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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 그리스도론 15 회 "

  
 
 그리스도 논쟁,

 이단  이설

 이단  이설  이교

 공의회

 

* 세계공의회의 구분

3. 문예부흥기의 공의회 :


15-16세기에 열렸던 콘스탄츠(1414), 페렌체

(1438-1445), 제5차 라테란(1512-1517),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 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전 시기와 이 시기의 첫 공의회

사이에는 교회 역사상 두 중대한 사정이 있

었다. 


첫째, 교황들이 당연히 거주했어야 할 로마    

      를 떠나 아비뇽에 체류한 사건과,

둘째, 서구의 가톨릭이 세 파로 갈라진 서구

      의 대이교가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사건은 교회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

왔고, 결과적으로 성직계의 퇴보와 교황청

의 퇴락으로 이어졌으며, 문예부흥기의 소산

인 개인주의적인 향락 정신을 낳게 했다.

개인주의와 때 맞추어 추진되진 못했던 쇄신,

당시 교계에 대한 경멸, 이상적인 초기 교회

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교회의 모습. 교황청의

재정주의 (fiscalism)에 대한 반발등은, 특히

아비뇽 시대에 심하게 나타났고, 결국에는

가톨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던 독일의

루터의 반발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종교의 통일성과 서구 문화

의 통일성이 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공의회들은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

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콘스탄츠 공의회

는 서구의 대이교와 명시적으로 관련됭 것이

었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루터의 개혁에 대한

가톨릭의 답변이었다. 그리스도교 세계, 특히

동방을 위협하던 오스만 터키의 세력 역시 공

의회와 관련이 깊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풀의

황제였던 요한 8세는 피렌체공의회에서 동서

교회의 일치를 받아드렸으나 (1439), 불행하

게도 1453년에 콘스탄티노풀이 터키인들의

손에 함락됨으로써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사례는 1274년 리용 2차 공의회에서

도 이미 일어났었다. 이 시기 공의회들의 특징

은 다음과 같다.

1) 큰 비중을 지니지 못했던 제5차 라테란

   공의회와 보완적인 성격의 피렌체공의회를

제외한 모든 공의회들이 로마에서 멀리 떨어

진 곳에서 개최되었다.

2) 중세기의 공의회와는 달리 교황의 주도권이

  현격하게 감소되었다. 이는 특히 교황의 권

위를 감소시킨 서구 대이교에 따른 결과였다.

3)콘스탄츠공의회에서 국가별 투표권이 채댁

  되었는데, 이는 아주 예민한 문제로서 국가

주의적 분할 세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공의회의 주요 안건들은 머리와 지체의 개혁

이었다. 교황과 공의회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

회가 교황 위에 군림한다는 소위 공의회우위

살(conciliarismus) 이 명백하게 나타난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