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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기도

" 나는 그를 보고 , 그는 나를 보고 "

나는 그를 보고, 그는 나를 보고
안토니 블룸


나에게 있어 예배행위는 하나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신자가 아니었던 나는 어느 날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곧 이어 그분은 나에게 있어 지고의 가치와 인생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 하는 분으로서, 동시에 하나의 인간으로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나는 기도란 그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전혀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여러분은 기도를 가르칠 수 없으며 설사 그가 믿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가르쳐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은 진실한 예배행위인 자발적인 태도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로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관계를 함께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인격적 실재에 대한 확신,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독자들이 하느님을 이웃으로서 인간으로서 여기기를 바라며, 자신의 형제나 친구에 대한 관계를 중요시하듯이 이도 소중히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공동기도나 개인기도가 소멸되었거나 관습적인 듯이 보이는 이유의 하나는 하느님과의 친교가 일어날 수 있는 예배행위가 자주 소홀히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이나 행동이나 간에 모든 표현은 영적 친교라는 근본적인 침묵에 대한 표현을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서 사랑이나 우정이 깊을 때에 침묵할 수 있음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친교하기 위해서 말할 필요가 있으면 있을수록 그 관계는 비참할 정도로 확실히 피상적인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경배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행복감을 느끼고 그와 함께 침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 생각할 때에는 쉬운 일이나 어느 정도의 시간과 확신과 시작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옛날 18세기 불란서의 성인이었던 아르스 사제는 한 농부에게,

"기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교회에 몇 시간씩 앉아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그를 보고, 그는 나를 보고 우리는 서로 행복해 하지요."

그는 말로써 침묵을 깨뜨리지 않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예배행위도 사용할 수 있으나, 일상 사용하는 말만으로 기도를 하려 한다면, 깊이를 가진 침묵이 없으므로 천박하고 성가셔서 곧 이런 말들에 싫증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으로 후원을 받고 거기에 올바른 정신이 불어 넣어진다면 이 말들은 얼마나 고무적일 수 있겠습니까?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편 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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