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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조르주 드라 투르,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

 

[책 속 미술관] 조르주 드 라 투르,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1638-43년. 캔버스 위에 유화, 133.4x102.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권용준

 
 
요란하고 번잡하며 혼란스런 오늘, 흔들리는 마음 잡을 길 없는 나약한 우리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그 마음, 가련한 촛불에
 기대어 신앙의 힘을 되찾고자 했던 한 성인을 통해 다시금 진리를 발견하여 참되고 바른 길로 들어서보고자 한다. 그 성인
은 마리아 막달레나인데, 특히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년)가 그린 이 성녀의 신앙고백은 고요하
고 깊은 묵상 속에서 혼돈의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성경에 따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와 병에 시달리다 치유되었으며(루카 8,2), 죽었던 오라버니 라자로가 다시 살아
나는 은총을 입었고(요한 11,1-44),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마태 27,56),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와(루카 23,55-56),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도 했다(루카 24,1-10). 또한
바리사이의 집에서 그리스도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죄를 회개한 여자(루카 7,37-50)이기도
하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전교의 성녀로 묘사되었는데, 10세기경에는 속죄의 성녀로 그려지면서 주
로 해골이나 십자가, 펼쳐진 책과 함께 등장한다.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은 1517년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
가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사람들에게 재개종을 권유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데, 드 라 투르의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외가 아니다. 이 그림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죄인으로 산 지난 삶을 회개하며 주님의 길, 믿음의 길
을 걷고자 다짐하는 고독한 순간을 보이고 있다.
 
조르주 드 라 투르는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화가이다. 그는 국왕 루이 13세를 비롯해 많은 후견인들이 있었기에, 화
가로서 부와 명예가 대단했다. 이런 그가 1915년 그 가치가 재발견되기까지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역사의 그늘에 가려
져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드 라 투르는 로렌 지방의 부호로 광대한 영지를 소유, 그 재산을 지키려고 모진 분쟁을 겪어야 했다. 결국 민중들에게 가한
 가혹한 행위 탓에 1652년 1월, 가족 모두가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작품이 이런 개인적인 삶의 행적과는 달리, 고양된
 종교적 경지에 달한 참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그가 그린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주님께
 기대어 더욱 깊은 신앙을 갖고자 하는 한 나약한 인간의 경건한 바람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드 라 투르의 종교적 심성과 예
술적 독창성이 돋보이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화가의 말년 작품들은 주로 촛불에 비춰진 실내의 정경 속, 빛과 어둠의 이분법을 통해 깊은 꿈의 몽상이나 종교적 명상
에 젖은 인물, 속세의 욕망에서 초탈한 의인의 심성을 담아낸다. 그 촛불에 비친 어두운 공간은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극도
의 적막감을 보이는 것이, 나와 주님의 은밀한 만남, 그 고백의 장소인 듯하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촛불에서 비롯된 강한 빛
과 진한 어둠의 대비가 극명한 것이 특색이며, 그 밝음과 어둠의 실내는 고요한 명상의 공간이자 시간과 속세를 초월한 진리
와 신앙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에서 그를 ‘촛불의 화가’로 부르며, 어둠에서 빛의 진리를 그린다는 점에서 ‘태양의 화
가’로 칭하기도 한다.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조용하고 깊은 명상 속에서 행하는 신앙고백의 순간을 보인다. 그 광경과 자태가 얼마나 경건
한지, 복잡한 현실의 굴레에 편승하여 헛된 욕망의 족쇄를 거두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림 속 마리아 막달레나는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의 거울을 응시하며 깊은 상념에 젖어있다. 그 단아하고 안존한 모습이 창
녀라는 오해를 거두어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녀가 입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블라우스가 열려 속살이 촛불에 비쳐 드러나
는 것이, 지금까지 그녀의 마음에 도사린 세속의 욕망을 미처 다 거두어내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하반신은 마치 두
꺼운 커튼처럼 투박한 천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욕망의 절제를 암시하며, 그 붉은색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절절한 마음을
나타낸다. 이런 상하체의 대비는 새로운 삶의 기로에 선 한 여인의 운명, ‘비탄의 바다’라는 의미를 지닌 막달레나의 운명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탁자 위의 거울은 정교하게 세공되고 공들여 금박을 입힌 액자에 끼워져 있다. 거울의 이미지는 거짓과 가식 아닌가? 그 거
짓된 세계가 이토록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으니, 이 역시 세속의 욕망을 버리지 못한 인간의 나약한 심성을 반영한 것이리라
. 그런데 그 거울에 담긴 것은 오직 촛불뿐이다. 촛불이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순간 불타고 마는 속성으로 삶의 일시적 유희
를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빛,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롯이 촛불만을 담은 이 거울은 세상의 헛된 욕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참모습을 증언한다.
 
그렇기에 지금 마리아 막달레나가 응시하는 촛불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응시하며 깍지 낀 손
을 무릎의 해골 위에 올려놓았다. 그 손은 기도와 복종과 겸손함을 나타내는 자태이다. 이 여인은 영원한 삶인 신앙에 대한
세속적 삶의 허무함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촛불을 바라보느라 옆으로 돌린 그녀의 얼굴
을 유심히 살펴보자. 살짝 위로 들린 고개와 무심히 응시하는 눈, 약간 벌어진 입술이 깨달음의 순간에 느끼는 황홀경과 다
르지 않다. 그 반성과 깨달음의 순간 그 벅찬 감동에, 그녀의 코와 입에서 약한 숨과 짧은 탄식이 솟는다.
 
그러니 촛불이 발하는 고요한 빛과 그윽한 정서는 인간의 외적 모습이 아닌 내면의 모습을 비추는 것이며, 그 촛불이 해골과
 거울과 연관을 맺으면서 우리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한 진실한 모습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을 향한 심오한 응
시와 대면의 순간, 막달레나는 세속의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영원한 세계, 곧 자기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과 신앙의 빛을 응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테이블과 마룻바닥에는 목걸이 등의 귀금속이 널브러져 있다.

그녀가 이 묵상과 응시의 시간을 갖기 전, 곧 세속의 여인으로 맘껏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때 치장했던 것들이다. 이제 주
님을 만나고 영원한 세계를 향한 주님의 뜻을 깨우쳤는데, 이 일순간의 허영과 사치가 무슨 대수랴. 그 간절한 묵상 속에서
만난 주님은 그녀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셨고, 그 부르심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그녀의 진실한 모습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참회하고 주님의 길을 따르려는 복종과 감내의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참회의 순간, 가신 주님을 생각하면 지은 죄만 생각나고, 뒤돌아보면 지나온 걸음마다 주님의 은혜와 받은 사랑뿐,
부족한 섬김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마음 가눌 길 없어 십자가만 바라보지만, ‘주시는 사랑 받기만 했는데, 이제 이 죄인 어찌
합니까?’라는 회한으로 가득한 마음이 후벼 파진 해골의 퀭한 눈보다 더 허전할 뿐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
며…”(사도 3,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