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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역사의 예수 믿음의 그리스도

 

제목 : 예수 그리스도

 서론 : 역사의 예수


 만약 예수가 역사적 실재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그의 가르침과 요구는 환상이거나 이상주의자의 견해에 불과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받아들이고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사도 바올로는 다음과 같이 그분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필립 2:6) 사도의 증언대로 예수는 우리가 지닌 것과 동일한 신체적·정서적·지적·영적인 욕구를 구비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예수는 그 당시 유대인의 전형적인 생활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보통 소년이었지만, 동시에 분명히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다.

 본고는 토마스 잔지그의 『역사의 예수, 믿음의 그리스도』를 주요 텍스트로 삼아, 예수의 인간적 삶을 역사적으로 조명해 봄으로써 그의 현존을 실감하고, 이를 통해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하는 방향으로 준비했다.


 1. 예수의 탄생과 성장


 기원전을 의미하는 약어 B.C.는 ‘그리스도 탄생 전(Before Christ)’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사람들과 복음사가들은 그리스도가 정확히 몇 년도에 탄생했는가를 문서화 하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탓에 6세기 경 달력을 만드는 과정에서 예수가 태어난 해를 잘못 계산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 실수가 바로 잡히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져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실제 예수는 B.C. 6년 내지 5년 정도에 출생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가 헤로데 대왕 치하에서 탄생했음을 알리고 있는데 헤로데는 B.C. 4년에 죽었고 예수는 그 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베들레햄에서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계약 공동체에서 아이가 그 구성원이 된다는 표시로 남자 아이의 성기 표피를 제거하는 종교 행사였다. 이것은 야훼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첫 번째 계약을 상기하는 것인데 그때 하느님이 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너희는 포경을 베어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다. 대대로 너희 모든 남자는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세기 17:10·14) 할례 받을 때 그분에게 예수라는 이름1)이 주어졌다. 예수는 그 당시의 일반적인 이름인데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야훼는 구원이시다”란 뜻이다. 그 후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산비둘기 한 쌍을 제물로 하여 야훼께 그분을 봉헌하였다.


 1.1. 유대인들의 집


 유대인들의 집은 방 하나에 한 평 정도의 화장실이 있고 문은 한 개인데, 방을 둘로 나누어 사용하며, 한편에 사람들이 거처하고, 다른 편에 가축을 키운다. 대개 집은 언덕배기에 지었는데, 흔히 집의 일부가 동굴이었다. 집은 대체로 점토로 짓는다. 대개의 바닥은 단단히 다진 맨 흙이고, 지붕은 기둥 틈새로 갈대와 풀을 엮어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놓는다. 이 때문에 마르코 2장에 기록된 중풍환자 치유 기사에서처럼 쉽게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환자를 “예수 앞에 달아내려” 보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지붕 위에 연장을 올려두던가, 빨래한 세탁물을 널어 말렸다. 기도와 명상 시간에는 지붕 위에 좌정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모든 마을에는 공동화덕이 있어서 모든 주민들이 빵을 굽고 요리하는데 사용한다. 집을 밝히기 위해 작은 램프가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올리브기름을 넣는다. 잠은 매트 위에서 자는데, 추우면 외투를 둘러쓴다. 이런 외투는 낙타나 염소 털로 만드는데 매우 두껍고 무거우며 방수 효과도 있다. 베개는 나무 조각이나 돌을 머리 밑에 깐다.


 1.2. 나자렛의 어린 시절


 예수는 불과 천여 명 남짓한 나자렛 마을에서 자랐다. 그분 역시 앞서 묘사한 대로, 방 한 개가 딸린 집에 살았을 것이다. 그분의 양부 요셉은 목수였고, 예수 역시 양부를 도와 일했을 터이며 실제로 목수가 되었다. 예수는 좋은 교육을 받아 히브리어를 말할 수 있었는데, 그 당시에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분이 태어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보건데 그분은 히브리어, 희랍어, 팔레스티나의 공용어인 아라메아어 등 3개의 언어를 구사했을 것이다. 또한 그분 역시 시나고가에 딸린 학교에 다녔을 터이고, 히브리 성서를 비롯하여 동족인 유대인의 신앙과 역사를 공부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3. 믿음 깊은 가정


 유대인에게 있어서 가족 단위는 곧 그 자체가 진정한 신앙 공동체이며, 아버지가 종교행사를 주관하는 지도자이고 가족의 종교행사를 집행한다. 예수시대에는 일부일처제를 이상적인 것으로 인정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신심 깊은 유대인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가정이고, 율법과 유대교의 정신을 충실히 신봉하는 분위기였다. 이처럼 강하고 애정이 깃든 신앙 가정 안에서 예수는 성장했다. 그분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히브리 성서를 깊이 사랑하고 이해한 사람이었다. 동족의 공동 예배와 그 분위기에도 젖었을 것이다.2) 예수는 하느님을 잘 알고 있었으며, 하느님과 동족 간의 관계를 비롯한 종교적 지식을 포함하여 직접 논쟁했던 지도급 인사들, 친구, 가족 등과 교류하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2. 예수의 공생활


 세례자 요한은 예수 시대의 수많은 방랑 예언자 중의 한 분이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을 메시아 혹은 구세주로 자처하지 않은 유일한 예언자였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죄의 회개를 요구한 세례를 받았다.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죄 없는 성자이신 예수가 이런 세례를 받은 이유는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마태 3:15) 때문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로서 그 행위를 보았고, 그런 기반 위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의 물세례는 메시아로서 십자가의 길로 접어드는 제일보였기에 나중에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말한다”(마르 10:38).

 예수는 당신의 세례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첫째, 새 왕국을 선포하고 시작하기 위하여 특별한 형태로 간택되었음을 인식하였다. 둘째, 당신의 세례에서 예수는 성령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영을 통하여 당신 임무를 완수할 권능을 부여받았음을 인식하였다.


 2.1. 예수의 유혹


 예수는 세례 후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나가 40주야를 단식하시고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세 가지 유혹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히브리 성서의 신명기에서 인용하였다.

첫 번째  유혹 :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3)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신명기 8:3)

두 번째 유혹 :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4)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기 6:16)

세 번째 유혹 :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5)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기 6:16)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 40일은 곧 40년 동안 광야를 헤맨 과거사를 즉시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수많은 유혹을 당하다가 끝내는 굴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게 하는 숫자이다. 그러나 ‘새로운 이스라엘’인 예수는 역시 유혹을 당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유혹은 예수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이 권능이 예수에게는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요소였다. 그래서 예수는 이것을 포기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고 유혹을 물리치는 내용인데 이것으로 백성들이 기대하고 희망하였던 정치적·군사적인 메시아를 단호히 거부하는 발판을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혹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심리학적으로는 개인 안에 있는 생존의 욕구, 성에 대한 욕구, 힘의 욕구, 자유와 즐거움의 욕구의 노예가 되지 말고 그것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우라는 초대라고 볼 수 있다.6)


 2.2. 순회 설교자, 유별난 선생


 세례 받은 후 예수는 떠돌이 설교자이자 선생이 되었다. 유대교의 랍비나 율법 교사들은 거처를 옮겨가며 가르치는 것이 상례였다. 이때 흔히 좋아하는 선생 밑에서 공부하려는 문하생들을 뽑아 일단의 무리를 만들어 동반하였고 시나고가에서 가르치는 것이 랍비들의 관습이었는데, 언덕, 벌판, 길가에서도 가르치곤 했다. 하지만 예수가 선포한 메시지의 내용, 가르치는 방법, 제자들과의 관계는 그 당시 교사들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첫째,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였다.

 둘째, 자신이 그 왕국을 일으키는 사람으로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가르침에 권위가 있어 군중들을 놀라게 하였다. 예수 시대의 랍비들은 히브리 성서와 다른 랍비의 가르침을 공부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르칠 때에는 으레 성서를 직접 인용하거나 존경하던 다른 랍비의 말로 열을 올렸다. 이와는 달리, 예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의 심판자가 곧 자신임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예수는 “너희는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다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마태 5:20·48)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관행을 깨뜨리는 행위였으나,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넷째, 비유를 사용함에서 다른 교사들과 판이하게 달랐고 기적 혹은 징표 또는 이상한 이적을 행한 점에서도 다르다.


 2.3. 예수의 제자들


 그 당시 랍비의 제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승을 찾아가 그에게 배운 말을 자기 입으로 반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가르침을 받고 나면 곧 스승을 떠나 랍비로서 독립하였다. 이것이 랍비가 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이런 관계가 아니다.

 먼저, 제자들이 스승을 택한 것이 아니라 스승이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제자들이 선뜻 응하였다. 또한 제자들이 입으로 외울 가르침을 주지 않고, 당신 자신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대열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와 같은 독특한 임무는 오늘도 우리에게 성부와 사랑으로 맺는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하면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파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예수가 당신 생전에 그리고 미래에 중심 역할을 담당할 제자는 열둘이었다. 이들이 ‘사도들’인데, 복음서에는 흔히 ‘제자’로 나온다. 

 그렇다면 왜 열둘인가. 구약의 이스라엘이었던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고 그 자손들이 12지파를 구성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12사도들은 믿음의 새 공동체, ‘새로운 이스라엘’의 초석임을 의미한다.

 사도는 ‘파견된 자’란 뜻이다. 이 말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는 예수의 기쁜 소식을 전 하도록 파견된 사람에게 적용되었고, 그들이 예수의 권능을 입고,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말을 설교하고 치유하며 세례를 통하여 제자들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다.        

  

 2.4. 하늘나라의 선포


 예수의 신원, 생활, 사명 그리고 메시지의 중심과 그분의 모든 언행은 하늘나라에 대한 개념이었다. 그분의 비유는 하늘나라를 지적하고 묘사하는 이야기였고, 기적은 백성들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의 표징이었다.

 하느님 나라의 기초 개념은 예수가 도입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야훼가 만물의 왕이심을 공동으로 인정하였다.7) 하느님의 왕권은 놀라운 창조에서 맨 처음 인식되었다. 후대에 유대인들은 다윗 시대의 군주제를 경험하면서부터 이 믿음이 국가적·정치적 왕권을 확립한다는 개념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백여 년 이상 로마의 지배를 겪었던 예수 시대에 이르러, 로마인을 축출하여 군사적으로 나라를 평정할 임금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타도는 군사 지도자로 등장하리라 예상하는 메시아에 의해서 성취된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이 같은 민족 신(神)적 기대를 부정하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이해 역시 백성들의 일반적인 이해와는 너무나 동떨어짐을 증명코자 하였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라는 말 자체에서 다소 혼란을 느낀다. 이 말 속에 지역 혹은 장소 개념을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합당한 용어는 ‘하느님의 통치’ 혹은 ‘하느님의 왕권’이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야훼께 대해 기도하고 예배할 때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법이 없고 그 대신 ‘주님’, ‘지극히 높으신 분’ 혹은 ‘거룩하신 분’으로만 호칭할 정도로 외경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는 이 같은 믿음과 관습을 무시하고, 하느님을 “아버지, 나의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불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빠는 아라메아어로서 ‘아버지’보다 더 친근한 호칭으로 유대 어린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쓴다. 즉 예수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라는 말로 부를 수 있게 했다. 어느 유대인도 감히 이런 말을 하지 못하는데 어린아이의 감정이 섞인 말로 예수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자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자극을 받았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느님이 항상 베푸시는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인간의 마음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하느님 사랑의 지배 내지 통치로 보았으며, 그 결과, 상호간의 조건 없는 사랑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사회 질서가 확립된다고 생각하였다. 


 2.5. 언어 상의 문제


 신이란 용어 자체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 식의 성적 개념이 없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 부르기보다 부모로 호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문제는 과거의 하느님을 부성으로 표현한 개념은 언어의 한계성을 가진 과거의 관습이고 성적(性的)인 요소와는 무관하다.


 2.6. 예수의 사랑에 대한 이해


 예수의 하느님은 의인과 죄인, 부자와 가난한 이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 모두에게 당신 사랑을 베푸신다.(마태 6:26․29) 이것이 하느님을 보는 혁신적인 안목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나친 민족주의에다 율법주의자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특히 바리사이파가 심했는데 토라 안에만 하더라도 안식일의 휴식과 정결례를 비롯하여 음식, 식사 준비, 할례 등등 6백 개가 넘는 규정이 있었다. 기본적 윤리 원칙이던 것이 과도한 율법주의로 변하여 백성들을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속박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율법의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었고, 좁은 민족주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율법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사랑의 요구는 끝없는 용서이며, 우리를 용서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우리의 뜻과 관계된다고 주장하였다.(마태 6:14․15, 마태 31:46)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는 하느님의 한량없고 제한 없고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다. 이 사랑이 항상 우리 가운데 있으며,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쏟아져 그 사랑의 힘으로 사람을 자유케 하고, 서로를 조건 없이 사랑하게 한다. 하느님의 왕권은 하느님이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때 현실로 이루어지고, 우리가 그분의 뜻과 합칠 때 하느님은 우리 마음을 지도하신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의 선이다.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살려고 하는 거기에 평화와 기쁨 만인에 대한 사랑이 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가 완전한 현실로 드러나는 때이다.

 최근에 와서 뇌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뇌는 우리 인간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다만 전제 조건은 창조주의 의지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주의 의지에 역행하는 행위를 하면 아무리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점차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뇌의 명령은 창조주의 명령과 일맥상통한다. 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창조주가 바라는 세상은 결국 자기실현을 향한 세계로 귀착하게 된다. 자기실현이란 올바르고 훌륭한 생활 태도, 남에게 비난받지 않고 즐겁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생활 태도를 몸에 갖추는 것이며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훌륭한 행동을 할 때 최고의 행복과 기쁨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뇌 내 모르핀에 관련된 에이텐 신경의 활동 유형을 살펴보면 역시 이것이 인생의 진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에이텐 신경은 원뇌(原腦)에 있으며 파충류나 개나 고양이도 갖고 있는 신경이다. 이 신경은 쾌감신경이라 불리우는데, 이 신경세포가 자극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섹스나 식욕의 만족감을 쾌감이라 부르는 이유도 모두 이 신경 세포가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뇌 내 모르핀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경은 불가사의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일반 신경은 자극을 받는 방향이 플러스로 나가든 마이너스로 나가든 일정 정도에 도달하면 브레이크가 걸린다. 성욕이건 식욕이건 충족되면 그것을 억제하는 호르몬이 나와서 욕구를 멈추게 된다. 이것을 네가티브 피드백이라고 한다. 그런데 에이텐 신경이 인간이 진선미에 관계되는 행위를 하거나 정의로운 행동을 할 때는 그것을 방해하는 물질이 분비되지 않고 뇌내 모르핀이 계속 분비되어 나온다. 이것은 마약 모르핀에 비해서 그 효력이 훨씬 크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실현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커다란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물리적 현상에서 창조주의 의도나 목적을 느낄 수 있다.8)


 2.7. 하느님의 지배


 인간의 뇌가 하느님의 의지에 합당하게 살 때 행복 모르핀을 내보내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 상단이 ‘하느님의 뜻이 땅9)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하단에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3)하며 간청한다.

 악의 공통 언어는 죄이고 우리가 이것을 우리 마음에서 느낄 때에는 ‘시험에 든 것 같은’, 그래서 유혹받는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어떤 의미에서든 모든 종교는 악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대처해왔다. 때로는 악의 근원이 의인화되거나 인격을 가진 자로 인식되어 악이 악마 또는 사탄으로 출현한다는 표현들이 많다.

 우리들 모두는 죄와 악의 문제에 수없이 직면하면서 살고 있지만, 예수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 악과 그 모든 표현들을 정복하신다. 그래서 예수를 통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장 잔인한 형태로 드러난 악의 결과를 감수하려는 당신 의지를 표현하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를 일으켜 부활케 함으로써 죽음조차 정복하신다. 기쁜 소식이 말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의 예수가 마침내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악은 굴복한다.


 2.8. 예수가 치유하시다 : 하늘나라의 징표


 예수의 기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기적에는 육체적인 치유10), 악령 또는 마귀가 예수의 명령으로 사람에게서 물러가는 구마(exorcisms), 생명의 구원 등이 있다. 예수는 세 번에 걸쳐 죽음에서 사람을 살림으로써 죽음 자체를 분명히 정복하였다(생명의 구원). 기적 가운데서도 가장 놀라운 일인데, 물위를 걷거나 폭풍을 가라앉히고, 빵과 물고기 몇 마리로 수천 명을 배불리는 등 자연을 정복한 행위를 하셨다(자연의 기적).

 예수 시대의 사람들은, 병원이 없었고, 정신 질환으로 고생하더라도 찾아갈 정신병원이 없었으며 의술은 초보단계였다. 나병환자들은 도시에 근접하지 못했고 무리를 지어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미친 사람들은 동굴 속에 갇혀 밤낮으로 신음하였고 이들은 모두 성전예배를 금지 당하였다. 백성들이 환자들을 거부하고 유기한 이유는 그들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공포심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질병을 조상이나 당사자의 죄를 징계하는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예수의 사명, 특히 기적을 통하여 드러나는 결과는 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이 온갖 형태로 출현하는 악을 없애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바로 이 때문에 예수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며 간구해왔던 새 나라를 세워줄 사람, 곧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자 진정한 메시아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기적은 예수가 선포하신 기쁜 소식과 관련될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공관복음에서 기적과 치유에 사용하는 공통적인 말은 ‘권능’이고, 요한 복음서에는 ‘징표(sign)’란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적은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며, 특별한 형태로 악의 세력까지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징표였다. 이것이 예수가 ‘악령’을 좇아내면서 보여주는 구마의 주요 본보기이다.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은 악의 세력과 직접 대면하시고 정복하셨다. 복음서를 보면, 악이 사람들의 모든 생활 속에, 특히 그들의 고통, 괴로움, 죽음에서 활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디. 이 모든 경우를 보고 예수는 치유하고 생의 활기를 되찾아주셨던 것이다. 자연 기적도 모든 창조물을 지배하는 하느님의 통치가 이 사람, 예수 안에 항존하며, 그분을 통하여 계시되었다. 바로 야훼께서 혼돈을 몰아내고 세상에 창조의 질서를 세우셨듯이(창세 1:1․2), 이제 예수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 세상의 모든 혼돈을 정복하신다. 그들이 사막에서 방황할 때 바로 야훼께서 당신 백성에게 특별한 음식인 만나를 주셨듯이, 이제 하느님은 예수를 통하여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어 무리를 먹이신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홍해 바다를 갈랐듯이(출애 14:15), 이제 예수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 폭풍을 가라앉히고 물위를 걸으신다.

 핵심은 모든 기적은 예수 안에 임재하고 예수에 의하여 드러난 사랑의 힘, 하느님 사랑의 구원력, 치유력의 표현이다. 그분과 함께 걸었고 그분을 만졌던 사람들이 전혀 이상하게 생각지 않은 것은 그분이 참으로 특별한 권능을 지닌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3. 최후만찬, 죽음과 부활


 예수처럼 사랑과 동정을 베푸는 일에 몸 바친 사람이 어떻게 온갖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 되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분은 3년 남짓 설교하시다 대략 A.D. 30년 35세란 젊은 나이에 극적으로 생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을 맞았다. 

 최후의 만찬은 유대인들이 최대의 명절로 경축하는 해방절 가까운 시간에 거행되었다. 이 축제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야훼께서 오래 전에 어떻게 하여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또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야훼께 얼마만한 충성을 바쳐야 하는가를 상기하였다. 그때부터 그들은 ‘계약의 백성’들로 알려졌고 예수께서 당신의 행위를 ‘새 계약’으로 간주하셨다. 복음서의 전통은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그 식사에 불러 모아서 임박한 죽음을 마음으로 다짐하였고, 또 식사 자체와 십자가상 죽음을 실제로 연관시켰음을 분명히 시사한다. 이 종교적 식사에는 해방절에 죽여서 먹는 빠스카 어린양이 포함되는데, 예수는 당신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며, 우리를 위한 희생물로서 당신의 피를 흘리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는다고 말씀하심으로 빠스카를 성체성사와 연결시키셨다.


 3.1.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외로움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경험하는 몇 가지 감정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걱정하지도 않는 내면의 무서운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럴 경우가 되면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오로지 자기 홀로 대처해야만 한다. 심한 외로움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제아무리 고독의 아픔을 비교하여 설명해주더라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게쎄마니 동산의 예수가 겪은 고뇌의 체험이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가 게쎄마니 동산에서 당한 고뇌는 순전히 인간적인 공포와 암흑의 시간이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분은 당신을 둘러싼 모든 분쟁이 극한 상황에 이르를 때 그 시간이 오리라 예상하였고,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신을 두고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은 당신 백성의 역사를 잘 알았고, 예언자를 대하는 방법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예언자들을 반대했으므로, 예수 역시 이런 반대를 예상했을 것이다. 이런 확신은 예수 바로 앞에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처형했을 때 더욱 굳어졌으리라.(마태 14:3․12) 예를 들어, 한번은 다윗의 도성을 바라보고 한탄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구나!”(마태 23:37)

 그리고 이사야의 주제인 ‘고난 받는 종’에서도 역시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예수는 분명히 이런 전통을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그 가능성을 짐작했을 것이다. 즉, 하늘나라를 선포하다가 고난 받고 죽을 가능성을 그분이 짐작했음은 확실하다.

 만일 예수가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기회주의자적인 망상가였거나, 아니면 되어지는 일은 확실히 알지만 그래도 겁에 질려서 마지못해 자신의 뜻을 희생한 사람으로 비쳤다면 기쁜 소식은 즉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게쎄마니의 예수를 회상하면서, 그분이 한편으로는 떨리고 피했으면 하는 체험을 하였고, 심지어는 아버지의 뜻에 맡겨버리고 마는 그런 인간적 투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그분은 아빠, 아버지라 부른 그분에게 당신의 온갖 희망을 걸었고, 위로를 찾았으며, 힘을 얻어야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맡겼을 때 비로소 예수는 다가오는 운명을 감내할 용기가 생겼던 것이다.


 3.2.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형은 잔인한 형집행 방법으로 오랫동안 사람을 매달아두어 끝내는 출혈과 질식으로 죽게 하였다. 예수가 6시간 이내에 죽자 빌라도와 경비병들은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다리를 꺾으려다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그냥 두는 것은 유대교의 율법에 어긋나고,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빨리 죽에 하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군인들이 와서 보니 예수는 이미 죽어있었다. 루가만이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가 23:46)”고 기록하였다.

 예수의 죽음은 악의 세력과 대적한 그의 결정적인 전투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예수의 부활로 승리가 확정된 전투였다. 마르코 복음 10장 45절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이 윤리의 대전제라면 예수가 죄를 지어본 적이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광신자의 죽음이라는 일종의 정신병으로 분류해서 악에게 패배한 또 하나의 허무한 죽음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최종적인 문제이며 수수께끼인 죽음이라는 과제는 영원히 절대고통의 폭력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허무한 숙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윤리의 대전제 즉 선하게 살아야할 목적과 의미를 치워버리는 것이요, 가치관에 대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일으켜 세우셔야 했다. 그래서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고통관과 고통은 신비라는 발전된 고통관 그리고 마지막 때에 와서는 고통은 부활로 가는 좁은 문이며 반드시 그와 함께 이 길을 가야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고통에 새로운 희망과 의미를 부여해준 것이 예수의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역사적인 사건 그 이상의 것이 되었고 기쁜 소식, 복음이 되었다.


 3.3. 부활 : 죽음을 이긴 하느님의 승리


 예수의 죽음 이후, 아리마태아의 요셉이란 사람이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가서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청하여 그분의 시체가 묻히게 되었다. 그 당시 사형수를 묻는 관습은 다른 죄수들의 시체와 함께 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요셉은 시체를 내려다가 미리 사가지고 온 고운 베로 싸서 바위 무덤에 모신 다음,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아놓았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 무덤을 경비병들을 시켜 사흘만에 부활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날이 되기까지 그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하였다.(마태 28:62․66)

 여기서부터 각 복음사가들은 일어난 일들을 제각기 독특한 시각에서 설명한다. 이 기사들의 공통적인 특색은 여러 사람들이 무덤에 갔으나 예수의 시체가 거기에는 이미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를 통하여 예수는 죽었으나 이미 살아나셨으며, 곧 다시 만날 것임을 알았다. 이 증언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극히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공포와 불신이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분명하지만 매우 놀라운 형태로 그들 사이에 함께 계시는 예수를 체험한다. 그리고 그분이 말한 모든 것이 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 기사가 서로 다른 점을 가지고 이 기사의 성격이 모순이며 허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만일 복음사가들이 실제로 우리를 속이려 했었다면, 모든 기사를 서로 상의하여 비슷하게 기록하지 않았을까?

 부활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문기자들이나 과학자들처럼 세부사항을 취재, 검사, 연구한 자료와 정보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부활기사에서 표현하고 있는 내용은 내용이 본질이 아니고 진리를, 역사적인 사건 그 이상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과학적으로 그 존재를 증명할 대상일 수 없다. 마치 천지 창조의 장면을 인간이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부활의 진행과정을 아기가 출산하는 과정처럼 과학적 자료로 제공 할 수는 없다. 

 성 바올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되,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14)

 역사의 예수를 믿음의 그리스도로 이해함에 있어서 부활보다 더 핵심적이며, 더욱 중요하고 근본적인 신앙은 없다.

 그분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킨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보면 부활이 초대 신앙공동체의 핵심 믿음이었다. 사도행전에 수록된 첫 번째 설교, 성 바울로의 편지, 그리고 4복음서가 이 사실을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체험이 사도로 간택되는 핵심 조건임을 알 수 있다.(행전1:21․22)

 이밖에도 빈 무덤과 예수의 발현이 부활의 실재를 증명한다. 비록 부활 기사들이 서로 상충되는 점이 있긴 하지만, 모든 기사는 “무덤이 비어 있었다”, “예수는 믿을만한 증인에게 발현하셨다”는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이구동성으로 보도한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점에서 만일 로마인들이 찾을 수 있었다면 분명히 예수의 시체를 찾아냈으리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예수의 시체를 공개적으로 진열했더라면 제자들이 그의 부활을 거짓으로 꾸며냈다는 이야기는 즉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시체를 훔쳤고 어디다 감췄느냐, 아니면 깡그리 없애버렸느냐? 이 질문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많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기보다 순교 내지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매장된 시체 때문에 기꺼이 죽으려고 했을까? 더욱이, 복음서는 빈 무덤의 증인으로 부인들을 내세운다. 부인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법적 증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묘사된 이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부인들의 말을 믿었을까?

 비록 아무도 부활 장면을 실제로 생중계, 혹은 녹화하지 못했고 그 장면에 대한 자료가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했다고 주장하였다. 복음서는 누가, 어디서, 언제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목격했느냐에는 다소의 혼선이 있지만, 발현 사실만은 공통적으로 기록하였다. 예수가 발현했던 상대는 모두 그분이 죽었음을 명백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기가 죽었고 실망했던 사람들이다. 그다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당신을 계시하시자, 그들은 한결같이 안온하고 평화로웠다고 술회하였다. 끝으로, 그분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혹은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6)”. 부활하신 예수를 아는 것은 개인적인 계시나 비밀로 지켜진 것이 아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던 것이다.

 빈 무덤과 예수의 발현 기사는 서로를 보완하고 결속시키기 때문에 쌍방이 다 중요하다. 빈 무덤이 없으면, 예수의 발현은 실망한 사람들의 환상 내지 환영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반대로 발현이 없으면 빈 무덤은 속임수로 생각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분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예수의 추종자들이 부활 이후에 용감무쌍한 증인들이 되어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선포한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와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였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께 대한 믿음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확신이자 약속이며, 교회의 시작과 그 지속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기도 하다. 이 모든 확신과 약속이 어떻게 상상한 부활 이야기로 가능할까? 실제의 부활이 없었다면 도대체 있을 법한 이야기들인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으나, 크리스챤 성서의 저자들이 제자들의 내적 체험을 설명하고 전달할 목적으로 부활을 꾸몄을 것이라고 말한다.

 복음서를 보면, 어떤 내적인 방법으로 그들이 체험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살아계심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만나시는 예수를 묘사한 장면들이 여럿 나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사람들을 접하시며(요한 20:27) 그들과 함께 먹고(루가 24:41․43), 그리고 함께 거닌다(요한 21:15․22).

 동시에 복음서들은 부활 후의 예수가 그전과 다른 몇 가지 점이 분명히 있었다고 암시한다. 처음에는 당신 제자들조차 그분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루가 24:15, 요한 20:14), 그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분임의 의심하였다(마태 28:17, 루가 24:41), 그리고 예수는 시공간의 모든 제약을 전혀 받지 않고서 자유롭게 내왕하는 듯 보였다(루가 24:31, 요한 20:19․26).

 그러므로 부활을 통하여 참으로 변화된 예수가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다. 그분은 새로운 존재 양식을 경험하고 계신다. 부활하신 예수는 그럭저럭 생명을 되찾은 시체도 아니요, 갑자기 깨어나 잠에 취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분은 같은 예수였지만 전혀 달랐다. 부활한 생명은 우리가 체험하는 지상생활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며, 사후에 이 생명을 계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새로운 존재 양식,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어떤 존재인 것이다. 이런 생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할 수 없다. 저자들도 이 같은 차원을 상상으로 지어내어 설명할 수 없었다. 예수의 실제적인 부활을 설명하는 복음서 자체의 증거는 저자들이 지어내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오묘하다는 점. 더욱이 여러 저자들이 각각 독립된 입장에서 따로 떨어져서 만들어 내기란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증거일 수 있다. 


 3.4.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자료와 논증이 실제 ‘삶과 죽음’의 문제조차 항상 심각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인간의 한계성과 각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별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면서 인생을 살찌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께 대한 그분의 주장과 가르침, 곧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에 대한 증명이다. 또한 부활은 예수께서 지상에 사셨으며, 메시아, 그리스도, 우주의 주님이심을 증명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간생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부활로 인하여 우리는 ‘풍요로운 삶’과 행복이 단지 엄격한 신앙생활이나 새로운 자기 개선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의 삶에는 새로운 ‘중심’, 새로운 ‘생명력’, 새로운 ‘힘의 원천’이 주어져야 하는 법이다. 우리 인생의 이 새로운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항상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11)

 예수 안에서 행하셨던 하느님의 활동이 우리 각자에게서 효력을 발생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 우리 심중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사시는 것처럼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죽어도 살리라는 보증이자 약속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부활은 예수께서 옳았음을 확인해준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얘기하신 면에서 그분이 옳았다. 속이 텅 빈 종교의식을 거부하고 하느님과 인격적인관계를 주장하심에서, 서로의 용서는 항상 자신을 주는 것이며 복수보다 더욱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는 확신에서 그분이 옳았다.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과 애정을 베푸심에서, 부자는 가난한 자와 나눠야한다는 가르침에서 그분이 옳았다. 인간을 서로 갈라놓는 모든 기준, 예컨대 사회적 신분, 성의 차별, 인종차별, 경제적 지위, 정치적 야합, 심지어는 신앙상의 독선주의를 절대 배격함에서 그분이 옳았다. 그리고 끝으로,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함에서 우리는 옳다.

 부활을 연구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꼭 필요한 문제이다. 부활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지나칠 정도로 철학적이거나 방어적이어서 ‘부활이 없었다’ 혹은 ‘신념 내지 신화였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성서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거나 독선적인 주장을 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부활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한없는 흥분과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초자연적인 신비를 당황하지 않고 관조하게 된다.


 3.5. 예수 승천


 부활과 발현 후에는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셨다(행전 1:9․10)”. 그러나 하늘은 어디며 무엇 하는 곳인가? 그리고 그분은 어떻게 여기서 ‘그곳으로’ 가셨는가?

 이것이 흔히 제기하는 단순한 질문이긴 하지만, 대답은 그리 쉽지 않다. 성서는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한다. 예수 승천을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한 분은 루가뿐이고 사도행전이라 부르는 루가의 기록에서 재차 언급되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아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손을 들어 축복해주셨다. 이렇게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도행전의 승천기사에서 예수는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셨다.12)


 결론 : 바로 여기, 바로 지금


 복음사가들은 매우 단순하게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하늘’을 생각할 때, 그 하늘은 자동적으로 ‘저 높은 곳’을 향한다. 예수시대의 사람들은 우주가 여러 층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땅을 기준으로 할 때 ‘하늘’이 그 위에 있고, 여기에 창궁(sky)과 별이 걸려있다. 하계(下界, underworld) 혹은 ‘죽은 이들의 거처’는 땅 밑에 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 저편에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러므로 성서의 저자들이 예수를 부활하신 메시아로 이해할 때 이러한 시간과 공간 개념을 가지고 표현한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고 본다. 이런 우주관에 의하여 그들은 예수가 특별한 시공간인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승천의 주요 가르침은 부활 이후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가셨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활동하실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당신 아버지께 가셨다”는 말로 부활하신 예수를 두고 말할 때 우리가 자연스럽게 알아듣는 것은 인간경험과는 멀어지는 예수, 우리와 그분의 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급한 질문과 대답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막연하게 하느님은 저기에 계신다고 하는 것이 옳을까? 만일 이런 믿음을 가졌다면 분명히 예수의 전체 메시지와 반대되는 견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이렇게 가르쳤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저기’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계신다. 어린이들까지도 하느님이 ‘곳곳에’ 계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생각해보면 만일 하느님이 항상 현존하신다면, 우리를 속박하는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예수는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다. 분은 참으로 2천년 전에 있었던 어느 한 장소와 시간 그리고 특수한 인간 집단에 얽매어 있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장소와 시간 및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 모든 인류를 당신 아버지께 인도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며 돌보신다.

 그런데, 만일 예수께서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을까? 그분의 말씀으로 대답한다면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은 사랑의 관계에서 우리는 예수를 만나 뵐 수 있다. 또 이런 말씀이 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여기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함께 자리하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예수를 만날 수 있음을 말한다. 최후 만찬 시에 예수는 빵과 포도주 잔을 드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3:19) 이 말씀으로 우리는 미사성제 거행이라는 특별한 예식에서 예수를 뵙는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분이 당신 제자들에게 또 제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우리 마음속에 떠올려야 하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예수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가 우리와 똑같은 신체적․정서적․지적․영적인 욕구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 안에서 그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그가 우리 안에 부활하여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생활하고 계심을 체험하는 동기가 된다. 이런 과정에서 역사의 예수에서 믿음의 그리스도로 들어가는 길이 되기를 기도한다.


                               ◉ 끝기도 :  “아멘. 꼭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 영광경



참 고 문 헌


토마스 잔지그, 『역사의 예수, 믿음의 그리스도』, 이석은·최정오 역, 도서출판 계성(1985)


하루야마 시게오, 『내뇌혁명 上』, 반광식 역, 사람과책(1996)


윌리엄 글라써, 『결혼의 기술』, 우애령 역, 한양출판(1996)


백민관, 『성서의 수수께끼-그리스도와 현대인의 삶』, 청노루신서(1988)



가톨릭대학 교리사목연구소 外,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94)



 

출처 : 역사의 예수 믿음의 그리스도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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