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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전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교의 수호자 ) 대축일 ~

 

 

12월 3일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아침기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 제1저녁기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 제1저녁기도 후 끝기도

 

 

 

 

 

 

 

포교 사업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사제 대축일 

 

1506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나바라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성 이냐시오의 동료가 되었다. 1537년에 로마에서 사제로 서품받아 자선 사업에 헌신했다. 1541년 동양으로 와 십 년 동안 인도와 일본에서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중국 앞바다의 샹챤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성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E Vita Francisci Xaverii, auctore H. Tursellini, Romae, 1596, Lib. 4, epist. 4[1542] et 5[1544])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8년 전에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사는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땅이 몹시 메마르고 가난에 시달리는 이 부근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한 명도 살지 않습니다. 이곳 원주민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그들을 위해 미사를 드릴 사제도 없고, 사도신경이나 주의 기도, 성모송 그리고 십계명을 가르칠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온 후 저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아직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흔히 말하듯이 오른손과 왼손을 구별할 줄 모르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자주 졸라서 성무일도를 보거나 식사하거나 또는 휴식을 취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하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도 거룩한 청원을 양심의 가책 없이는 거절할 수 없으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도 신경과 주의 기도 그리고 성모송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 중에 머리 좋은 아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지극히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여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유럽의 대학 특히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서 사랑보다는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열매를 맺도록,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꾸짖을 마음을 자주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학문에 대해 쏟는 열성만큼만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과 자신이 얻은 지식에 대해 결산서를 제출해야 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영적 수련과 다른 방법으로 자기 마음속에 하느님의 뜻을 알고 느끼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욕망을 떠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주여, 저는 여기 있나이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인도까지라도."

 

'동방의 사도' 하비에르 성인 탄생 500돌  

기념행사 프랑스 루르드, 29일부터

 

 

(사진설명)
예수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왼쪽부터)와 성 이냐시오 로욜라, 성 베드로 파브르가 그려진 이콘.   CNS 자료사진

 

 

'동방의 사도'로 유명한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us Xaverius, 1506~1552) 성인 탄생 500주년을 맞아 전세계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회' 회원들이 29일~8월1일 프랑스 루르드에서 국제 행사를 연다.

 

전세계 회원 600명 이상이 모이는 이번 행사는 △젊은이 복음화 △문화 복음화 △현대에 필요한 복음화 방식 등에 대한 국제 회의와 나눔으로 진행한다. 한국에서는 하비에르 국제학교 문명숙(마리아, 49) 교감을 비롯해 5명이 참석한다.

 

또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영적 친구 이냐시오 로욜라(?~1556) 성인을 기리는 행사도 열려 전세계 예수회 회원들도 모인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삶과 영성

 

인도와 일본에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해 '희망봉부터 인도와 중국, 일본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북(北)스페인 바스크족 출신이다.

 

그는 몰락한 가문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당시 유럽 최고 대학인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면서 인생의 진로를 바꾼다. 개인 영광에 목표를 두던 그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 나라 영광'으로 돌아선 것이다.

 

1529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534년 8월 성 이냐시오를 포함한 다섯 동료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위 순교자성당에서 '예수회'를 설립한다.

 

그 후 1541년 포르투갈 왕 요청에 따라 교황의 동방특사 자격으로 리스본을 떠나 1년 뒤 포르투갈령 동인도 수도 고아(Goa)에 도착, 3년간 전교활동에 전념한다. 1545년 9월경 말레이반도 믈라카(Malacca)에 상륙한 그는 이듬해 1월 뉴기니아섬 서쪽 몰루카스제도를 방문하고 믈라카로 돌아오다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 세례를 준다. 그리고 3년 뒤 그 일본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2년 3개월간 복음을 전파, 일본교회 복음화에 큰 영향을 준다.

 

일본에서 복음를 전파하던 중 중국이 아시아 문화권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중국 선교로 목표를 수정해 1551년 11월 일본을 떠나 믈라카를 거쳐 이듬해 인도 고아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국 상치안 섬에서 약속된 안내자를 기다리던 중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1544년 1월15일 인도에서 쓴 그의 편지에 그의 삶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주여, 당신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를 보내 주소서."

 

서울 하비에르 국제학교 엘렌 르브렝(헬레나, 71) 교장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영성 핵심은 '하느님에 대한 조건없는 신뢰'"라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의탁하는 삶으로 흔들림이 없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문명숙 교감은 성인에 대해 "교황 특사 자격으로 인도와 일본을 방문해 전교에 앞장섰던 성인께서 가져간 것이라곤 수단과 성경책 뿐이었다"면서 "예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 맨발의 성인"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성인 탄생 500주년인 동시에 하비에르 사도회 창립자인 마들렌느 다니엘루(1880~1956년) 서거 50주년, 그리고 하비에르 성인을 성직으로 이끈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 서거 450주년이다.

 

[평화신문, 제880호(2006-07-16), 이힘 기자]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스페인 나바라 주의 하비에르 성에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페인 통일전쟁으로 집안이 몰락한 뒤 파리 생트 바르브 대학에서 공부하고, 1530년에 철학과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거기서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 예수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1534년에 초창기 회원 6명과 함께 파리 근교의 몽마르트르에서 첫 서원을 하였고, 영신생활을 체험한 뒤 1537년에 동료들과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540년에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인도와 극동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그의 활동지역은 인도와 스리랑카, 말레이 반도에 있는 말라카와 몰루카 제도 그리고 일본 등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그는 일본에 온 최초의 신부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나누었다. 또한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특히 나병환자들에게 봉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뛰어난 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다. 그는 언제나 “주님, 저는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에나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고백했다.
 
중국선교를 결심하고 중국 내지로 진출하려던 그는 병을 얻어 1552년 중국 광동 근처의 상치안 섬에서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인도의 고아에 안장되었다.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라고 부르는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였고, 개종시킨 이만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인도와 일본의 사도’로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그를 시성하였으며,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선교활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축일은 12월 3일.