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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 안의 마리아 -최경선 박사

그대로 보면 그 ‘여자’는 하와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와 이외의 다른 여인이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서 구절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신탁(神託, divine oracle)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 자신이 친히 말씀하시는 이 신탁에서 ‘여자’라는 단어는 단순히 하와만이 아니라, 그녀의 후손인 어느 여인을 지시할 수 있다. 그리고 ‘뱀의 후손’은 악마요,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투쟁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짓밟음을 뜻한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표현에서 ‘여자’라는 단어는 악마를 의미하는 뱀의 머리를 짓밟는 자의 어머니인 여인이다. 악마의 머리를 짓밟는 자의 어머니로서 이 여인은 내용상으로 하와와 거리가 멀다. 악마를 쳐 이긴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면, 이 여인이 예수의 어머니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 전승은 이 여인을 성모 마리아로 해석하고 마리아를 ‘제2의 하와’ 또는 ‘새 하와’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마리아가 첫 번째 하와의 범죄로 손상된 것을 복구하였다는 의미에서 교부들이 마리아에게 즐겨 적용하였던 표현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 또는 ‘새 아담’이라고 부르는 데 기인한다. 예컨대, 로마 5,12-21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과 대조하면서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바오로의 해석을 적용하여, 하와가 아담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불순종케 하고 범죄 하게 했다면, ‘제2의 하와’인 마리아는 예수를 하느님께 순종케 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데 협력한 셈이다.   
성경의 첫째 권 창세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 원복음이 신비롭게도 성서의 마지막 권인 요한 묵시록에도 언급되고 있다. 첫째 권과 마지막 권의 훌륭한 조화가 우연만은 아니다. 요한 묵시록 12장에는 이 원복음이 실현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2. 이사 7,14: 임마누엘의 어머니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oth)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 (Álmah)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 (Ìmmanuél)이라 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구절은 ‘임마누엘 예언’이라고도 한다. 이 예언의 말씀은 시리아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다윗 왕조가 멸망할 위험에 놓였을 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유다의 왕 아하즈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하느님의 징표를 구하라고 권고한다. 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아하즈는 이 권고를 묵살한다. 자신의 정책과 정치노선을 고집한다. 여기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그 징표를 손수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을 두고 신학자들은 많은 논쟁을 벌였다. 쟁점은 두 가지다. 히브리어 ‘알마’(Álmah')라는 단어의 의미와 ‘징표’(oth)라는 단어의 의미다.   
   
우선 ‘알마’라는 단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반드시 ‘처녀’를 일컫는 용어는 아니다.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는 ‘베툴라’(Bertulah')가 있다.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인’을 가리킨다. 젊은 여인은 반드시 처녀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처녀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이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인은, 이미 결혼한 여인일 수도 있고 처녀일 수도 있다. 이 단어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처녀를 지시하는 단어 ‘베툴라’와 같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창세 24,16.43; 탈출 2,8; 시편 68,25 등이다. 결국 ‘알마’는 상당히 넓은 의미로 쓰인 포괄적인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단어가 이사야 7,14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 학자들의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우선 이사 7,14의 ‘알마’는 반드시 ‘처녀’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교회 전승은 이 ‘알마’(Álmah')라는 단어를 분명히 ‘처녀’로 보고 있다. 70인역 희랍어 번역본도 이 ‘알마’를 ‘처녀’(parthenosfh)로 번역하고 있으며 불가타 라틴어 번역본도 ‘처녀’(virgo)로 번역하고 있다. 마태오도 자신의 복음에 그대로 인용하면서 ‘처녀’(parthenos)로 번역하고 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마태오는 이 예언을 인용하면서 이 예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마리아의 예수 동정 잉태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마태 1,18-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마태 1,18-25)   
루카 역시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두면서 마리아의 예수 동정 잉태를 전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 자체만으로는 어렴풋했던 하느님의 계시가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시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26-37)   
   
두 번째 쟁점인 ‘징조’(oth), 또는 ‘징표’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이 예언은 결코 평범한 사건이 아닌 특별한 사건이라는 어조를 지니고 있다. ‘징표’(기적)로 제시될 수 있어야 하는 사건이다.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이것을 메시아적 징표로 이해한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평범한 다른 출생과 구별되며, 동정녀로부터의 탄생에 더 비중을 싣는 것이다.   
‘알마’(Álmah', 젊은 여인)는 임마누엘의 어머니로서 구원의 중재자가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히즈키야의 어머니는 그 ‘알마’의 예형(豫型)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히즈키야 왕으로 말미암아 불완전하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던 것이 그리스도의 동정 잉태의 신비 안에서 완전하게,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신약은 구약의 성취이다. 그 임마누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만큼 그 ‘알마’는 성모 마리아를 지시한다. 그리고 이사야의 징표는 단지 그 여인이 아이를 낳는 역할 만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구원 역사에 함께 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아울러 지시하고 있다.   
   
3. 미카 5,1-3: 베들레헴에서의 메시아 출생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자 미카(기원전 738-700년경)는 예언자 이사야보다는 약간 늦지만 거의 동시대에 예언 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의 예언은 신약성서에도 자주 등장하며(마태 2,5-6; 요한 7,42) 예수님 역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인용하셨다(마태 10,35-36).   
미카서는 미래에 오실 메시아의 탄생이 다윗 가문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나탄의 예언(사무 하 7,1-15)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예언은 메시아의 출생지와 더불어 그의 모친을 가리키고 있다.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는다.”는 표현에서 ‘여인’은 이사 7,14의 ‘알마’를 암시한다. 즉, 저 유명한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의 메아리이다. 이 예언에서도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해방, 새로운 왕권, 혹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한 여인과 그 여인의 아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이상(理想)은 창세 3,15 즉 원복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카서가 예언하는 메시아적 인물은 원복음이 암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의 세력과 투쟁한다(미카 2,12). 그 악의 세력은 이스라엘의 적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적이기도 하다(미카 5,8; 5,11).   
   
4. 미카서 4,1-14; 스바니야서 3,14; 즈카르야서 9,9; 요엘서 2,21-27: ‘시온의 딸’과 새로운 백성의 탄생   
   
마지막 때에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주님의 산으로.......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이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들을 다스리리라........ (미카 4,1-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스바 3,14)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즈카 9,9)   
   
.......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었다(23)....... (요엘 2,21-27)   
   
‘시온’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이다. 특히 잘 방어할 수 있도록 높이 솟은 지역이었다(2사무 6,12). 다윗은 그곳에 ‘계약의 궤’를 모셨고(사무 하 6,12), 솔로몬은 그 북쪽에 하느님 성전을 짓고 ‘계약의 궤’를 모셨다(열왕 상 6장). 명실 공히 ‘시온 산’은 하느님의 ‘좌’가 되었다. 바빌론 유배 이전에는 시온이 예루살렘과 동의어로 쓰였다. 스바니야서는 이 용어로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자들을 지칭하고 있다(스바 3,12-13). 흩어졌던 그들이 하느님의 승리로 다시 모이게 된다(스바 3,20). 이제 ‘시온의 딸’은 다시 세워진 하느님의 백성을 일컫는 이름이 되고 있다. 즉 모든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유배에서 돌아온 ‘남은 자’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어김없는 약속이다. 여기에 고대 이스라엘의 희망이 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연결된 ‘시온의 딸’은 고통스러운 출산을 겪기는 하지만 출산 후 맞이하게 될 커다란 기쁨에 초대되고 있다(즈카 9,9; 요엘 2,21-27). 왜냐하면 이들은 곧 승리와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온의 딸’은 희망의 상징이 되고 있다. ‘시온의 딸’은 메시아 왕권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주 하느님의 공동 협력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는 ‘시온의 딸’의 후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이사 49,20: 54,1-3; 66,7-8).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자주 간택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자체가 여성으로서, 동정녀로서, 애인으로서, 아내로서, 또 어머니로서 묘사된다.   
교회 전승은 처녀이면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서 이러한 ‘시온의 딸’과 관련된 예언들이 실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베들레헴에서 기쁨의 메시아 출산, 그리고 갈바리아 산상에서 메시아 백성의 고통스러운 출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 자신의 설명을 통하여 갈바리아 산상의 십자가를 하나의 출산으로 이해하고 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   
이런 의미에서 교부들만이 아니라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도 마리아를 시온의 딸과 연관시키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구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시온’ 또는 ‘시온의 딸’의 성서적 상(像)을 총괄하여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성모 마리아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온의 딸’이요 그 실현이다. 그리고 ‘시온의 딸’은 성모 마리아의 예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마리아의 예들과 상징들   
   
성모 마리아에 관해 언급하는 구약성경의 자료들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교회가 마리아에게 적용하는 상징적 모델들은 많이 있으며 이런 것들은 「성모 호칭기도」에서도 발견된다.   
   
1) 그리스도교 전례에 적용된 모델들   
   
a. 불타는 떨기나무(탈출 3,2)   
모세가 본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덜기처럼 당신의 동정성은 온전하십니다. 천주의 모친이여.......(천주의 모친 대축일 성무일도 저녁기도 제3후렴)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그 떨기나무는 타고 있으면서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두고,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지만 그 동정성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훌륭한 상징이다.   
   
b. 기드온의 양털 뭉치(판관 6,37-38)   
주님 당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양털의 물기처럼 동정녀로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태어나시면서 성서에 기록한 것을 성취하셨습니다.......(천주의 모친 대축일 성무일도 저녁기도 제2후렴)   
기적적으로 하늘로부터 이슬을 흠뻑 적신 기드온의 양털 뭉치는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가득히 받아 하느님의 아들을 얻게 됨을 상징한다.   
   
c. 계약 궤(탈출 25,8-16)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만들게 하여라....... 그들이 아카시아 나무로 궤를 만들게 하여라....... 그리고 나서 내가 너에게 줄 증언판을 그 궤 안에 넣어라(탈출 25,8-16)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십계명판을 보관하고 다니던 ‘계약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였다. 교회 전승은 성모 마리아야말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 현존하셨던 궁전으로 이해한다. 특히 ‘계약 궤’를 모시고 유다 고을을 향하여 기뻐 춤추는 다윗의 모습과 오베데돔 집에서의 3개월 체류(사무 하 6,5-15)가 유다 산골로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와 비교되고 있다. 마리아를 맞이하여 뱃속에서 기뻐 뛰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과 마리아의 3개월 체류가 유사하다고 본다(루카 1,39-56).   
   
d. 아가서의 신부(新婦)(아가서 2,2; 4,7-8)   
마리아여, 당신은 온전히 아름다우시고 원죄에 물듦이 없나이다(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성무일도 제2저녁기도 제1후렴. 참조: 아가서 2,2“아가씨들 사이에 있는 나의 애인은 엉겅퀴 사이에 핀 나리꽃 같구나.”).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 나와함께 레바논에서, 나의 신부여,.......(아가 4,7-8)   
아가서의 백합처럼 정결한 신부에 관한 시구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대축일(12월 8일) 성무일도 제2저녁기도 첫 후렴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는 마리아를 흠잡을 데 하나 없는 하느님의 정결한 신부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e. 닫혀 진 정원, 봉해진 우물(아가 4,12)   
그대는 닫혀 진 정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닫혀 진 정원, 봉해진 우물(아가 4,12)   
교회 전승은 이 성경 구절에서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에게만 독점되어 있는 존재라는 의미의 동정성을 읽어내고 있다. 특히 교부 베드로 크리솔로고(Petrus Chrysologus)는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육화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마리아에게 내려오는 순간 이루어진 것으로 해설하고 있다.   
   
f. 지혜(잠언 8,22-36)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지혜)를 지으셨다./ 나는 한 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잠언 8,22-36)   
여기서는 ‘지혜’를 인격화 하여 소개하고 있다. 사실 신약성서의 많은 구절들이 이 잠언서의 ‘지혜’를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것처럼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창조되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여기서 말하는 ‘지혜’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도 그 ‘지혜’를 수용하고 잉태케 한 여성의 응답을 통해서 사람이 되신다. 마리아는 자신을 겸허하게 여종으로 자처하며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순종의 자세로 응답하였다. 또 ‘지혜’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 모두 여성명사다. 여성명사로 표현한 것은 그저 우연하고 무의미한 문법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마리아의 ‘지혜’와 연관성을 고려할 수 있다.   
   
2) 마리아의 예형적 인물들   
   
a. 하와   
하와라는 이름은 ‘지아비에게서 나온’ 또는 ‘인류의 어머니’ ‘생명’이라는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를 ‘새 하와’ 또는 ‘제2의 하와’로 부르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를 ‘새 아담’으로 부른 것을 교부들이 본뜬 것이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도 마리아를 ‘새 하와’로 표현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도 그렇게 부른다(LG 8장 56항).   
   
b. 사라   
이사악의 잉태에 대하여 하느님은 사라에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창세 18,1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고 말한다. 특히 사라가 하느님으로부터 약속의 아들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마리아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아들을 얻게 된 사실이 서로 연관성을 보이고 있다.   
   
c. 아브람   
사라보다도 아브람은 마리아와 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아브람이 ‘신앙의 아버지’로 불리듯이 성모 마리아는 ‘신앙의 어머니’로 불린다. 구약의 신앙인 아브람과 신약의 신앙인 마리아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하느님과 가까운 관계: 창세 18,1과 루카 1,26-27.   
- 축복의 원천: 창세 12,3; 18,18;22,18과 루카 1,42.48.   
- 신앙을 통한 기적적인 아들 출생: 창세 15,6과 루카 1,45.   
- 아브람의 이사악 봉헌과 성모 마리아의 예수님 봉헌(성전과 갈바리아 산상): 창세 22장과 루카 2,22; 요한 19,25-27.   
   
d. 한나   
하느님이 허락하신 모성에 대한 감사의 노래로서, 「한나의 노래」(사무 상 2장)와「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카 1,46-55)가 매우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e. 유딧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잘라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여장부로서 백성들로부터 받은 찬양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으로부터 받은 찬양과 흡사하다.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유딧서 1,318).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f. 에스테르 황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중재인으로서 에스델과 하느님 백성의 중재자로서의 마리아가 비슷하다.   
이 외에도 ‘노아의 방주’, ‘에덴동산’, ‘솔로몬 궁전’과 같이 마리아를 상징하는 수많은 성서의 예형들이 있다.   
   
6. 구약성경의 결론   
   
구약성경은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한 민족의 역사적신학적 기록이다. 그 시대에 살았던 예언자들이 앞에서 이 희망의 역사를 이끌었다. 예언자들은 그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계시를 시대의 사상과 언어와 현실을 바탕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런 예언으로 인해 악이 만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인류의 역사가 마침내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구는 종말론적 희망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이 모든 희망과 예언은 메시아라는 인물에 집중되고 있다. 그 메시아가 누구인지 서서히 밝혀지는 것이다. 여인 하와의 후손, 다윗의 후손, 우리 인간과 하나도 다름없이 한 여인으로부터 태어날 아기요, 임마누엘이라 불리게 될 아기이다. 여기에 그 메시아와 더불어 메시아의 징표를 알려줄 어머니로서의 여인이 함께 드러나고 있다. 그 여인은 소박하고 순진한 ‘알마’요, 하느님께 성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anawim)로서의 ‘시온의 딸’이다. 출산하는 그 여인은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메시아적 기쁨에 초대된 여인이다. 구약 안에서 그 여인은 메시아만큼이나 신비에 싸여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인 만큼, 그 여인은 마리아라고 할 수 있다.   
   
II. 신약성경   
   
예수님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 모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도들의 지도 아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바오로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티아서 4,4-5)라는 마리아에 관한 암시적인 언급과 더불어 루카가 전하는 사도행전의 기록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의 성모 마리아에 관한 첫 번째 언급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여기서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 명시되고 있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이 당시 복음 선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전하는 사도행전은 함께 기도하였던 이 공동체가 성령을 받고(사도 2,1.13) 매일 성전에 가서 기도하였다(사도 2,46)고 전한다. 또한 사도들과 함께 빵을 나누면서(성체성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였으며, 재산을 함께 나누고 주님이 다시 영광중에 오시리라는 종말의 기대를 함께 하였다(사도 2,42-47; 4,32-35; 5,12-16)고 전한다. 그 공동체에 성모 마리아가 함께 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 때부터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 불렸으며, 기도하는 사람, 예수님을 믿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성모 마리아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때부터 가장 핵심 인물이요, 핵심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육화와 깊이 연관을 맺고 있는 분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와 복음사가들의 진술은 이런 배경 속에서 보아야 한다.   
   
1. 사도 바오로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선교하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핵심으로 삼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그의 글 속에서 마리아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 중에서 암시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갈라티아서 4,4-5이며 간접적으로 성모 마리아에 연관시켜 볼 수 있는 부분은 로마 1,3-4; 필리피 2,6-11; 갈라 1,19; 4,28-29 등이다.   
   
1) 갈라 4,4-5: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을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첫 번째 증언(53-57년경)으로 본다. ‘여인에게서의 탄생’은 구약성경이나 다른 신약성경에서도 그 표현을 찾아볼 수 있듯이 인간적 조건을 드러낸다. 갈라 4,4에서 구원역사의 중심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이 ‘여인에게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울러 성모 마리아의 이름이 비록 밝혀지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이 ‘여인’이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 아들의 육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아들로 하여금 참된 인성을 지니게 하고, 또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도록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 ‘여인’은 하느님의 계획에 속해 있는 결정적인 인물이 되고 있다.   
   
2) 로마 1,3-4: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이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간접적인 언급으로 볼 수 있다. ‘육으로는’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지니게 되는 데 있어 마리아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드러낸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가 다윗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나 바오로에게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였다.   
   
3) 필리피 2,6-11: 선재(先在)하시는 하느님의 육화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 2,6-11)   
「그리스도 찬가」라고 일컫는 이 자료는 바오로 이전부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전례 안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바오로가 자신의 편지에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이미 계셨던(先在) 분임을 밝힐 뿐 마리아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구절을 마리아가 자신을 일컬어 “당신 종”(루카 1,48)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노래」와 연관해서 묵상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분명한 인성은 마리아로부터 받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4) 갈라 1,19: 주님의 형제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갈라 1,19)   
‘주님의 형제’(adelphos)는 마리아 동정에 관한 논쟁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었으나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제베대오의 두 아들 중 하나, 즉 ‘요한의 형제 야고보’와 구별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 12장17절과 15장13절에 나타나며, 예루살렘 회의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했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 회의가 있기 이전에 유대인들에 의해 순교하였다(사도 12,2).   
   
5) 갈라 4,28-29: 육에 따라 태어난 아들과 성령에 따라 태어난 아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사악과 같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육에 따라 태어난 아들성령에 따라 태어난 아들을 박해한 것처럼, 지금도 그렇습니다.(갈라 4,28-29).   
‘성령에 따라 태어난 아들’ 또는 ‘성령으로 태어난 이사악’이란 바오로의 표현은 과연 동정 탄생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구절은 문맥상 이스마엘과 이사악을 대조하고, 아울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대조하고 있다.   
   
6) 마리아에 관한 바오로 진술 종합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에서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가 한 복음 선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여인’이라는 표현으로 단 한 번 언급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위해서, 즉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육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분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모두가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이 참 사람이 되신 점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친인 이 ‘여인’은 육화의 신비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2. 마르코 복음   
   
마태오, 루카, 요한복음들에 비하면 마르코 복음은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가장 적다. 그 이유는 마르코가 파스카 사건과 예수님의 인격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신학을 전개해가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비밀’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아서 그의 복음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나아가 마리아까지도)은 그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장만을 읽고 가볍게 해석하면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부정적으로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뜻을 잘 들여다보면 ‘예수의 어머니’로 불리는 마리아가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르코 복음 속에서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것으로서는 3가지 부분(3, 20-21; 3, 31-35; 6, 1-6)을 들어볼 수 있다. 이제 그것을 차례대로 간략하게 보도록 하자.   
   
1) 마르 3,20-21: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들러 간 친척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당신 곁에 있게 하려고 방금 뽑으신”(마르 3,13-19 참조) 열두 사도와 함께 어떤 집(아마도 가파르나움에 있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다)에 갔었는데,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의 친척들이 그를 “붙들러” 간 정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마리아의 이름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말 성서 “붙잡으러”라고 번역된 단어 크라테오(Krateo)는 강압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식사할 겨를조차 없는 예수님에 대한 가족들의 애정이 담긴 단어라는 것이다.   
많은 성서 주석가들이 이 20-21절을 31-35절과의 관련 하에 본다. 즉 21절에 언급된 “예수님의 친척들”은 31절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2) 마르 3,31-35: 새로운 형태의 가족 관계 선언 출처 : 성경 안의 마리아 -최경선 박사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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