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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십자가 / 레나토 구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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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 (1940) 작가: 레나토 구투소(Renato Guttuso 1911- 1989) 크기: 소재지 :이태리 시칠리아 바그엘레아

작가는 그의 성장 과정이 작품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예가 많은데 , 작가 역시 철저히 자기 환경에서 형성된 체험을 통해 성장한 작가 였다.

시칠리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더없이 강렬한 생명을 발산하는 고향의 풍경에 도취되면서 모든 것을 정열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습관에 익숙하게 된다. 좋은 기후와 자연조건으로 에덴 동산처럼 수려한 환경에서 작가의 구김살 없는 예리한 감성이 형성되었다.

이런 작가에게 보여진 주변 세상은 너무도 큰 실망의 연속이었으다. 성직자들까지 가세한 지주 계급과 기득권자들의 횡포는 맑고 상쾌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에게 너무도 큰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범죄 조직의 대명사인 마피아 조직의 근원지인 시칠리아에서 많은 교회지도자들은 기득권자들의 보호자 행세를 해왔다. 그들이 교회를 많이 도우기에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꿈이 예술적 성향으로 전환되면서 그는 전통적인 표현 기법을 철저히 배격하고 시칠리아의 풍광에서 드러나는 강렬한 색갈과 생명력을 바탕으로 한 자기만의 화풍을 구축하게 되었다.

작가의 젊은 시절에 독일의 나치스 처럼 이태리에서도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정당이 억압과 독제 세력으로 부상되자 , 민중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것은 억압을 강요하는 정치 체제에 대한 예술적 반응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이태리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프랑코 독제에 항거하는 뜻으로 "게르니카 "를 그린 피카소와 일생을 함께 하는 우정을 키우게 되었고, 년 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도 각별한 우정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한마디로 그의 예술은 당시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자기 나름의 강력하고 분명한 의사의 표현이었다.

이런 강한 신념은 극히 종교적인 주제에 속하는 "십자가"라는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성서에 나타나는 것을 묘사하는 전동적인 그리스도의 신변 사건으로 표현되는 십자가가 아닌 작가의 시대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십자가의 표현이기에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안정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성속(聖俗)의 분리개념으로 독제 세력에 침묵하고 있던 당시 교회 지도자들로 부터 곱지 않는 시선을 받게 되었고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급기야 신자들이 봐서는 않될 금지작품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교회적인 시각으로는 어떤 이유로든 사회 안정을 위협하는 빨지산이나 혁명군들을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 권리와 자유라는 이념을 위해 투쟁하는 모든 운동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이념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거나 , 고문을 당하는 모든 사람은 그 시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작품은 그가 대단한 영향을 받았던 피카소의 입체주의와 독일적인 표현주의에서 대단한 영향을 받았다.



도적들 사이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고통이 드러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성서에 나타나듯 극심한 고통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 이 고통은 주님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 그분이 죄값도 아니고 오로지 인류 구원이라나는 대의 때문이었다.

작가는 당시 불의한 정치 사회 구조에 반항하면서 고통 받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 시켰다. 세상의 불의를 극복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의 건설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은 바로 그 시대의 예수라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



말을 탄 병정들은 이태리 정치 현실에서 막강한 권력으로 군림하면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제 정부의 모습이다.

유난히 붉은 색이 많이 사용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피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시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심성에 각인된 강렬한 생명력의 표현이었다.



기득권자들의 횡포에 시달려야 하는 선량한 시민들의 상징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고통 받은 그분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에 몸부름치는 여인들 처럼 불의와 폭력의 악순환의 연속인 사회 구조에서 가장 고통 받는 것은 바로 무죄한 시민들이다.

작가는 일생을 생명과 자유를 주요 작품 주제로 삼아 많은 작품을 남겼기에 풍경화, 누드화, 생활 풍속화를 많이 남겼으나 연륜을 더하면서 점점 더 크리스챤 신앙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크리스챤 신앙의 주요 표현인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자기의 현실에서부터 접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차 대전 중 그는 "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주로 전쟁의 만행을 고발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작가의 현실에서 체험한 십자가 신학의 예술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교회도 포함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기득권자들의 격렬한 반대는 대단한 논란과 관심을 불러 일으키면서 작가의 대표작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몰이해와 반대를 받게 되듯이 , 작가 역시 전통적인 표현이 아닌 작가의 사회현실에서 십자가를 조명했기에 대단한 반대를 받게 되었다.

전통적인 십자가의 표현은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었다면 작가는 몸담고 있는 현실안에서 하느님 자녀로서의 기본인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것이다.

성서의 다음 말씀은 이 작품 앞에서면 생명력 있는 의미로 제시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 9)

오늘날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작가 당시와 전혀 다르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 심판" 이 당시 교회로 부터 음란 작품으로 평가되어 옷을 입히는 법석을 거쳐야 했으나 근래 새로 복원되는 과정에서 작가의 원래 의도대로 복원되면서 교황님이 이 작품의 긍정적인 가치성을 평가하신 것과 같다.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한: 14: 6) 하셨다.

주님은 크리스챤의 유일한 길이면서 주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여러 길이기에 작가의 작품이 주님께로 가는 획일적인 길만 생각하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면 어떤 정통적인 십자가의 의미 못지 않게 현실 삶에서 찾아야 할 십자가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하신 억압받는 민중과 이 억압에서 해방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여정을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새로운 차원의 성화라고 볼 수 있다.

< 작은 예수회 이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