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2010.10.2.
국 명: 터키
코 스: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 히포드럼광장- 블르모스크사원- 톱카프 궁전- 성 소피아성당- 터키 전통 시장(그랜드 바자르)- 앙카라이동- 숙소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수많은 유적들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기념비 중 하나이다.
현재의 성 소피아 성당은 서기 6세기 중엽(532-537)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건축되었다.
그 후 916년간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으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1453년
오스만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메흐메드 2세는
성 소피아를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개조하였다.
하지만 성당의 이름은 바꾸지 않고 놓아 두었다.
아마 소피아가 '지혜'를 뜻하는 추상명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성(聖)'은 그리스어로 '하기아' 혹은 '아기아' 이지만, 터키식으로는 '아야'로 발음된다.
그래서 성당은 그리스 이름 그대로 '아야 소피아(Aya Sofya)로 불렸다. 성 소피아 성당은 이렇게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성당과 모스크(이슬람 사원)으로서의 특징을 모두 지니게 된다. 이 성당은 모스크로
사용되다가 1934년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고, 그 영문
명칭은 "The Aya Sofya Museum'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성당 건물은 같은 장소에 세 번째
지어진 것이다. 즉 성당은 두 번에 걸쳐 파괴된 후 다시 재건축되었다.
첫째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메가 에클레시아(큰 교회)'라는 이름으로 360년에
개장되었다. 그 다음 해 이 성당의 이름은 '하기아 소피아' 즉 '성스러운 지혜'의 성당으로 개명되었다.
이 건물은 404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이오니스 크리소스톰가 추방되자,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둘째 성당은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령으로 다섯 개의 둥근 천장과 나무 지붕으로
갖춘 건물로 415년에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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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당은 117년 후 '니카의 대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당시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니카' '니카'라고
외친 것에서 유래한다. 니카는 '승리'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이 폭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니카' '니카'라고 외치며 주요 관공서를 습격하며 여기저기 방화를 저질렀다. 이 방화로 성 소피아 성당,
성 이레네 성당도 불타고 말았다. 당시 유스티니아우스 1세는 532년 니카의
대란을 진압한 다음 곧바로 두 성당의 재건을 명령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최고의 성당을 짓고 싶었을 것이다.
현재의 성당은 532년 2월 23일 건축이 시작되어 537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성당의 재건에는 종교적인 열정도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성당의 완공은 단지 5년 10개월 4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유스티니아우스 1세는 최고의 성당을 짓기를 원했고,
또 그것을 실현시킬 힘을 갖고 있었다.
성당 건축은 안테미우스(Anthemios)와
이시도루스(Isidorus)라는 두 건축가가 공사를 지휘하고,
천명의 장인과 만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각 지역에서 귀한
건축 자재들을 운반해왔다. 녹색 대리석 기둥은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성당이 완공되고, 성당을 개장하는 날, 유스티니아우스 1세는 제단으로 올라가
"솔로몬이여, 우리는 당신을 이겼노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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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수도 1000년
동안 다양한 건축물의 축소판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성 소피아 성당은 최고의 건축물에 속한다. 이 건물은 1000년 동안
비잔틴 성당의 모델이었다. 성당은 두 번이나 소실된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본체에 목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성당은 돔을 갖춘 직사각형의 바실리카 형식의 건축물로 재건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외랑과 내랑으로 구성되어 있고, 위에 거대한 돔이 있는 중앙의 본당,
두 개의 복도, 그리고 갤러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성당의 평면은 4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30m×30m의 공간을 감싸고 있는 70m×76m 크기의
사각형으로 구성되었다. 기둥는 둥근 돔을 지지하는 사각형의 옆을 가로지르며
4개의 육중한 아치들을 지지한다. 중앙 돔의 직경은 33m이며 그 높이는 55m에 달한다. 반구형 쌍둥이
돔은 아치 아래로 확장되어 네이브의 길이를 2배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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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당은 여러 차례의 개조와 복구, 오토만
시대의 훼손과 그 후의 복원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성당은 553년과 557년의 지진으로 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558년
돔의 상당 부분이 붕괴되었다. 다시 만들어진 돔은 처음 것보다 조금 더 작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상타파시대(726~842년)에는 성당 내부의 인물화로 된
우상과 모든 판넬들이 제거되었다.
대신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단순한 십자가 만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지진으로 건물의 일부분 및 중앙 돔이 파괴되었고, 다시 복구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오스만 터키 시대에 모스크로 전환되어 사용되면서, 여러 부속 건물과 첨탑 등이 첨가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흐메드 2세는 남동쪽에 벽돌로 된 첨탑을 세웠고,
셀림 2세 때(1566~1574)는 북동쪽에 첨탑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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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라트 3세 때(1574~1595) 나머지
두개의 첨탑이 세워졌다. 술탄들의 왕능은 셀림 2세 때 정원에
세워졌으며, 오토만 터키 시대 동안 설교자석, 사회자석 등이 추가되었다.
1736년에는 건물 내부에 도서관이 만들어졌고, 1742년에는 초등학교 건물이 외부에 세워졌다.
그 후 몇 차례 중요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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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 정문 앞에서의 첨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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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성 소피아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인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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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외랑
성 소피아 성당의 입구는 정원의 서쪽에 있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테오도시우스 2세대 세워졌던
성당의 두 번째 터를 볼 수 있다. 2m 정도 꺼진 평면 공간에 기단 및 기둥 흔적과
몇 가지 석재들이 늘려 있을 뿐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옆으로 길게 뻗은 홀이 외랑 겸 현관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외랑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벽면에
전시된 사진 자료들을 읽고 있었다.
주제는 <비잔틴 세계>이다. 성당의
평면도와 입체도, 비잔틴 제국 시기의 성당 밖의
행사 장면, 오스탄 터키 시대 모스크로 사용되었을 때의 성당 내부 상상도,
성당 복구 등 성당 관련 다양한 자료들이 벽에 전시되어 있었다. 외랑은 대리석 바닥에
5.75m의 긴 복도형 단순한 구조이다. 외랑에서 내랑으로
들어가는 문은 다섯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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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내랑
내랑은 외랑보다 폭이 넓고 높이도 높다.
내랑의 천장은 황금색 바탕에 기하학적인 문양의 다양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벽면은 얇게 잘라 만든 대리석으로 덮여 있다.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 자재는 아마 제국 전역에서 좋은 것 만을 골라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백색은 프로코넷소스, 녹색은 테시리아, 금색은 리비아, 분홍색은 프리기아,
아이보리색은 카파도키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내랑의 양 옆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이 있다.
내랑 남쪽에는 시계문(호롤로지안 문)이라 불리는 출구가 있는데,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황제가 사용한 문이라고 한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중앙의 문은
흔히 제국의 문(황제의 문)이라고 불린다. 제국의 문 위쪽에 하나의 모자이크가 보인다. 중앙에는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보좌에 예수가 왼손에 책을 들고 앉아 있다. 그 책의 글 귀는 그리스어로
"너에게 평화를,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복음서의 문구이다.
예수의 양 옆으로 둥근 원이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 원에는 띠를 든 천사 가브리엘이, 왼쪽 원에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예수의 왼쪽 발 아래에는 황제 레오 6세가 무릎을 끓고
재혼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이다. 이 모자이크는 우상 파괴운동이 끝난 후 920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모자이크는 오트만 터키 때 회칠이 되었다가 1933년 재복구
과정 후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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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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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돔
5층 건물 높이의 이 돔에 그려진
그림은 작가 들이 모두 누워서 그림을 그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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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성모마리아님, 세례자요한,
이슬람이 이곳을 점령 한 후
그리스도의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 이 그림 위를 횟칠을 했다.
다시 박물관이 되면서 그 횟칠을 벗기려 했지만 횟가루와 함께 본 바탕의
그림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 이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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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아기 예수,
황제 요한 콤네노스 2세, 왕비 이레인의 모자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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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성좌에 앉아있고 양 옆에는
조여왕과 그녀의 세번째 남편인 콘스탄틴 모노마쿠스의 모습이다.
이 모자이크에서 여왕은 11세기에 그의 첫 남편인 로마노스 3세와 함께 그려져 있었지만
남편이죽고 새로 결혼을 하면서 황제의 얼굴과 황제
머리에 쒸어진 문구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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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의 내부인데 정면제단은
아쉽게도 수리중이라서 옆면을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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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쪽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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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성당 본당의 전경이다.
플래시를 전혀 사용 안해서 사진이 어둡다
성당은 높이 55미터에 폭 33미터라는
어마어마한 건물을 15층 높이의 돔(Dome)이 받쳐주고 있다.
즉 내부에는 기둥이 아니라 돔구조로서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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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엄지 손가락을 넣고 완전히
한바퀴를 떼지않고 돌리면 소원이 이루워진단다.
기다리는 줄이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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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성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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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전통 시장(그랜드 바자르)
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그랜드 바자르(카팔르 차르쉬)는 유명한 시장이다.
처음에는 좌판을 펴놓고 장사를 하는 노천이었는데, 햇빛을 가리기 위해,
또는 비를 피하기 위해 지붕을 만들기 시작하고, 점차
가게들이 늘어나자 천막을 쳤다.
정복자 파티히 메흐메드 2세때
1461년 확장한 이후에도 이 시장은 12차례의
대지진과 많은 화재로 우여곡절도 많았고, 여러 번 모습을 바꾸었다.
잦은 화제로 지금은 석조 건물이 된 시장은 지붕을 가지고
있다 하여 "카팔르 차르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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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바자르는 전 세계적으로
쇼핑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터키를 찾는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들려야 하는 명소이며 쇼핑의 장소이다.
이곳은 30,700㎡ 면적에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되어 있으며, 시장 안에는 65개의 거리에
4000여 개의 상점, 상가, 작업실, 식당, 카페
그리고 사원을 보유하고 있다.
정말 바자르(시장) 안에는 없는 것이 없다.
몇 시간을 돌아 다녀도 다 볼 수 없는 이 곳은 처음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구경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거리가 미로처럼 연결되어 아주 복잡하고
찾고자 하는 곳을 그냥 지나치거나 같은 곳을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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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국민의 98%가 무슬림(회교도)
이지만 제정분리 원칙에 따라 국가가 운영돼 중동지역 다른
이슬람 국가보다는 여러 면에서 관대하다.
음주문화도 비교적 발달돼 있고
이슬람교의 금식월인 라마단(Ramadan)도 그다지 엄격히
지키는 편이 아니다. 또 회교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토․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등 서구화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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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인 여행객이 많아지자
여기저기에서 대한민국! 이나 오! 필승코리아! 안녕하세요!를
상점들 지나칠 때마다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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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정을 마치고 앙카라로
이동중에 버스안에서의 풍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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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휴게소에서 본 호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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