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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성 니콜라오 축일 / 쟌 스텐 ~



제목: 성 니콜라오 축일 (1685) 작가 : 쟌 스텐( (Jan Steen: 1626- 1679) 크기 : 82X 70.5cm 컨버스유채 소재지: 화란 암스텔담 라우스(Rijiks) 미술관

작년 성탄 때 브라질에서 어떤 사제가 성탄의 의미성을 정화시키기 위해 성탄절에 산타 클로스 선전을 해서 안된다는 운동을 시작하고 이것이 퍼져나가자 백화점 주인들이 상당히 긴장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신부가 성탄 때 산타 클로스 선전을 반대한 것은 이것이 잘못 왜곡되어 성탄의 의미를 퇴색시키면서 상업성을 부채질 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이 사제의 염려가 현실적인 문제이긴 해도 산타 클로스의 근원을 알고 보면 교회의 아름다운 감동 일화의 하나였다.

산타 할아버지는 오늘날의 터키 지역의 주교였던 성 니콜라우스 ( ?- 353) 라는 실존 인물이었다. 그는 목자로서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을 남몰래 도우며 많은 선행을 했는데, 그가 죽은 후 그의 이야기는 노르만(Norman)족들이 유럽으로 전했다.

12세기 초 프랑스의 수녀들이 니콜라우스의 축일 (12월 6일)의 하루 전날인 12월 5일에 과거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을 기념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고, 그 풍습이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역사의 실존인물이 신앙 안에서 기억되면서 훈훈하고 아름다운 선행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17세기에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성 니콜라우스라는 이름 대신 산테 클라스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 발음이 그대로 영어가 되었고, 19세기경 크리스마스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오늘날의 산타 클로스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아버지’라고 불렸으며, 지금은 우리나라를 위시해서 영어권 밖의 지역에서는 산타 클로스로 부르고 있는데, 그 기원은 바로 사랑이 많았던 실존 주교라고 생각하면 선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상업성을 떠나 이웃사랑이라는 복음의 깊은 주제에 접근할 수 있다.

산타 클로스의 빨간색과 하얀 수염은, 어이없게도 코카콜라의 광고를 담당하던 미국의 화가 헤든 선드블론(hadden Sendblon)이 코카콜라의 상품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해서 그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산타클로스의 옷인 빨간색은 코카콜라의 로고 색깔을 상징한 것이고, 흰 수염은 콜라의 풍부한 거품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밝혀지면서 지금까지 어린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산타 할아버지라는 이미지에 고정되고 브라질 사제가 염려하는 성탄의 의미와 너무도 무관한 상업성의 모델로 변질되어 있다.

이 작품은 상업성이 아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은 선행을 했던 성 니콜라오 성인에 대한 신선하고 기쁜 신앙적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작가는 화란 출신으로 바로크 시대의 화가로서 길지 않는 인생에 자신의 개성을 담은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특징은 풍속화가 대종이었으며 평범한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미와 기쁨을 주제로 한 것이 특징이다.

그가 남긴 작품 900여점 중 종교화가 60여점이며 그중에 대표가 바로 이 작품이다. 나머지 작품의 대종은 풍속화인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흐름 , 결혼, 축제 같은 주제 외에 가정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 개구쟁이 아이들 , 버릇없는 장난꾸러기 같은 우리 삶의 평범한 주제를 많이 취급했는데, 그중에 특징적인 것으로는 "아침의 화장실 풍경"이라는 인간 삶의 가장 쾌적한 배설 공간을 통해 인간 삶의 희열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 당시 네델란드는 개신교 국가로 되면서 종교화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때였으나 그는 가톨릭 신자였기에 이런데 신경 쓰지 않고 대범하게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삶의 모습을 그렸다

` 작가는 그냥 웃음으로 끝날 그런 코믹한 작품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접근하면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작품성을 유도했다.



이 작품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10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삼대가 같이 사는지 아무튼 갓난아기부터 노인들 까지 다양한 모습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가정이 줄 수 있는 아늑한 기쁨에 도취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 부분에 축일이나 명절에나 입는 약간 고급스러우면서 예쁜 옷을 입은 계집애가 마치 이 작품의 주인공 처럼 앉아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이 계집애를 통해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계집애 손에는 세례자 요한의 인형이 들여 있는데, 이 성인은 중세기 어린이들의 질병에서 보호하는 수호자였기에 영적인 보호 아래 있어 어린이가 건강하고 그래서 가정이 행복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시편 90편엔 이런 내용이 나오고 있다.

"주께서 너의 피난처이시고 지존을 네가 방비로 모셨기에 불행이 너에게 오지를 못하고 재앙도 내 막사에 얼씬하지 못하리라 .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시어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행여 너 돌부리에 발을 다칠세라 , 천사들이 널 떠받고 가리라 ."

예나 오늘이나 자식 사랑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비길 수 있는데, 의학의 발달이 미미했던 중세기 자기 자식의 건강을 지키고픈 부모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어졌다.

작가는 이 계집애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들이 모인 가정의 행복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가 종교적인 성물만으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너무 형식적이고 심하면 위선적인 허구로도 보일 수 있기에 작가는 어린이가 사족을 못 쓰며 기뻐할 장남감과 먹음직한 군것질 거리가 가득 들어있는 과자 통 까지 등장시키면서 인간적인 행복의 정감을 한껏 더하고 있다.



네델란드가 개신교 국가가 되면서 모든 가톨릭적인 전통은 무시했지만 니콜라오 성인의 축일만은 지내도록 했기에, 북구 유럽에는 그 지역 특성에 맞는 성 니콜라오의 이야기를 어린이들의 감성에 맞게 구성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착되었다.

산타 할아버지는 축일 전날 굴뚝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와 일 년 동안 착한 일을 한 어린이에게는 상을 주고 장난꾸러기로 부모님의 속을 썩인 어린이에게는 회초리 다발을 준다고 전했다. 여기에 솔깃하다 못해 푹 빠진 어린이들은 큰 기대에 부풀어 신발을 매달아 놓고 산타 할아버지가 잊지 말고 꼭 자기에게 선물을 달라는 기도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역사적 사실과 성서와도 거리가 있는 이 내용이 어린이들에게 줄 수 있는 희망과 감동 또 이런 감동에 빠져 있는 어린이를 보는 부모와 가족들의 행복은 오늘도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온 세상 아이들의 마음을 앗아가고 있는 "해리 포터 "시리즈는 꿈도 없는 삭막하고 냉정한 어린이가 성장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다시 한 번 신앙을 내용으로 한 주제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일깨우고 있다.

꿈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지식이나 기술이나 능력으로 남을 밟고 일어서야 살수 있다는 삭막한 야망으로 자라 괴물도 변모되고 있는 오늘의 우리 자녀 교육에 너무 필요한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축일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방안 풍경과 등장 인물 들의 매무새를 보면 그래도 밥술이나 뜨는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내 아이는 이 가정의 장손이나 되듯 보이는데 옆에 있는 이 집의 하녀로 보이는 여자가 전하는 말을 듣고 징징 짜고 있다.

이유는 하녀가 이 녀석을 놀릴려는 목적으로 한 해 동안 개구쟁이로 부모님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속을 썩여서 이것을 아는 산타 할아버지에 이 녀석에게는 선물을 주지는 않고 단단한 밤 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한 짐 남겼다고 했기 때문이다. 항상 청개구리 기질로 살면서도 산타 선물에 큰 기대를 걸었던 이 사내 녀석이 자기의 행실은 생각지 않고 탈기를 하며 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어머니 곁에는 이 녀석의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자기가 받은 선물을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당시 아이들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하던 운동인 오늘날 하키에 해당하는 콜프(Kolf) 채였으니 그의 마음은 거의 안하무인의 심정이 되어 자기 어머니에게 상을 받지 못해 징징거리는 형을 보라고 한손을 가리키고 있다.

연년생으로, 평소에 싸움도 많이 한 형이었으니 어린 마음에 회초리 다발을 받아 울고 있는 형을 고소하게 여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이 둘째의 뒤편에 등장 인물 중에 가장 소박하게 보이는 할머니가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그 앞에 정장한 할아버지, 축일이라고 화사하게 입은 하녀에 비겨 초라하리 만큼 소박한 모습이다. 작가는 이 후줄구래하게 보이는 할머니를 통해 중요한 신앙적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지금 이 할머니의 관심은 선물을 받지 못해 징징대며 우는 큰 손주에게 있다.

어머니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 좋은 선물을 받아 우쭐대는 둘째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데, 할머니의 관심은 징징대는 큰 손주에게 있다. 할머니는 무엇인가를 찾아 우는 큰 손주를 달래고자 한다. 할머니는 우는 큰 손주를 달래기 위해 대강 이런 말을 준비했을 것이다.

" 산타 할아버지가 아버지 어머니 속을 썩인 너는 상을 주지 않고 말 잘들은 동생에게 만 상을 주려고 하기에 , 내가 내년에 너도 꼭 착한 사람이 될 것이니 미리 상을 달라고 해서 내가 받아둔 상이 여기 있다 . 자 받아 울음을 그치고 이제부터 절대로 속을 썩이거나 나쁜 장난질을 말아라"

할머니가 찾은 선물을 내밀자 큰 놈도 울음을 그치고 모든 가족들이 기뻐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 작품의 결론이다.

이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고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가정의 화목과 행복에 대한 기대는 대단하면서도 우리는 엉뚱한데서 이것을 찾고자 하는 시행착오를 범하고 있다. 연말연시이면 메스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가정의 행복은 바로 백화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넉넉한 경제적인 배경이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한다는 암시를 하면서 백화점에서 고급 물건을 구입해서 들고 나오는 부부들 , 모녀 ,모자들의 모델들이 현대인들의 정신을 혼빠지게 만들고 있다.

브라질의 어떤 사제가 산타 클로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것은 이런 면에서 너무도 소위 시대 징표를 바로 읽은게 아닐까?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신앙의 내용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큰 기쁨과 행복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따뜻하게 알리고 있다. 행복 창고는 백화점이 아니라 성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평범하다 못해 재고의 여지도 없는 시시한 표현일까 ?

이 작품은 오늘 백화점의 성탄 장식 처럼 우리의 혼을 앗아가고 있는 현대 문화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을 깨우처 주는 조용하면서도 힘찬 강론으로 다가오고 있다.

< 작은 예수회 이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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