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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미술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일곱 가지 큰 죄’
(1480년경. 패널 위에 유화, 120x15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권용준
그리스도교에는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 바로 칠죄종(七罪宗)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자신도 모르
게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교만(Superbia), 인색(Avaritia), 음욕(Luxuria), 질투(Invidia), 탐식(Gula), 분노(Ira), 나태
(Acedia)로, 그 첫 글자만 따서 ‘SALIGIA’라고 불렀다.
중세 이래 가톨릭 교리의 중심 내용으로,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0-1516년)가 교리용으로 이 주제
를 상세하게 그렸다. 보쉬는 네덜란드의 화가로 마리아 형제회의 일원이었으며, 환상적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탐욕과 죄
악으로 세상의 파멸을 화폭에 담아 일명 ‘악마의 창조자’라 불린 르네상스 초기의 예술가이다. 그의 ‘일곱 가지 큰 죄
(The seven deadly sins)’는 대죄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전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마음의 경종이 되는
그림이다.
사각형 패널 위에 그려진 이 그림의 한 가운데에는 큰 원의 동공이 있다. 이는 하느님의 눈이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겪은 수난의 표징으로 자신의 상처를 보인다. 그 아래에 ‘Cave Cave Deus Videt’ 곧 ‘주의하라, 주의하라,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는 ‘어떤 죄도 하느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
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죄의 부끄러움을 알고, 강한 신앙심으로 이를 경계하며 예수님의 수난이 의미하는 사랑의 실천
을 생활화하라는 명령이다. 그러면 무슨 죄를 경계해야 하는가? 그 답은 동공 주위, 인간의 땅에 그려진 ‘SALIGIA’에 상
세하게 새겨있다.
동공 주위 이미지 가운데 가장 아래가 ‘분노’다. 길거리에서 두 이웃이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술집 뜰,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던 중 난투가 시작되었다. 모자와 나막신을 벗어버린 채 서로를 죽이려 칼을 휘두르며,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
다. 탁자는 넘어졌고, 한 사람은 머리에 의자를 쓰고 있으며, 아낙이 말리는데도 막무가내인 또 한 사람의 손에는 술병과
칼이 들려있고 옷도 벗어 던진 것이 정말 살기 등등하다.
그 오른쪽이 ‘교만’으로, 남을 업신여김이다. 실내가 고급 벽장과 은제 가재도구, 꽃병으로 장식되어 있고 바닥에는 금은
보화가 가득한 커다란 보석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류층 가정이다. 허영에 들뜬 부자 여인이 마귀가 내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다. 방 밖에 고양이가 앉아 이 꼴을 보고 있는데, 고양이는 중세시대에 마녀가 변신한 악마로
받아들여졌으며, 마녀들의 마법약에 넣은 고양이 발은 마법의 힘을 완성한다고 믿었던 만큼, 고양이는 바로 자만심이 얼
마나 큰 죄악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그 위로는 ‘음욕’이다. 두 쌍의 남녀가 어릿광대를 보면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잘 차려진 탁자와 술병, 한때 잘 놀고 난
흔적으로 바닥에 뒹구는 악기들이 이들의 속된 유희를 드러낸다. 그들의 유희와 희열을 부추기려는 광대들의 아양이 두
드러진다.
다음은 ‘나태’로, 성경과 묵주를 들고 교회에 가려고 잘 차려입은 여인이 깊은 잠에 든 남자를 깨워서 교회로 인도하려는
모습이다. 벽난로 앞에서 함께 잠에 빠진 개의 모습이 게으름이라는 맹목적이며 동물적인 속성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탐욕’의 장면이다. 식탁에는 커다란 칠면조 요리가 놓여있고, 그 앞에 앉은 뚱뚱한 남자가 고기를 뜯고 있다. 그
것도 모자라 한 여인이 다시 요리를 들여오고, 바닥의 군불에는 커다란 소시지가 준비되어 있다. 다른 편에는 노예로 보
이는 사람이 의자까지 넘어뜨려 가면서 술을 동이 채 들이켠다. 이런 탐욕은 어린아이의 간절한 바람도 저버리고 자신의
배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인색함을 낳기에, 죄악 중 가장 으뜸으로 여겼다.
이어서 나타나는 장면이 ‘인색’이다. 어떤 부자가 재판관을 매수하여 가난한 이에게 돈을 지불하도록 명하는 광경으로,
부자가 가난한 자의 돈을 갈취하는 모습이다. 그 뒤편 배심원들이 이를 무관심 속에서 묵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지막에는 ‘질투’가 나타난다. 각각의 인물들이 언쟁을 벌이고 있으며, 뼈다귀를 보면서 이를 드러낸 채 짖어대는 두 마
리의 개가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는 ‘한 개의 뼈다귀는 두 마리 개가 나눌 수 없다.’는 네덜란드 속담에 근거한 것으
로, 곧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질시하여 그것을 탐하는 인간의 사악한 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 인간의 속된 마음이 자
루를 지고 정신없이 걷는 사람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은 나막신(klompen)을 신고 있는데, 네덜란드가 해수면 아래에 있는 나라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사람들은
모두 뒤에 주머니를 차고 있는데, 이는 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다.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회심을 가슴과 정신, 그리
고 주머니의 회심 등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어려운 회심이 바로 주머니의 회심이라고 했다. 이유는 다른
회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주머니의 회심은 외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 주머니를
열어 이웃을 돕지 않는다면 - 진정한 회개는 없다는 사실을 적시하였던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
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던가?
그리고 사각형의 모퉁이에는 원형으로 사람이 죽어 천국과 지옥에 이르는 네 단계의 과정을 담았는데, 좌측 상단이 살아
생전의 마지막 의식인 ‘임종’이다. 병자성사가 행해지는 가운데, 하얀색 해골이 죽음의 임박을 알리고 있다. 그 위로는 흰
색의 천사와 검은색의 악마가 병자를 지켜보며, 누가 그 영혼을 가져갈 것인지 기다리고 있다. 그 옆방에는 가족들이 카
드놀이에 여념 없는 모습이다.
오른편 상단은 ‘최후의 심판’이다. 죽은 자들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과 12사도들과 더불어
이들의 윗자리에 앉아 심판하시는 모습이다.
그 아래는 ‘천국’으로, 성령의 빛으로 충만한 천국의 궁전이 보이고, 천사들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음의 선율을 연주하는
가운데 베드로 성인이 구원된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광경이다.
그리고 ‘지옥’이다. 어두침침하며 무질서한 분위기에서 불과 끓는 물, 칼 등 잔혹한 고문과 파멸이 따르는 고통의 체벌이
난무하고 있다.
그림의 위 리본에는 “정녕 그들은 소견이 없는 백성이며 슬기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지혜롭다면 이것을 이해하고 자
기들의 끝이 어떠할지 깨달을 터인데.”(신명 32,28-29)라는 구절이, 아래 리본에는 “나는 그들에게서 나의 얼굴을 감추
고 그들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리라.”(신명 32,20)라는 성경 구절이 쓰여있다.
이 복잡한 그림은 현실의 일반대중뿐 아니라 신앙인들조차 쉽사리 범할 수 있는 중죄이자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이기
도 하다. 나의 삶에서 ‘하느님께서 늘 지켜보시는’ 교만과 질투, 분노와 음욕, 탐욕과 인색함, 나태함의 그늘이 신앙의 힘
을 망각할 정도로 드리우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교만보다는 겸손이, 질투보다는 사랑이, 분노보
다는 친절함이, 음욕보다는 자기절제가, 탐욕보다는 신의가, 인색함보다는 관대함이, 나태함보다는 열성이 진정 주님의
마음에 드는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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