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줄 가운데 추기경의 이모님과 어머니(안경 쓰신 분), 뒷줄 왼쪽 부터 셋째 형님(필수) 내외, 추기경, 넷째 형님(동한, 당시 신학생), 큰 누님, 작은누님
"우리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일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많지 않은데,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본시 성품이 곧으신 분이셨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다. 특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비 없는 자식' 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그만큼 자식들 교육에 엄격하셨다. …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낳은 여덟 명의 아들 딸 중 막내였다. 위의 형이나 누이들은 가난과 잦은 이사 때문에 공부를 시키지 못하셨는데 내 바로 위의 형과 나만은 그런 궁핍 속에서도 공부를 꼭 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다. …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먹이고 입히셨다. 그 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
(<샘이 깊은 물>, 1984.11)
진해 성당 방문
추기경 반지 수여
서임식
"추기경 서임(로마 베드로 대성전, 1969.4.30 ~5.1)
"(추기경 임명 소식을 처음 들은 곳은) 일본 후지산 기슭에 있는 '작은 자매회' 수련원에서였지요. 죠치대학 재학 시절의 은사였던 게페르트 신부님께서 전화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 때 제가 처음으로 한 말은 '임파서블' (불가능하다)이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교회 일로 로마에 들렀다가 일본을 거쳐서 귀국하는 길에 공항에 나가기 위해 택시에 오르기 직전이었습니다. 택시 속에서도 반신반의하면서 1킬로미터 아래쪽에 위치한 성신학교 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교회는 주일만의 교회가 아니라 생활 속에 교회와 신앙을 뿌리박고 교회 안에 사회를 심어 주고 성직자는 교회 안에 교회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현재까지 우리 나라 천주교는 신앙을 구하러 교회에 찾아오는 방식이었으나 앞으로는 사회속으로 찾아가는 자세로 교회를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경향신문> 1968.4.29)
착좌식이 거행된 명동 성당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명동 성당, 1968.5.29)
"당시 매스컴이나 사회의 관심은 한 개인에 대한 기대라기보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교회만은' 하는 바람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다고 봅니다. 연륜도 짧고 주교로서도 가장 막내인 제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그때 서울대교구는 재정을 비롯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누군가는 져야 할 짐' 이라는 생각에 임명을 수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