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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스크랩] (25) 마음 열기 ⑦‘언제든지 항상’ 주님 초대에 응하라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25) 마음 열기 ⑦
‘언제든지 항상’ 주님 초대에 응하라

개인·세상 성화는 외양·정신·영 변형으로 가능
나 자신부터 바로 이해하고 삶 형태 조화 이뤄야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자신의 외모를 비롯해, 정신 및 영혼의 상태 그리고 주위 환경 등에 대해 모두 만족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여기에 더 보태서 진정한 행복을 위해, 하느님께 좀 더 다가가려 노력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빛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거룩한 독서, 묵상 향심기도 나아가 깊은 관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려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날 한 순간에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결심이나 노력을 통해 한 순간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성인(聖人)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혹 어떤 이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하느님 은총의 빛을 받으면 일순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바오로 사도도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빛을 받은 후 몇 년 동안 잠적을 한다. 하느님의 빛을 받았지만 바오로 사도도 인간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 다마스커스, 예루살렘, 타루소 등을 오가며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낸다. 그 10년 동안 바오로 사도는 외양형태(apparent form)를 바꾸고 정신형태(current form)를 바꾸고, 마음 형태(핵심형태 core form)를 바꾼다.

제1차 전도 여행은 그 이후에 시작된다. 자신의 외양과, 정신, 마음도 바꾸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자신의 전 인격을 바꾸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나 이웃을 변형 시키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문제는 자신의 전체를 바꾸지 못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교회를 바꾸겠다고 나서기 때문에 생긴다. 교리 조금 배웠다고, 성령 기도회 조금 다녔다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 조금 했다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10여 년 세월동안 자신을 온전히 초월적으로 변형시킨 후 ‘짠’하고 나타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1코린 15, 9). 사도는 나아가 자신에 대한 자랑은 않고 늘 하느님 자랑만 한다(로마 3, 27; 1코린 9, 16 참조).

바오로 사도는 우선 말하고 듣고 행동하는 외양형태가 변했다. 그리고 정신의 상태, 마음의 상태가 모두 변했다. 이제 바오로 사도에게선 형성하는 신적 신비 즉 하느님이 인간 안에 토대로 마련해 주신 삼중구조가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행동 따로, 정신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겉으로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취하지만 정작 정신과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정신은 맑게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마음과 영혼은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한 경우도 많다. 따로 따로 논다. 우리가 목표하고 있는 영성적 삶은 바로 행동, 정신, 마음(영혼)이 하나의 통합 구조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 났으면 내가 누군지는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입으로는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정밀하게 나 자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건강할 수 있고, 이웃을 위한 삶을, 하느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대충대충 막 살지 않는다. 자신이 왜 존재하고, 왜 태어났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외양과 교류, 핵심형태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하느님은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이 부활에 대한 응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10년, 20년 원대한 계획을 세워서 추구해야 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다. 경제 개발이나 지역 개발은 장기 계획을 세워서 해야 하지만, 초대에 대한 응답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응답은 매일 매일의 일상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실제적 상황 속에서 발생해야 한다.

부활에 대한 응답은 어느 길에서나 (every way), 언제든지 항상(every time), 모든 점에서(every form), ‘날마다’(every day) 이뤄져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응답은, ‘every’(모든, 모두의)라는 단어에 달려있다.

영원한 생명은 그 어떤 허황된,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인류가 10년, 20년, 100년 목표를 세워서 달성해야 하는 그런 성질의 것도 아니다. ‘공산주의를 없애자’라는 식의 구호도 아니다. 이것은 매일(every day)의 삶 안에서 어떻게, (통합적 구조 속에서의) 인간으로서 바른 삶을 살아가는가의 문제다. ‘every’가 중요하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출처 : (25) 마음 열기 ⑦‘언제든지 항상’ 주님 초대에 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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