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의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
(1607년경. 캔버스 위에 유화. 390x260cm.
나폴리 피오 몬테 델라 메세리코르디아)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 25,35-36)
하느님께서 최후의 심판 날 천국을 함께할 의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 깃든 여섯 가지 선행은 곧 천국의 문을 들어갈
열쇠가 아니고 무엇이랴? 피에몬테는 이 여섯 가지 자선행위에 ‘장사 지내주는 것’과 ‘노예 해방’을 덧붙여 자비의 선행을 여덟 개로
규정하였는데, 이 가운데 ‘노예 해방’을 뺀 총 일곱 개의 선한 행위를 한 화폭에 옮긴 화가가 이탈리아 바로크의 화가이자 빛과 그림
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효과적으로 구사하면서 근대 사실적 경향의 화풍을 개척한 카라바조(1573-1610년)이다.
카라바조가 이 그림을 그린 1607년은 그의 일생에서 나름의 역경에 부닥친 시기이다. 과격한 성격 탓에 그는 1606년 5월 28일 로마에
서 내기 테니스 경기를 하다가 말다툼 끝에 살인이라는 참극을 벌이고 말았다. 로마를 빠져나와 나폴리(1606-7년), 말타(1607-8년),
시실리(1609년) 등지를 전전하던 그는 심리적으로 언제 붙잡힐지 모르는 극도의 불안한 상태에서도 가는 곳마다 나름의 명작을 남긴
다. 이런 도피생활을 하면서 나폴리에서 그린 그림이 바로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인데, 이 그림을 통해 카라바조는 자신이 저지른
악한 죄를 반성하고 참회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그림은 매우 복잡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 일곱 가지 자비가 한 공간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모습으로 일찍이 시도된 적이없는 일이
다. 그 화면 속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얽혀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날개
를 활짝 편 두 천사의 비호 속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어두운 인간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자비라는 구원의 젖으
로 상징되는 영원한 어머니로, 그 어머니의 넉넉한 사랑의 품을 알 때, 우리는 참되고 아름다운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
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에 이 순간 예수님의 모습이 함께하고 있다. 그럼에
도 그 아래의 인간세상은 어둠에 싸여있는 것이 하느님이 은총을 상기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남은 것으로 보인
다.
그러나 어둡고 악에 물든 인간세상이라지만 그 안에는 어둠보다는 밝음이, 악행보다는 세상을 비추는 선행이 있기에, 하느님의 사랑
이라는 구원과 자비의 빛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아래 오른쪽 뒤편에는 ‘장사 지내줌’이라는 착한 행위가 그려져 있다. 이미 죽은 사내의 싸늘하고 창백한 발이 보이며, 그 발을 잡고
흰 천으로 그 주검을 거두어주는 사람과 그 행위를 용이하게 하려고 커다란 횃불을 밝히는 자의 선행이다.
그 앞으로는 ‘옥에 갇힌 이를 찾아봄’과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두 행위가 동시에 묘사되어 있다. 한 여인이 눈치를 보면서
쇠창살 안의 노인에게 부푼 젖가슴을 내밀고 젖을 빨게 하는 장면이다. 이 이야기는 일명 ‘로마의 자비(Carità Romana)’로 불리는
것으로, 굶어 죽는 형벌을 받은 아버지 시몬에게 갓 산모가 된 딸 페로가 찾아가 젖을 먹여 연명시켰는데, 딸의 이런 효심에 감복한
법정은 아버지의 죄를 용서하고 석방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로마 시대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라는 사람이 쓴 “고대 로마인들의 기
념할 만한 언행들”이라는 책에 수록된 내용으로, 당시 로마에서는 딸의 행위가 부모를 공양하는 가장 고귀한 사례로 여긴 이야기이기
도 하다.
오른쪽 아래로는 모자와 외투를 멋지게 잘 차려입고 칼을 찬 한 사내가 벌거벗고 나뒹구는 남자에게 옷을 나누어주는 이른바 ‘헐벗은
이를 돌보고’ ‘병든 이를 보살핀다’는 착한 행동을 그리고 있다. 한 벌거벗은 사내는 감사의 마음에 손뼉을 치고, 외투를 받은 사내는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야코부스의 “황금전설”의 내용으로, 아미엥 성을 지나다가 헐벗고 가난한 사람을 보고는
자비를 베푼 로마 군인 마르티노 성인의 일화를 그린 것이다. “아무도 그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마르티노는 이 남자야
말로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칼을 꺼내 입고 있던 외투를 잘라 한 쪽을 거지에게 주고 나머지 한 쪽으
로는 자신의 몸을 감쌌다.”는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다.
그 뒤로는 ‘나그네를 영접하는’ 선행이다. 여인숙 주인으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에 온화한 성품의 한 남자가 순례자로 보이는 한 사내
를 반갑게 맞이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순례라는 고행의 여정에서 쉴 수 있는 자리를 기꺼이 마련해 주는 자비의 행위를 그린 것이다.
그 뒤에는 반쯤 헐벗은 한 사내가 당나귀 턱뼈로 물을 마시는 모습이 나타나있다.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준다.’는 자비의 행위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일화를 예로 들었다. 삼손이 르히 사막에서 싱싱한 당나귀 턱뼈로 필리스티아 사람을 천 명이나 죽이고 갈증이
나서 “제가 목이 말라 죽어서, 저 할례 받지 않은 자들 손에 떨어져야 하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자, “하느님께서 르히에 있는 우묵한
곳을 쪼개시니 거기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자 정신이 들어 되살아났다.”(판관 15,18-19)는 내용이다.
과격한 성격을 참지 못해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참담한 심정의 카라바조가 죽음을 1년 앞둔 36세에 그린 참회의 그림이다.
자신이 생전에 다하지 못한 이 자비로운 행위가 실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그는 인물들의 모습을
성스럽다기보다는 나폴리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 그렸다. 바로 나와 같은 평범한 존재들이 행하는 그림 속
그리고 그 거울의 행위 하나 하나가 얼마나 성스런 행위인가를 느끼도록 하고자 카라바조는 그 행위에 일일이 환한 빛을 새겨넣은 것
이다. 곧 관찰자 스스로 이 장면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심어주려는 작가의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즈음이면 한 해를 마감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동이 결여된 연민은 자비가 아니다.”는 말을 상기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내
생활에 옮기고 실천할 수 있는 내 마음의 거울, 신앙의 거울을 깔끔하게 닦고 자신의 행위를 비추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의인에 대해 말씀하신 뒤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야 할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주지 않았다.”(마태 25,42-43)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내 신앙의 거울은
자비와 냉담이라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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