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천안시 북면 납안리46-1번지로 되어 있다. 한국의 성지 중에서도 보기 드문 해발 5백 고지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지는 차령산맥 줄기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봄, 가을에는 꽃들과 단풍으로 찾아 온 순례자들은 감탄을 하곤 한다.
성거산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수행원들과 함께 성환 지역에 머무르면서 잠시 쉬는 동안 오색구름이 맴돌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면서 이름을 지어준 것이 ‘거룩할 성(聖)'자에 '거할 거(居)'자로 명칭을 지어준 다음 이 산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도 온양 온천에 목욕을 하러 올 때마다 이 곳 성거산에 들려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곳 성거산 성지 주변은 박해 시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교우촌)이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을 보면 서덕골, 먹방이, 소학동,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교우촌 (공소)등이 있었으며 이 교우촌중 서덕골 교우촌에는 뮈델 주교님께서 배티 삼박골 교우촌까지 사목 방문시 거쳐가는 경로였으며, 이 곳에는 한국의 제2대 최양업 신부님의 큰 형님 최영렬씨와 셋째 아우 최선정(안드레아)가 이 교우촌에서 잠시 성장하신 곳이기도 하고 최양업 신부님도 이곳을 드나드셨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시 니콜라 칼레 신부(강신부), 페롱 신부, 뮈델 주교님, 두세 신부, 베르모델 신부가 숨어 지내며 암암리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며,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는 병인 박해 시 동료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채포되자 전교 여행을 중단하고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에서 숨어 계시다가 포졸들에게 쫒기면서 연풍을 지나 괴산 진천을 거쳐 베티 삼박골 교우촌에 머무르다가 마지막 소학골에 와서 은신하다가 페롱 신부와 함께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조선을 떠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또한 소학골 교우촌에는 병인박해시 10분의 순교자가 탄생하셨는데 5분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하셨고, 5분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하셨는데, 공주 감형에서 참수하신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배문호(베드로), 고의진(요셉), 채서방 며느리 등 다섯 분은 성거산 성지 제1 줄무덤에 안치되어 계신다. 그리고 제1 줄무덤에는 38기, 제2 줄무덤은 36기의 묘봉이 있지만 사실은 시신(屍身)들이 겹쳐져 묻혀있어 묘봉 수는 더 많이 있어야 한다 1959년 미 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 개설 당시 도로 상에 있었던 묘봉 수는 107기 였다고 이장(移葬)한 6분의 증언은 말하고 있다. 이곳의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은 병인박해 시 내포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한 선조들이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생명을 바쳐 증거한 순교자님들'의 신앙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침묵과 오고가는 사람 없이 벌, 나비와 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성거산 성지의 무명 순교자들은 침묵의 역사 속에 감추어진 성지이다.
성지 시설로는 제1 줄무덤에서 제2 줄무덤까지는 530미터 되며, 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성모상이 놓여있는 그 자리에 지하수를 개발하여 수도관으로 공급될 수 있는 물이 곳곳에 나오고 있으며,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쉴 수 있는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제2줄 무덤에서 2.1㎞의 순교자의 길에는 55개의 대형 호롱 등에 한국 103위 성인과 이 곳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 있어 전구하며 묵상 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한편 교우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골 교우촌에는 박해 시 교우들이 살던 집터와 태풍에 의해 쓰러진 돌배나무가 있어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이곳 성지는 깊은 산골이라 소음이 없어 조용하고 공기가 너무 맑고 전망이 아름다워 한번 순례의 길에 오른 사람들은 다시 오고 싶어 하는 성지이다. 특히 무명 순교자를 상징하는 각종 야생화가 계절마다 피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주변 자연 환경과 함께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출처 : 대전교구 홈페이지]
박해 시대의 사목 중심지 소학골
새로 찾은 교회 사적지 중 하나는 목천의 '소학골'(일명 씨아골 도는 쇠약골)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은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 독립 기념관 뒤편의 흑성산 가까이 있는 성거산(579m)의 동쪽 계곡이다. 지금 이곳을 가려면 북면 도촌리를 거쳐 도보로 가거나 천안에서 성거읍을 거쳐 입장으로 가다가 오른족으로 나 있는 성거산 통신 도로(입장면 시장리)를 타고 가면 된다. 차량을 이용하려면 두 번째 노정을 택해야 한다.
이제 소학골은 폐동이 되었고 그 아래 '사리목'에 세 집이 남아 있는데, 그마저도 농한기에는 두 집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1910년 무렵만 해도 소학골과 사리목에서 모두 공소가 치러졌으며, 성거산 남쪽에 있는 옛 교우촌인 목천의 서덜골(일명 서덕골)과 매일골, 먹방이(현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에도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후 1930년대까지 신자들이 계속해서 이주하면서 공소는 그 아래쪽의 마을로 이전되었고, 지금은 목천의 송전 공소만이 유지되고 있다.
성거산 자락의 깊은 산중에 신자들이 정착하여 신앙 공동체를 일구기 시작한 것은 교회사에서 전이형(轉移形) 공동체가 사라지고 정주형(定住形) 공동체가 형성되는 1830년대였다.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백부인 최영렬도 이 무렵에 '서덜골' 교우촌으로 이주하였으며, 기해 박해 이후에는 최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박해가 계속되면서 서덜골 이웃의 소학골에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 척박한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생활하거나 화전을 일구어 얻은 오죽잖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이 깊고 높은 산중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덜골과 소학골 교우촌은 산자락과 골짜기로 이어지는 진천 백곡의 배티, 삼박골 교우촌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864년 칼래(Calais, 姜) 신부는 자신의 거처를 경기도 손골(현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에서 소학골로 옮겼다.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사목 관할 구역을 조정하면서 경상도 서부에서 충청도·경기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비교적 건강이 좋은 칼래 신부에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소학골은 칼래 신부의 여름 휴식처요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처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아주 좋은 피신처입니다. 마치 들짐승처럼 사방에서 쫓기는 선교사가 평화로운 이곳에서만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가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칼래 신부가 파리의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자 서한).
칼래 신부는 때때로 백곡의 삼박골로 가서도 휴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소학골·삼박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칼래 신부는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도중에 1866년의 병인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신부는 그때부터 포졸들에게 쫓기면서 문경 인근의 교우촌과 동굴을 오가며 은신하였으나, 발각될 위험이 커지자 여름 휴식처가 있는 소학골 교우촌에 가서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6호(2000년 5월호), pp.113-114]
순교자들의 본당 소학골
1866년 5월 10일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을 출발한 칼래 신부는 이틀에 200리를 걸어서 연풍, 괴산, 진천을 거쳐 배티의 삼박골에 도착하였다. 신부는 삼박골의 거처에서 신자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5월 말까지 보름 남짓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목천 소학골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한편 그의 동료 페롱(Feron, 權) 신부도 7월에는 소학골로 와서 칼래 신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10월 초에는 둘이 함께 소학골을 떠나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소학골에 박해의 풍파가 몰아친 것은 이로부터 얼마 안 되어서였다. 이때 포졸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신자들이 풍비박산하여 도망하였으나, 최천여(베드로)와 최종여(라자로) 형제, 칼래 신부의 복사를 한 배문호(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 등은 교우촌에 남아 있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즉시 이들을 공주로 압송하였고, 4명 모두 공주 영문의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아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에 순교하였다. 순교 후 이들의 시신은 한 신자에게 거두어져 소학골에 안장되었다. 그 후에도 소학골에서는 다시 몇몇 신자가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배문호의 무덤은 현재 사리목에서 소학골로 가는 길목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나머지 순교자들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후손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타지로 떠돌다가 신앙의 자유 이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탓에 선조들의 무덤에 대해 전혀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해가 끝난 뒤 선교사들은 다시 성거산 골짜기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신자들을 찾았다. 특히 두세(Doucet, 丁) 신부는 서덜골에 여름 휴식처를 두었으며, 베르모렐(Vermorel, 張) 신부도 한때 이곳에 거처하였다. 1900년 1월 8일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 지역을 순방하고 이러한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곳 순교자의 무덤과 교우촌 신자들의 줄무덤이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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