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나라및 세계교회현황

" 서울 대교구의 역사 "

▶전사(前史)

17-18세기 이래 우리나라에 도입된 서학서(西學書)를 통해 남인 학자들 사이에 천주교리에 대한 연구가 있어, 주어사 강학 등으로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벽의 권유에 의하여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1784년에 귀국하여 이벽 등과 더불어 포교를 시작하고 영세를 집전함으로써 서울에 비로소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이어 그들은 가성직제도 아래 가성직단을 구성하여 영세는 물론 미사까지도 집전하였던 바, 차츰 이 가성직제도가 법에 어긋남을 깨닫고, 북경 교구에 선교사의 파견을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이 요청에 따라 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교회는 비로소 목자를 갖게 되어 천주교는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미 1782년 조선교회는 북경교구의 보호를 받게 됨으로써 북경교구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교회 창설과 더불어 박해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주신부를 비롯하여 수 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니 조선교회는 다시금 목자를 잃고 말았다.

▶조선대목구 설정

이렇듯 박해 속에서 지하에서나마 자생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북경 주교와 교황청에까지 호소하는 성직자 영입 운동은 끊임없이 추진되어, 마침내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 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대목구로 설립하는 한편, 파리 외방 전교회로 하여금 전교사업을 담당하게 함과 동시에 자원해서 조선에 나오기를 간청한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브뤼기에르 대목은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조선 입국을 기도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였고, 뒤 따르던 모방(Moubant)신부와 샤스탕(Chutan)신부가 1835년부터 조선 입국에 성공하고, 제2대 대목으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주교도 1837년에 입국하니 조선교회는 비로소 주교와 신부를 가져 견고한 기반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거듭되는 박해

그러나 기해 박해로 주교와 신부, 그리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니 조선교회는 다시금 목자없는 폐허가 되었다. 제3대 대목으로 임명된 페레올(Ferreol)주교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입국해서 조선교구 재건에 전력을 다 했으나 김신부는 1846년 병오년에 잡혀 순교하였다. 그러나 페레올 주교는 다행히도 박해를 피해 다니며 순교에 힘쓰시다가 1853년에 병사하였고, 그 동안에 메스트르(Maistre) 신부가 입국하여 성영회를 조직, 최초로 고아 구제 사업까지도 전개하였다. 이어 최양업 신부도 입국하여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전교에 힘 쓴 결과 교세는 날로 신장되어 갔다.

제 4대 교목으로 임명된 베르늬(Berneux) 주교가 1855년 입국하고 뒤이어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니 1866년 병인 박해 때에는 국내에 모두 10명의 선교사가 있었다. 병인 박해로 베르늬 주교가 먼저 순교하자 보좌 주교였던 다블뤼(Daveluy)주교가 잠시 제5대 대목이 되었으나 곧5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요행히 살아 남아 조선을 탈출한 리델(Ridel)신부가 제6대 대목이 되어 1877년에 다시 조선에 입국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문화활동

이렇듯 박해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도 국내에서 각종 교리서의 번역 보급과 함께 한불자전 등의 편찬사업이 진행되어 1880년과 1881년에 걸쳐 간행됨으로써 한국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또한,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가 1874년에 파리에서 간행됨으로써 한국 교회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82년 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제7대 대목으로 임명된 블랑(Blunc)주교는 종현성당을 비롯하여 여러 성당의 건립을 위한 대지를 매수하는 등 교회 재건에 힘썼다.

▶서울대목구

이어 1890년 제8대 대목으로 뮈텔(Mutel) 주교가 임명되어 1898년에 명동대성당의 축성식을 갖게 됨을 계기로, 여러 곳에 성당이 건립되어 전교사업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발전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1911년에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개칭되어 충청도 이북만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뮈텔 주교가 계속 서을 대목구를 맡아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해서교안 등 적고 큰 교난이 끊이지 않았으나 교세는 날로 신장되어 전교 구역은 멀리 제주도와 간도에까지 뻗어 나갔다.

이에 1920년에 원산대목구가 분리되어 함경도와 간도지방의 전교사업은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또회에 위촉하였고 1927년에는 서울대목구 안에 평양지목구를 독립시켜 미국 메리놀회에 위임하였다.

그리고 장차 한국인 교구 설정을 준비하고자 황해도를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였다. 교세가 날로 성해지는 가운데 1925년 7월5일에 로마 교황청에서 기해 박해와 병오 박해 때 순교한 79위의 시복식이 거행되어 조선교회는 다시 없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1933년 뮈텔 주교가 선종하고 라리보(Larribeau)주교가 9대 대목으로 취임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사임하고, 1942년 초 제10 대목으로 노기남 신부가 첫 한국인 주교로 성성되어 취임함으로써 비로소 서울대목구의 자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노기남 주교는 일제 말기의 여러 가지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평양지목구와 춘천 지목구장을 겸임하면서 난국을 타개하여 서울대목구를 지켜 왔다.

▶광복후의 성장

1945년 광복이 되자 노 대주교는 전국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고유(告諭)하여 교회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6.25전쟁으로 다시 교회가 파괴되고 많은 신자를 잃는 비극을 초래하였으나 휴전과 더불어 노주교는 세계 각국을 순방하여 원조를 청해다가 조국 재건과 교회 복구에 노력해 온 결과 1962년 3월 10일에는 교계제도 설정에 따라 서울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됨에 노주교는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1967년 노대주교가 은퇴하고 윤공희 대주교가 교구장 서리도 임명되었으나 곧 이어 1968년 4월 9일에 김수환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6일에는 로마 교황청에서 병인 박해로 순교한 24위의 시복식이 거행되어 다시 한 번 한국교회의 영광을 만방에 빛나게 했으며, 1969년 3월에는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한국교회의 영광을 더해 주었다.

1998년 5월 29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제 13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를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