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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및 세계교회현황

" 정난주 마리아 묘소 "

정난주 마리아묘
제주에 천주교가 전래되기도 전인 1801년에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 마리아가 제주 대정군
(대정현)으로 유배오셨습니다.우리교회사에서 두분이 육시형을 당하게 되시는데 1801년
40세의 유항검과 26세의 황사영이십니다.육시형은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행하는 최대
극형으로 사지를 여섯 토막을 내어 전국 각지로 보내 백성에게 보여주는 형벌입니다.

능지참수후 어머니는 거제도로, 아직 어리기 때문에 참수를 피한 2살난 아들 경한은 추자도
로, 정난주 마리아는 이곳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오는도중에 뱃사공을 매수하여 아들 경한
을 추자도 예초리 갓바위에 올려놓았고, 이를 발견한 오씨성을 가진 사람이 거두어 키우게
되었으며, 이 이후 지금도 추자도에선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다산 정약용과 정약종의 형님인 정약현의 따님이며,어머니는 이벽 성조의
누님이시니,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키우셨을 것입니다.

정조대왕이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신 황사영의 손목을 친히 잡고"내가
너의 영특함에 감복하였나니, 네가 스므살이 되면 중용하겠다"
하던 분을 지아비로 맞이했던 양반 집안의 따님이  관비의 신분으로 유배오셨으니,

관비로서37년간의 고단한 삶이 어땠을까?
당시에 관비는 방지기 생활도 하여야 했으니 28세의 그녀로서 그 치욕을 어찌 견디셨을까?
다행히 당시 관비를 관리하던 김석구 집안에 유모로 들어가서 한양할머니라 불리며
부덕과 인품을 지닌 여인으로서 주위에서 존경과 신망을 보냈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그녀의 묘소를 계속 관리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죽고 140여년이 지난
1970년대에서야 그녀의 묘를 확인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신앙선조에 대해 우리가 무심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당시의 여인으로서 이름도너무나 고운 난주(아명 명련)
마리아의 삶을 묵상하며,추자도에 묻혀있는 아들과 양주에 묻혀 있는 지아비 황사영도 함께 기억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