세로부터

칙서(Cum Nulla)를 받으므로써 법적으로 교회의 승인을 받았으며,

그들은 공식적으로 가르멜회의 규칙을 따르며 수도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제3회도 함께 승인을 받았습니다. 복자 요한 소렛트는 가르멜 제3회를

위한 첫 번째 규칙을 썼습니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가르멜 수도회가 어떤 수도회라는 것을 알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빌라의 강생 수도원(La Encarnacion)에 자기 친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친구 때문에 그 곳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적당한 수도회가 있었다면 아마 그리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성녀는 자서전에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결심들을 세우고 있었을 즈음에 동생들 중 하나에게

세상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며 수도자가 되는 것을 납득 시켰습니다.


그리고 어느닐 아침 일찍이 내가 많은 애정을 기울이고 있던 그 친구가

있는 수도원으로 함께 가자는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만일에

내가 하느님을 더 섬길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든지,

나의 아버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든지

하였더라면 다른 어떤 수도원에라도 갈 수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나는 영혼의 구제 방법을 더 노렸던 것이지 위안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로 삼고 있지를 않았던 것입니다."(자서전 4,1)


이로써 하느님의 섭리는 예수의 데레사 성녀로 하여금 가르멜을

혁신하도록 부르셨다는 것과, 성녀를 통해 우리에게

기도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고자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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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가르멜의 영성 7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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