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호(天呼) 사적지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1백50년간을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이다.
천호 사적지는 호남 지역이 자랑하는 대표적 사적지로 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불어 닥치던 1866년 병인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성 이명서(베드로), 성 손선지(베드로), 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요셉)과 같은 해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분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다. 그 밖에도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천호산에 종적을 감춘 채 묻혀 있다.
전주에서 북서쪽으로 불과 30킬로미터 남짓한 천호 사적지는 인근의 숲정이, 여산 나바위 등 호남 지역의 유명한 성지와 사적지를 지척에 두고 있어 순례길에 이들 성지들을 함께 둘러볼 수도 있다. 게다가 1시간 거리 안에 대둔산, 모악산, 마이산, 계룡산, 대아리 호수, 옥정 호수 등 빼어난 명산과 경관이 수려한 호수들이 자리하고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다.
천호 사적지까지 승용차를 이용하려면 호남 고속 국도 이리 인터체인지에서 천호 사적지로 가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손쉬운 길이다. 이리 인터체인지에서 사적지까지는 대략 10킬로미터 정도로 약 5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리 인터체인지로 나오면 바로 이리와 봉동, 천호 사적지로 가는 이정표와 갈림길이 있다.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 봉동 쪽으로 500미터쯤 가면 다시 비봉과 사적지로 갈라지는 지방 도로가 좌측에 보인다.
비봉 쪽으로 2킬로미터 들어가면 백제 전문 대학, 여기서 1킬로미터 더 가면 비봉 마을 입구 평치교와 비봉 지서가 나온다. 평치교를 건너 지서 앞에서 좌회전, 약 7킬로미터 포장된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천호산 기슭에 아담히 자리 잡은 천호 공소와 교우촌 천호 마을이 반긴다. 마을을 들어서기 전 입구 우측 노란색 안내 표지판을 따라 1킬로미터 정도 산길을 차로 올라가면 드디어 '천호 사적지'에 이른다. 천호 마을은 박해 시대 때 '다리실(月谷)', '용추네'로 불리던 곳으로 교우촌이 형성되면서부터 후대로 와 행정명이 천호로 변했다.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39년경, 기해박해를 전후해 주로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이곳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아직도 천호산 깊은 골짜기에 남아 있는 한 평 남짓한 밭자리와 가을엔 도토리묵을 쑤어 먹는 식생활, 밤마다 같이 모여 두서너 시간씩 바치는 만과(저녁 기도)를 통해 옛 신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천호 마을은 자녀들에게 박해 시대 교우촌의 입지적 조건과 특성을 실제로 보여 주는 산교육장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호남 지역 교회사 연구의 산실인 '호남 교회사 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어 호남 교회의 역사에 관해 상세히 공부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전주 교구가 1984년부터 성지 개발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인 1985년 11월 30일 성지로 축성한 '천호 사적지'는 순교 성인과 순교자 묘역, 피정의 집, 십자가의 길 14처가 단장돼 있고 앞으로 개인 및 가족 단위 피정의 집과 천호산 정상에 예수 평화상, 대성당, 묵주 기도의 길, 성모 동굴 등을 단장할 계획도 갖고 있다.
천호 사적지가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은 최적의 도보 순례 코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적지에 안장돼 있는 선조들이 순교한 여산 성지에서 천호 사적지까지의 8킬로미터 남짓한 코스가 그 하나이다. 또 천호 사적지에서 천호산 자락을 타고 문수사 옆길로 해서 여산 성지로 넘어가는 코스도 색다른 맛을 갖는다.
천호 사적지 피정의 집에서 주관하는 주제별 피정은 무려 30여 명의 지도 신부를 모시고 연중 열리고 있어 잠시 세파를 떠나 고요함을 맛볼 수 있다. 다만 어린이가 딸린 가족은 다소 어려움이 있다.
또 사적지 내에서 개별적으로 숙박하기에는 피정의 집 여건상 여러 가지 애로점이 있어 꼭 숙박을 원한다면 사적지와 30분 거리에 있는 봉동이나 전주에서 머물 수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천호와 여산 성지 - 순교자들의 고향
전주 시내 북쪽에 호남 고속 도로를 끼고 좌우로 있는 '여산 숲정이'와 '천호 성지'. 순례자들은 논산 인터체인지를 나와 먼저 여산을 순례하고, 이어 그 길로 문드러미재를 넘어 천호 성지에 닿을 수 있다. 반대로 이리 인터체인지를 나와 동북쪽으로 천호 성지를 찾아 본 후 다시 여산으로 갈 수도 있다.
해발 500m 천호산 아래에 위치한 천호(天呼) 마을(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은 본래 다리실 혹은 용추네로 불리던 전통적인 교우촌이었다. 후대에 그 이름이 '천호'로 바뀐 것은 박해를 받던 신앙 선조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느님을 부르며 살던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선조들은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 산간 지대로 모여들었고, 기해박해를 전후해서는 교우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천호 성지 맞은편에 있는 무능골과 인근의 시목동이 당시의 교우촌들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4명의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 그리고 1868년에 여산에서 순교한 김성화(야고보) 외 7명의 무덤이 조성되어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중에서 정문호, 손선지, 한재권 성인 등은 신리골(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에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하다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명서 성인은 성지동(완주군 소양면 유상리)에서 살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4명의 성인 시신들은 다리실의 무능골과 시모동, 유상리 막고개, 진안의 어은동 모시골에 안장되었다가 천호 성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러나 전주의 성인 중에서 막고개에 안장되어 있던 조화서와 정원지 성인의 유해는 훗날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으나 유실되었다. 또 조화서 성인의 아들로 1866년 12월 18일 서천교(전주시 서완산동) 밑에서 매를 맞아 죽은 조윤호(요셉) 성인의 시신도 다리 너머에 있는 요머리 고개에 안장되었으나 끝내 그 곳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처럼 성인 부자가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순교한 이유는, 조선의 형률에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고 규정한 때문이었다.
1909년에 되재 본당의 베르몽 신부와 천호 공소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영혼이 깃들여 있는 천호산을 매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이곳 순교자 무덤 앞에 순교비와 십자가를 건립하였으며, 1983년에는 유해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1988년에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모셔져 있던 이명서 성인의 유해를 손선지, 한재권, 정문호 성인의 곁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김성화(야고보) 외 7명의 시신이 천호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어 1988년에는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하여 수청리에 안장되어 있던 김영오(아우구스티노) 순교자의 시신도 천호 성지로 이장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천호 성지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순교자들의 고향이 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도 지역에서는 병인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곳곳에서 순교하였다. 광주대교구의 '나주 무학당'(나주 초등학교 자리)에서도 순교자가 탄생하였고, 전주 시내 전주천 다리(일명 싸전 다리) 건너에 있는 '초록 바위'(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에서는 미처 피어나지도 않은 성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성 홍봉주의 아들이 어린 나이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다음 1867년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또 '여산 숲정이'(익산군 여산면 여산리)에서는 고산, 진산, 금산 등지에서 끌려 온 신자들이 1866년 겨울에 백지사, 교수형, 참수형 등으로 순교하였다.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산의 순교자들 23명 중에서 17명은 고산 땅 넓은 바위(廣岩, 완주군 동산면 광암리)에 살던 신자들이었다. 지금은 대아리 저수지에 잠겨 버려 흔적을 찾을 길이 없지만, 그 옛날 이곳은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숨어 살던 교우촌이었다. 이때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62세 된 김성첨(토마스)의 가족 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순교자 일행은 형장에 이르러서야 목에 쓴 큰 칼을 벗을 수 있었고, 얼마나 굶주렸는지 짐승처럼 형장의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김 토마스는 "지금까지 우리가 기다려 온 천당 진복을 받을 때가 왔는데, 이만한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부디 감심하여 고통을 참아 받자."라고 모두를 격려하였다고 한다.
순교 후 그 시신들은 형장 곁에 있던 미나리꽝에 던져졌다. 이것을 눈여겨 보고 있던 신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신들을 건져냈는데, 겨울에 입는 솜옷 속에는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배가 고파 솜을 먹어 버린 탓이었다.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일단 한 곳에 가매장하였다가 훗날 일부를 찾아내 천호산에 안장하였다.
박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들은 임금의 명을 거역한 역적이었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얼굴을 바르게 세워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연풍 성지에 묻혀 있는 황석두(루가) 성인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은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 없다 해서 얼굴을 지표면에 엎어 놓는 풍습과 같다. 이 순교자들도 그런 상태였다. 임금의 명을 어긴 것은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이니, 죽어선들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였음이 분명한데도(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998년, 324면).
여산 지역에서는 이후 100여 년 동안 참혹했던 당시의 정황이 계속 구전되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참상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지역의 신앙으로 승화되어 왔으며, 순교 터의 흔적이 사라졌지만 숭고한 순교자들의 피는 언제나 신앙 후손들의 마음 안에 간직되어 있었다. 이에 여산 본당 신자들은 1980년대 초부터 여산 동헌 옆의 백지사 터와 숲정이 순교 터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순례 기념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0호(1999년 11월호), pp.12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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