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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모 / 스테판 로흐느 "


제목 :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모(The Virgin Wirshipping the Child: 1445) 작가 : 스테판 로흐느 (Stephan Lochner:1400- 1451) 크기 : 37.5X 23.6 cm. 소재지 :독일 뮨헨 고대 미술관 (Alte Pinakothek)

기후적으로 따뜻하면서 문화적으로 화려하고 기름진 이태리를 떠나 알프스를 넘어 시작되는 독일은 확실히 이태리에 비해 모든 면에서 썰렁하고 척박한 환경임을 피부로 느낀다. 이런 독일에서 예외적인 도시가 바로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였으며 가톨릭 도시인 뮨헨이다.

이 도시의 상징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10월의 <맥주 축제>가 아니더라도 독일 수준의 낭만이 넘치는 도시인데, 이 도시를 더 그립고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 루드비히 2세 (1845- 1886)이다.

그는 뛰어나게 수려한 용모와 사색적인 조용한 성격으로 국민들의 기대와 사랑을 받으며 18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음악, 시, 미술, 건축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바그너(R. Wagner)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심취하면서 자신을 바그너의 음악 속에 나오는 백조의 기사와 같다고 생각하고, 이 작품의 이미지를 딴 “새로운 백조”라는 뜻의 <노이슈반슈타인>이란 성(城)과 다른 두 개의 성을 건축하고 동화 속에 나오는 전설적인 영웅처럼 살면서 예술에 몰두함으로서 엄청난 국고를 탕진하게 되자, 결국 정신병자로 오해받으면서 궁지에 몰려 오늘까지도 사인이 분명치 않는 자기가 만든 연못에 빠져 죽은 비극적인 인생을 마무리했다.

많은 권한을 가지고 전쟁이라는 극단의 방법까지 동원해 국가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목표인 왕이란 막중한 임무가 주는 무거운 현실에서 일탈하여 예술이라는 극도의 상상의 추구로 결과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실 적응에 숨 막히는 나날을 보내야 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어 온 세계로부터 관광객을 끌어들임으로서 자기가 탕진한 것 보다 몇 십 배의 재산을 후손들에게 되돌려 주는 결과가 되었고 예술적인 상상에 몰두하면서 가장 비현실적 삶을 살았던 그는 국민들의 소망인 많은 재산을 늘려준 가장 현실적으로 성공한 왕이 되었다는 역설적 삶을 산 셈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의 영향으로 뮨헨은 독일적 낭만의 도시, 많은 예술품을 소장한 만만찮은 문화의 도시가 되었고, 1960년대 유럽 유학이 쉽지 않던 시절 뮨헨에서 유학하며 법학도로서 독일 문학가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 31세의 나이로 요절한 전혜린의 작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더 없는 동경의 땅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전시된 고대 미술관은 바이에른 왕국을 통치하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미술 전시관이었는데, 독일의 귀족 컬렉션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꼽히고 있으며,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화풍의 작품이 많으며 특히 17세기 플랑드르 화가로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평가되는 폴 루벤스(Paul Rubens: 1577- 1640)의 작품을 대량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작품은 루벤스의 작품으로 6미터 크기로 유화 중에 가장 대작으로 평가되는 <최후심판>곁에 있기에, 크기나 수수한 색채에 있어 화려한 루벤스의 작품에 밀려 눈에 띄지 않는 작품이나 수박 겉핥기식이 아닌 찬찬한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의 발길을 묶으며 작은 화면에 큰 감동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생애의 대부분을 가톨릭 도시인 쾰른에서 지내며 작품 활동을 했는데, 동시대인으로 도미니꼬회 수도자였던 이태리 피렌체의 프라 안젤리꼬(Fra. Angelico)처럼 후기 고딕 전통을 새로운 사실주의와 순수한 색채 감각에 결합시켰다.

이 작품은 참나무 판에 그려진 조그만 작품이나 상업주의에 잠식되어 가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성탄의 의미를 너무나 명백히 표현하기에 내용면에서 대작이며 수작(秀作)이라 볼 수 있다.

먼저 이 작품에는 다른 성탄화에서 볼 수 있는 축제의 흥겨움이나 화려함 없이 시골의 차분하고 조용한 정서를 반영하고 있으며, 마굿간은 더 없이 퇴락하고 낡은 모습이다. 지붕 이엉이 벗겨져 있고 짐승이 살기에도 열악해 보이는 그런 허름한 마굿간이며 주위에 다른 건물 없이 하나만 있기에 꼭 황야에 버려진 오막살이를 보는 기분이나 하늘이 보이며 세 명의 천사들이 앙징스럽고 경건한 표정으로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벽의 왼쪽엔 휑하니 구멍이 뚫린 벽이 보인다.

당나귀와 소가 턱을 괴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는 말구유 역시 허술한 송판에 못을 쳐서 만든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하느님의 아들이 가난하게 태어나심의 의미를 너무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들에 대한 사랑을 인간들의 열악한 삶에 동참으로 표시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가난의 일방적인 강조가 더 없이 궁상스러움을 풍길 수 있는 분위기를 작가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성모자를 통해 놀랍도록 잘 처리해서 비참한 세상의 가난과 다른 복음적 가난의 생기 있는 실상을 표현코자 했다. 중세 성탄 성화에서는 성탄의 영광을 묘사하기 위해 금색을 많이 사용했으나, 작가는 성모자의 후광 부분 외에 금색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서 복음적 가난을 정갈스럽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부각시켰다.

성모님은 머리를 늘어트린 처녀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자기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세상에 가장 허약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를 경배하고 있다.



작품 전체는 루카복음의 성탄사화를 기본으로 했기에 지붕위에서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까 2: 14)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고, 다섯 천사들이 중세 교회 음악의 상징인 그레고리안 성가의 악보를 펴들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비엔나 소년 합창단원처럼 정성껏 천상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현대 크리스챤들에게 천사는 구시대 신학의 유물로 여겨,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천사의 존재성을 쉬이 무시하지만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천사는 언제나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존재로 부각되고 있기에 구원 신비의 이해에 아주 중요한 존재이며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화적 낭만이 아니라 크리스챤 삶의 중요한 역할을 알려주고 있다.

신약에서는 탄생과 부활(루까 24:4)때 외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천사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예외는 게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루까 22: 43)인데 이것은 부활의 한 부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고 이처럼 천사는 신약에서는 드물게 나타나지만 하느님의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존재로 드러나고 있다. 천사는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신약에서는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전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예술의 도시 베네치아의 시장이며 유명한 철학자인 카차리(Massimo Cacciari)의 대표작인 <필요한 천사 : L'angelo necessario>는 유럽 각국에서 번역 출간될 정도로 인기가 높은데, 그 내용 중에 “천사는 인간에 가까운 하느님과, 하느님께 가까운 인간의 사절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현대 철학자의 이 천사론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할 점을 주고 있으며 작가는 작품의 제일 위부분에 이 천사를 둠으로써 천사를 통해 드러나는 크리스챤 삶에서의 찬미의 가치를 강조했다.



루카 복음 2장의 여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마리아가 말구유에서 해산한 것으로 전하기에, 이 작품에서 집 역시 여관과 마굿간의 이미지가 병행되고 있는데, 예수께서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나그네의 여정에 있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는 뜻이다.

루카 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에 까지 마굿간에는 당나귀와 소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전승이 있었는데, 이것은 구약성서의 내용을 아기 예수님의 탄생 사화와 연결시킨 것이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야서 1:3)에 근거하는 것이며 이 모든 장면의 핵심은 바로 이제 새로 탄생하는 그리스도에게 있다.

지붕 위 다락에서 다섯 천사가 탄생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과 대조로 구유 밖 창문에 세 천사가 머리를 모아 나란히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있으며 당나귀, 소, 천사들이 경배하는 아기 예수님을 성모님도 무릎을 꿇고 있게 배치함으로서 작가는 성탄을 맞는 크리스챤의 태도중에 가장 기본은 찬양과 경배임을 강조하고 있다.

오른쪽 옆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부터 주님 탄생 소식을 듣는 한 무리의 목동이 있는데, 우리네 정서로는 목동이란 소박하면서도 깨끗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 생각하지만 실은 이들은 당시 사회의 하층민으로서 거짓말쟁이, 강도, 죄인들의 대명사인데, 천사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주님 탄생의 소식을 전했고,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에 속했던 목자들은 천사의 인도로 탄생하는 주님을 만남으로서 주님성탄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교회 역사상 첫 번째 선교사가 된다(루까 2, 15- 20).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목동들은 예수 탄생 당시의 유대인의 복장이 아니라 작가가 활동하던 당시인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돌보고 있는 양떼 저 너머에 보이는 것은 베들레헴의 들판이 아닌 쾰른 대성당의 쌍탑 종각이 보이는 그가 살며 활동하던 도시인데, 이것은 성탄축제가 역사적 사건의 기억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발견해야 할 신앙체험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너희들은 바로 지금 너희가 살고 있는 그곳에서 새로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나라는 뜻이다.”

작품의 중심은 무엇보다 아기 예수님과 그분을 경배하는 성모님이시다. 루가복음에는 태어나신 예수님을 그 부모들이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였다(루까 2, 6)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구약 지혜서 7장 4절의 말씀에서 따온 것이며, 옛날 솔로몬 왕이 태어날 때 아기 예수님처럼 보자기에 싸여 태어났다는 말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아기 예수님은 다윗의 왕손으로 오셨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작가는 자기 나름대로의 확고한 성탄신학을 강조하기 위해 성탄을 주제로 한 다른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아기 예수님을 포대기가 아닌 성체포에 눕혔다. 원채 작은 그림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확인이 되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아기 예수님은 사제들이 성찬례 중에 성체를 축성할 때 사용하는 하얀 천의 성체포(Corporale)위에 누워계시는데, 작가는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미사 때마다 사제의 축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체성사와 연결시키고 있다.

작가는 이것을 통해 매일 미사 때 마다 제단에서 사제의 축성으로 이루어지는 성체와 성혈의 전례에서 말구유 경배의 체험을 재현하도록 관객들을 인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탄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천재의 화려한 출현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너무도 역설적인 사랑의 구세주를 맞이하는 것이기에 이 의미성이 매일의 성찬 안에서 확인하고 재현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아기 예수님을 포대기가 싸는 게 아니라 파격적으로 성체포위에 눕혔다.

작가가 이처럼 성탄을 성체와 연결시키는 것은 참으로 신앙의 생활화의 차원에서 획기적인 것이며, 이 소박하면서도 깊은 내용이 담겨있는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미사 때 성체성사를 통해 오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성찬이야 말로 매일 세상에 새로 태어나시는 구세주께 대한 합당하고 장엄한 경배임을 강조하고 있다.

작품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닌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모셔오기 위한 도구로 선택된 한 피조물로서 성령의 인도 안에서 자기 사명을 마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아기 예수님이 누워계신 성체포의 가장 자리는 십자무늬가 선명히 수 놓여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성모님은 아들을 낳은 어머니로서의 기쁨만이 아닌 그 아들이 마셔야 할 수난의 잔을 미리 바라보시며(마르 10, 39; 루까 22, 17-20) 사랑하는 아들의 극심하고 처참한 고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셔야 했던 성모칠고의 역설적 고귀함을 전하고 있다.

당신이 성전에서 아들을 봉헌할 때 시메온으로부터 들은 자신의 사명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까 2, 34-35)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기게 하면서 이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 성탄 훨씬 후에 일어나는 과정들이나 작가는 이 작품 안에서 압축 통합시켜 전하고자 했다.

작가는 미사 구원 은혜의 효과와 그리스도 희생의 관점을 이 작품 안에 담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일생을 전례 안에서 재현하며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에게 그리스도의 성탄은 일회적 기억으로 끝나는 직선적 축제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추하며 묵상해야 할 사건이기에 크리스챤 전례의 핵심인 성체성사 안에서 성탄의 기쁨을 반추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작가가 활동하던 시기는 교회의 부패에 항거한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조짐이 구체화될 시기였고, 교회의 부패가 극도에 달했을 시기였기에 교회에 대한 실망과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이런 이들에게 작가의 작품은 흔들리는 신앙을 막고 신앙의 성숙과 보존에 힘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너무도 허술하고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말구유에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것처럼 오늘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교회의 서글픈 현실을 보면서도 우리가 가끔 만나게 되는 정성과 사려 부족 속에 분심스럽게 거행되는 사제의 미사를 통해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오시기에 크리스챤들은 매일의 미사를 통해 성탄의 기쁨과 희망 속에 살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루드비히 2세가 만든 노이슈반스타인 성(城)

<이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