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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리

" 판소리 임방울 명창 "







 
임방울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 쑥대머리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방울 명창(1904년~1961년)>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늑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송정리 도산동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 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  
 
-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 -

 

 1959년 7월 17일 조선일보 후원으로 원각사(圓覺寺)에서

국창임방울 독창회가 열렸다 그는 몸이 쇠약 했으나

소리를 하고 싶은 의지와 집념으로 계속 공연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